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며느리 역할을 그만두겠습니다.
명절을 이틀 앞둔 날 저녁이었다. ‘며느리 사표’라고 쓴 봉투를 들고 시부모님을 찾아갔다.
아버님은 이리저리 봉투를 열어 살피셨다.
“이게 무엇이냐?”
“죄송합니다. 맏며느리 역할을 그만두겠습니다.”
아버님은 잠시 할 말을 잊으신 듯 가만히 계셨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아버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과 그만 살려고… 우리 이제 여기까지인 것 같아
“나 당신과 그만 살려고…. 우리 이제 여기까지인 거 같아.”
이 한마디를 남편에게 당당하게 하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두렵고 떨리던 한마디를 입 밖에 내고 나니 의외로 마음이 더 차분해졌다.
게다가 미소까지 짓다니. 말하면서 비장함보다는 편안함과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미소 짓는 내 얼굴과 다르게 남편은 큰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 보였다.
나의 독립 그리고 딸과 아들의 독립 연습
시부모님께는 며느리 사표를 내고, 남편에게는 이혼 선언을 하여 메고 있던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나니, 다음은 자연스럽게 아들과 딸의 독립으로 시선이 이어졌다.
“대학을 졸업하면 부모 집을 떠나서 살도록 해라. 각자 자신이 살 집을 찾아봐야 할 거야. 임대보증금과 6개월 치 월세를 보조해줄 테니, 생활비는 각자 일을 해서 살아야 하고. 너희들이 부모로부터 독립하기까지 6개월 정도 연습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거란다.”
있어도 없는, 사실상 남편 없는 삶
일요일 조기축구회 회원들과의 친교는 곧 토요일로 이어졌다. 남편은 토요일부터 그들과 어울려 당구도 치고 술자리도 가졌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아내의 불만은 ‘일주일 동안 회사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이유로 묻혀버렸다. 그렇게 토요일마저도 조기축구회에 빼앗겼다. 점차 금요일에도 퇴근하기 무섭게 차를 주차해놓고 나갔다. 금요일 저녁에 시작된 만남은 토요일, 일요일까지 이어졌다. 나는 금요일부터 시작하는 ‘주말 과부’로 바뀌었다. 게다가 평일에는 주말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퇴근하고 돌아오면 거실 소파에 누워 TV 앞에만 있었다. 남편은 있지만 사실상 남편 없는 삶이었다.
홀로서기, 두려움에서 자신감으로
혼자 살려면 첫째로 돈이 있어야 했는데, 여유 있을 때 돈을 모은다는 것은 애초에 어려웠다. 아주 조금이라도 따로 떼어 작은 적금을 들었다. 그리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려고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강의료를 받으면 따로 떼어 조금씩 모았다. 말 그대로 안 쓰고 모으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6년 정도 모으니 2천만 원이 되었다. 여자들이 독립하려면 경제력이 첫째라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났다. 이혼해서 혼자 살기엔 적은 돈이었지만 큰 힘이 되었다. 그 돈은 서서히 목소리를 내는 데 힘을 실어주었다.
다음으론 혼자 살게 될 때의 생활비를 구체적으로 계산해보았다.
꿈 작업, 무의식의 상자를 열다
남편의 외도 기간 동안 마음의 큰 상처를 입었다. 고통의 구체적인 답을 찾기 위해 정신과 의사도 찾아가고 신부님, 수녀님, 스님, 교수님, 선생님, 선배 언니, 친구, 친정어머니… 답을 알 것 같은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나의 의문에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
나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알 수만 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부모 교육 강의와 심리 공부를 하면서 꿈이란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반복되는 꿈속에 메시지가 있다
우리가 비슷한 꿈들을 반복해서 꾸는 이유는 자신에게 중요한 어떤 일이 미해결 상태로 반복되고 있음을 뜻한다. 특히 자신에게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해서 알려주는 것이다. 마음 안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되풀이되고 있어서 자신의 삶을 방해하고 있다.
반복되는 꿈에는 상처, 고통, 잘못,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들이 숨어 있다. 마치 미세 크랙이 있는 레코드판처럼 이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같은 구간을 반복 재생한다.
불행의 대물림을 끊고 싶다면
나의 불행이 반복된 것은 내가 나를 몰랐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스스로를 모르니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세월이 지나보니 내 안의 반은 아버지, 반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살았다. 영문도 모르고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 열심히 쉬지 않고 뭔가를 했다. ‘열심히 살아야지, 희생하며 살아야 해’라고 알고 있으면, 그러한 일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다
심리학 용어에 ‘투사’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생각, 감정, 행동 등을 타인의 것으로 인식하여 자신을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현상을 투사라고 한다. 예를 들면 자신이 상대에게 미운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 상대가 자신을 이유 없이 미워한다고 인식하거나, 나 자신이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남편을 가부장적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거울을 통해서야 자신을 볼 수 있듯이, 스스로 보지 못하는 내면의 모습을 타인이란 거울을 통해서야 볼 수 있다.
며느리 사표 후 작은 기적, 달라진 명절
가장 큰 변화는 제사와 명절의 간소화에 있었다. 맏며느리가 빠지고 나니 동서만 남게 되었다. 어찌 보면 동서는 갑자기 큰며느리가 빠진 자리를 원치 않게 물려받을 처지였다. 시부모님은 동서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하셨다.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 두 번 있던 제사를 한 번으로 줄이셨다. 나중엔 한 번 있던 제사도 집에서 지내지 않고 성묘를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추석과 설에도 마찬가지로 집이 아닌 산소로 향했다. 시아버님과 남자들, 가고 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산소로 가서 간소하게 차례를 지낸다. 명절과 제사 때면 모이던 삼촌, 친척들도 산소에서 차례를 지내고 그곳에서 헤어졌다.
내 생애 첫 주부 휴식년, 밥 안 하기
주부가 밥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큰 벌이라도 받는 줄 알았다. 그런데 1년이나 밥을 안 해도 벌을 받지도, 하늘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이래도 되는구나.’
‘주부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것에 묶여 있을 땐 마치 천벌이라도 받는 양, 금기라도 어기는 양 죄책감을 느꼈다. 주부가 그래도 된다는 것, 밥을 안 할 수 있다는 것에 자유와 홀가분함을 느꼈다. ‘무엇이든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준다.
남편, 내 편으로 돌아오다
남편은 상담 때뿐 아니라 내가 얘기하고 싶을 때도 들을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서운했던 것, 마음 아프고 힘들었던 것, 어린 시절의 아픈 이야기까지 공감하며 들어주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의 행동, 생각, 감정에 대한 이해가 더해졌다. 우리는 상담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주 1회 부부의 날을 가졌다. 영화를 보고, 등산도 가고, 음악회도 갔다.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얘기도 하고 책도 읽는다. 신혼 때 하지 못했던 일들을 머리가 희끗해져서야 누릴 수 있었다.
남편의 행복은 어디에서 왔을까
최근 남편에게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남편에게서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가장 행복했던 때가 군대 있을 때라는 것이다. 6년 전 아들이 군에 입대할 때, 아들은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얼굴을 하고 들어갔었다. 군대가 외부와 차단되어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자유롭지 못한 생활이 제일 싫다는 것이었다. 아들과 반대로 남편은 그런 이유 때문에 가장 편안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 누구도 아닌, 먼저 자신에게 최선을 다한다
남편을 만났을 때 24시간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을 했다. 내 전부가 이 남자와 함께 움직이고 싶었다. ‘이 남자 없으면 못 살겠어.’ 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이 남자 때문에 못 살겠어.’ 하게 되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와 환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남편과 함께 있을 때만이 행복한 줄 알았다. 나 자신과 행복을 남편에게 의탁했다. 부부는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