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네 번째 이사다. 입사 이 년째 되는 봄, 네리마 구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독립했다. 고지 정에 위치한 회사까지 걸어서 이십 분, 요쓰야에 있는 철골 이층 연립주택의 방 하나에 식당과 부엌이 딸린 집에서 살았다. 혼자 살았고 가구와 가전제품은 새로 샀기 때문에 이사업체를 부를 것까지도 없었다. 방에 있던 책과 레코드를 일단 절반쯤 꺼내 상자에 담아서 시빅에 싣고 세 차례 왕복한 것으로 이사가 완료됐다. 결혼해서 처음 세 든 집은 오기쿠보에 있는 방 두 개에 거실과 식당이 있는 아파트였다. 신혼은 제로에서 시작하는 작은 생활, 같은 말은 아무도 안 했을지 모르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결단코 아니라고 충고하겠다. 결혼은 친척을 두 배로 늘리고, 짐을 두 배로 늘리고, 싸움을 네 배로 늘린다. 아내의 옷차림은 늘 봐서 익숙했을 텐데도, 막상 이삿짐을 풀어 대량의 여자 옷과 가방과 신발이 나타나자 시골 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내 이름이 쓰인 상자는 열어도, 열어도 책과 엘피와 시디뿐. 아내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협의 결과 아내는 드레스룸을 점령하고 나는 현관 옆 한 평짜리 북향 방을 특별 자치구로 얻었다. 책과 레코드와 시디는 사용중일 때만 거실에 들여놓고 끝나는 대로 바로 치울 것이며, 방이 꽉 차서 거실에까지 나올 경우 신속하게 처분하겠다는 조건부 승인이었다. 편집자니까 책은 직업과 관련된 도구라고 말해도 아내는 도서관 있잖아, 도서관, 이라고 반박했다. 당신 옷은 어떠냐고 지적할 틈도 없이 원피스도 코트도 신발도 가방도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올해 안 사면 내년은 없는걸, 평생 한 번뿐인 만남이라고! 하고 아내가 선제공격을 가했다. 고소득자인 아내가 자기 돈으로 산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아내 뒤를 지키는 옷장은 충성을 맹세한 병사처럼 흐트러짐 없이 정렬하고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밟히면 찔릴 것 같은 핀힐. 퇴각하는 수밖에 없다. --- p.25~27
‘다다시 씨의 오래된 집에 구경 가도 돼?’ 가나의 메일은 아주 간단했다. 거기에 쓰여 있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갓 세탁한 흰 시트처럼 무덤덤하고 그저 바람에 펄럭펄럭 날렸다. 나도 따라하듯 어디까지나 무심하게 승낙하는 답신을 보냈다. 메일이 오간 끝에 이번 주 토요일에 놀러 오는 것으로 약속이 잡혔다. 목소리를 들을 일도 없이 뭔가를 정하는 것은 편하다면 편하지만 뉘앙스를 알 수 없으니 점점 불안해진다.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산다는 사실도 이 방문이 특별한 건지 아닌지 잘 알 수 없게 했다. 전철을 갈아타고 멀리서 오는 게 아니니까 방문의 동기가 가벼운 것이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그래도 나는 머리를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회전시켜 가나의 방문 동기에 내가 기뻐해야 할 가능성이 숨어 있는지 상세히 검토했다. 역시 모르겠다. 그 장면을 떠올려보고 당황도 했다. 나와 가나는 바로 일 년 전까지 사귀는 사이였다. 사귀는 사이가 아닌 지금, 한 집 안에서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면 좋은 건가. 사 귀는 사이가 아닌 남녀는 뭐가 이렇게 성가시게 신경을 써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