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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의 루브르

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 이숲 | 2011년 10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9 리뷰 14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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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10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46쪽 | 816g | 152*220*30mm
ISBN13 9788994228242
ISBN10 8994228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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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나는 고전 회화에 눈떴고, 화폭 이면에 숨은 놀라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또한, 내 생각과 시야를 넓힐 수 있었고, 내게 익숙하지 않았던 문화를 감탄하며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언제 어디에 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공통점을 발견했고, 인류 역사의 뿌리에서 작동하는 자연의 거대한 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제 루브르는 내게 박물관의 의미를 넘어서 일상의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 햇살이 유난히 맑은 날, 작업이 손에 잡히지 않는 허전한 시기에 나는 습관처럼 루브르를 찾는다. 서양의 어느 철학자는 덧없고 유한한 인간의 삶에서 반복적인 일상이 오히려 행복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계기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작은 고향 마을에 살면서 평생 그곳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칸트는 정확하게 오후 네 시만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길을 산책했기에 마을 주민은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시침을 네 시로 맞췄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어찌 보면 루브르는 내 삶의 오후 네 시를 가리키는 행복한 시계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 p.10

남자의 손에서 힘을 느낀 순간, 여자는 본능적으로 상대를 밀쳐낸다. 굳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반사적인 행동이 감정을 앞섰다. 자라면서 줄곧 몸에 밴 숙녀의 몸가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다가오는 사내의 널찍한 가슴을 한 손으로 떠밀며 다른 손으로는 축축한 흙바닥을 짚은 채 몸의 균형을 잡는다. 정신이 아뜩해지고 가슴은 터질 듯 뛰기 시작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뿌리칠까, 아니면 못 이기는 척하고 남자의 욕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까? 여인의 작은 가슴은 터질 듯 콩닥거리고 볼은 빨갛게 물든다. 눈썹이 짙은 더벅머리 젊은 사내도 잠시 망설인다. 엉겁결에 벌어진 일이지만, 여인의 가벼운 저항에 순간 멈칫거린다. 미끄러진 여인은 발을 헛디뎠고, 달려든 사내는 그녀의 마음을 헛디딘 것일까? 자신의 호감 어린 눈길에 싫지 않은 눈길로 응답하던 그녀의 속내를 헛짚었을 리 없는데…. 바로 눈 아래 드러나는 여인의 하얀 목덜미가 가까이서 보니 더욱 곱다. 여인의 유혹적인 자태에 사내는 다시금 피가 끓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 애정의 감각을 전달하는 신경조직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작동한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숲길, 주저앉은 두 사람은 복잡하게 교차하는 감정을 서로 드러내지 못한 채 잠시 그렇게 엉거주춤 껴안은 채로 있었다. 문득 지나가는 바람에 짙은 풀 냄새와 흙냄새가 남녀 사이에 퍼진다. 와토의 조그만 그림 속에 정지된,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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