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18년 03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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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44쪽 | 386g | 142*210*15mm |
ISBN13 | 9791186061589 |
ISBN10 | 1186061588 |
출간일 | 2018년 03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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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44쪽 | 386g | 142*210*15mm |
ISBN13 | 9791186061589 |
ISBN10 | 1186061588 |
머리말 - 004 1. 한국사 제1의 위인 - 015 2. 세종과 노비제 15~17세기 인구의 30~40%는 노비 _ 024 양반의 노비 규모 _ 026 입역立役과 납공納貢 _ 028 노비는 주인의 재물 _ 033 노비는 함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_ 036 노비 증식의 경로는 양천교혼良賤交婚 _ 039 노비제는 기자箕子의 법 _ 042 고려와 조선의 사회구성 _ 045 고려 노비의 처지는 그리 열악하지 않았다 _ 046 태종의 노비제 봉쇄정책 _ 050 세종, 노비의 권리를 박탈하다 _ 053 주자의 아름다운 말씀 _ 057 병길丙吉은 시신에 대해 묻지 않았다 _ 061 세종, 양천금혼의 빗장을 풀다 _ 062 충노忠奴 미담 _ 065 추노推奴 활극 _ 069 성군이라면 영조 _ 073 죽은 종을 위로하다 _ 076 『흥부전』의 세상 _ 079 3. 세종과 기생제 김치 종 _ 084 낙동강 푸른 물에 _ 087 슬픈 향복香卜 _ 089 직비直婢 _ 093 풍류비風流婢 _ 096 기생의 기원 _ 097 고려 기생의 신분 _ 101 비천卑賤 관념의 심화 _ 104 세종, 기생의 딸을 기생으로 삼다 _ 107 기녀를 두어 사졸士卒을 접대하라 _ 110 위안의 실태 _ 114 대를 이어 위안하다 _ 117 천산賤産과 천고賤姑 _ 119 기생 머리 올리기 _ 121 음녀淫女 속공屬公 _ 124 19세기의 기생제 _ 127 춘향의 꿈 _ 132 4. 세종과 사대주의 대몽골 울루스 _ 140 이씨 왕가의 내력 _ 142 최초의 세계지도 _ 145 기자箕子의 나라 _ 147 세종, 하늘에 대한 제사를 폐하다 _ 151 지성사대至誠事大 _ 156 사라진 부월斧鉞 _ 160 역월제易月制의 폐지 _ 163 도덕국가로의 순화 _ 169 백성에게 바른 한자음을 가르치다 _ 171 학계라 해도 집단연고의 무리 _ 175 최만리崔萬理의 반대 _ 178 소중화의 주체성 _ 180 5. 대한민국은 자유인의 공화국이다. 요약 _ 184 몇 가지 추가 _ 187 현대 한국사학의 문제점 _ 190 자유에 대한 상념 _ 194 그대는 자유인인가 _ 199 현대판 『소학小學』 _ 201 문명사의 대전환 _ 203 환상의 성립 _ 208 |
몇 년 전에 『조선미시사(朝鮮微視史)』라는 강좌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국사책과 역사 다큐, 그리고 사극만으로 우리 역사를 알았던 저로서는 상당히 흥미진진한 부분이 많았던 역사 강좌였죠.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 뿐 아니라 여전히 호평받기 어려웠던 부분에 대한 재확인도 있었고, 학교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조선 시대 첩보전이나 무기 제조에 대한 내용도 놀라웠구요. 그 강좌에서도 세종대왕과 조선시대를 다루기는 했는데, 조선이 그리 허술한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과 세종대왕의 인품이 강조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세종대왕과 우리 역사의 위대함에 대해 저 역시도 나름 국뽕에 어느 정도 취해 지내다가, 작년 조국 사태 이후로 역사를 보는 관점이 좀 달라졌습니다. 정치, 역사, 그리고 경제까지 생각이 여러 모로 바뀌었네요. 예전엔 그 세 가지가 각각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관심했는데, 지금 보니 그 셋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게 아니더군요. 그 전까지는 정치는 지루해서, 역사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서, 그리고 경제는 복잡해서 관련 서적까지 탐독해가며 들여다볼 분야는 아니라고 여겼던 걸 반성하는 중입니다. 정치는 곧 경제이고, 경제는 역사와도 멀리 떨어진 분야가 아니더라고요.
이영훈 교수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는 그리 두꺼운 책도 아니고, 활자체도 그리 작지 않아서 분량도 많은 편은 아닙니다. 애초에 인터넷 매체에서 강의한 내용 중 한 강을 확장한 출간물이라 독파하는 데에 오래 걸리지도 않습니다. 책의 뒷부분에는 친절하게도 「찾아보기」까지 있어서 ‘앞에 나왔던 인물 or 사건’인 것 같은데...?‘싶으면 되짚어 보기도 편했네요.
제목만 봐서는 ‘감히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인물 최고봉 세종대왕을 깎아내려?’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막상 읽어나가는 동안 제가 당연하다고 넘어갔던 사극의, 혹은 우리 전래 동화의 여러 부분들이 당연한 게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노비의 가격은 『경국대전』에서 저화 4천 장으로 정해졌다....(중략)...노비의 재산 가치는 666일의 임금에 해당하였다. 666일이 노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5~16세기의 연간 이자율은 대개 40% 수준이었다. 이에 노비 재산에서 발행하는 이자는 연간 266일의 임금과 같다. 원금과 이자를 합하면 도합 932일이다. 1년은 365일뿐이다. 이제 노비가 연중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도 원리금을 다 상환할 수 없다. 요컨대 노비 가격이 저화 4천 장이라 함은 조선의 노비는 원리적으로 해방이 불가능한 존재임을 의미하였다. (p.34) |
미국 흑인 노예 제도에 비해서는 나았다고 여겼던 노비 제도가 실상은 훨씬 처참했더군요. 게다가 고려 시대 노비의 재산 가치가 100~120일 임금에 해당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조선 시대 노비제의 상황이 얼마나 악화된 것인지도 알 수 있었구요.
그리고, 그 옛날 『전설의 고향』이나 전래동화책에 나왔던 ‘개똥이, 마당쇠, 삼월이, 꽃분이’라는 이름들에 대해 막연하게 미신적인 작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순진한 믿음이었을 수도 있단 걸 알게 되었습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옛날에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하찮은 이름들을 붙인 게 아니라, 실은 그들을 동류의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붙였던 이름일 수 있단 걸요.
...노의 이름은 동물과 식물, 또는 물상에서 따온 것이 많았다. 동물의 경우를 열거하면 강아지, 도야지, 망아지, 송아지, 마당쇠, 두꺼비 등이다. 동물의 똥오줌에 비유한 경우도 많은데 소똥, 말똥, 개똥 등이다....(중략)... 비의 경우에는 삼월이나 구월처럼 태어난 달을 칭하거나, 역시 동물에 빙자하여 누른개 또는 암캐라 하든가, 얼굴이 예쁠 경우 꽃분이라 하였다.... (p.36) |
저자는 세종대왕을 ‘저항이 드센 일에는 결코 무리를 하지 않는 온건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평합니다. 학술, 신분, 예제, 외교 방면에서는 큰 업적을 남겼다고도 하죠. 다만, 세종은 양반의 나라 조선 왕조의 성군이었으며, 지금 이 시대 -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존중되는 시대에도 추앙 받고 계승되어야할 지도자 상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집니다.
요즘 유튜브 인구가 늘어나면서 국뽕 채널로 불리우는 영상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그걸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애국심의 바탕에는 어느 정도 국뽕도 들어있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게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 왜곡과 허상에서 기인한 거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동일한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과, 진실이 아닌 환상에 기인한 역사관을 갖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요.
무결점의 영웅 신화보다는 불완전한 한 인간의 공(功)과 과(過)를 객관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가 자유지식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입니다.
세종을 긍정적으로 보기만 하는 기존의 시각에 벗어나 새루운 관점에서 세종의 긍정적인 점에서만 벗어나서 세종 이후 사회적으로 미치는 면에 대해서 저자의 시각으로 저술한 책입니다
「환상의 나라」시리즈를 시작하면서
“환상의 나라,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아주 좋다, 멋지다, fantastic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 아니다. 허상이다, 착각이다, illusory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다.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데, 따져보니 근거가 없다,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거짓말로 판명된다, 그런 것이 내가 말하는 환상이다.
환상은 인간들을 큰 신뢰와 협동으로 이끌 수 없다. 환상이 빚은 역사와 현실의 간격은 정신과 육체의 분열을 야기한다. 환상은 그 자체로 반과학이다. 환상은 직시되어야 하며, 적절한 대안과 더불어 극복되어야 한다. 신생 대한민국의 지식인이 감당할 시대적 과제였다. 지난 70년의 건국사를 돌아볼 때 대학을 비롯한 지식사회가 그에 제대로 부응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식사회는 환상을 조장하는 역할에 골몰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나라는 갖가지 환상의 굴레에 심하게 옥죄인 가운데 숨쉬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안으로는 한 국민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이념의 대립이 심한 가운데 밖으로는 우방과 공연한 마찰을 일삼고 있다.
2016년 5월부터 3개월간 어느 인터넷 매체에서 ‘환상의 나라’라는 제목의 강의를 한 것은 그 같은 위기감에서였다. 모두 12개 주제였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컸던 순서로 몇 개를 나열하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나라는 누가 팔았는가’ ‘우리 민족, 그 불길함’ ‘위안소의 여인들’ ‘환상의 통일론’ 등이다. 지금의 이 책은 제1강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강의노트를 학술서로 평가받을 수 있는 분량과 형식으로 확장한 것이다. 나머지 강의에 대해서도 하나씩 같은 식으로 단행본을 출간할 계획이다.”
세종과 노비제
17세기 중엽 조선왕조의 인구는 대략 1,200만을 헤아렸다. 그중의 30~40%, 그러니까 360~480만의 인구가 노비 신분이었다. 노비가 그렇게나 많았던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김없는 사실이다. 1606년에 만들어진 경상도 산음현과 단성현의 호적이 전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랜 호적이다. 산음현 호적에서는 인구의 42%가 노비 신분이다. 단성현 호적에서는 64%이다. 1609년에 만들어진 울산부 호적이 있다. 거기서 노비의 인구 비중은 47%이다. 이상이 17세기 초라면, 17세기 말에는 1690년에 만들어진 대구부 호적이 있다. 거기서는 인구의 43%가 노비이다. 이처럼 17세기 경상도의 경우, 호적에 등록된 인구의 42~64%가 노비였다.
경상도 외의 호적으로서는 1663년에 만들어진 한성부 호적을 들 수 있다. 오늘날의 서울 아현동, 가좌동, 합정동 일대의 호적이다.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총 2,374명인데, 그 가운데 1,729명, 곧 73%가 노비이다.
당시 한성부의 인구는 대략 20만이었다. 그중의 절반은 4대문 안의 성내에서, 나머지 절반은 4대문 밖의 성저城底에서 살았다. 위 호적은 17세기 중엽 성저 인구의 근 4분의 3이 노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한성부, 곧 서울은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적 양반가문이 모여 사는 곳이다.
17세기 서울은 한 마디로 노비들이 바글바글하는 도시였다. 15, 16세기로 올라가면 전하는 호적이 없기 때문에 노비의 인구 비중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17세기보다 많았음은 거의 확실하다.『왕조실록』에 나오는 여러 정보를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15세기 말 총인구 900만 가운데 적어도 40%는 노비였다.
15~16세기 서울에 거주한 양반관료는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100명의 노비는 소유하였다. 관직이 높아지면 그 수가 더욱 많아져 수백 명쯤은 보통이었다. 현재 전하는 분재기分財記 가운데 노비를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은 정3품 관직의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이맹현李孟賢이란 사람인데, 총 758명에 달하였다. 그보다 품계가 높은 판서나 정승 급의 고관대작이면 1천 명을 넘기기 어렵지 않았다. 왕족으로 올라가면 아마도 수천 명이었을 것이다. 알려진 최대 규모는 세종의 제5왕자인 광평대군廣平大君과 제8왕자인 영응대군永膺大君이다. 『왕조실록』은 이 두 왕자의 노비가 각각 1만 명을 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왕조의 성립은 공동체사회에서 신분제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하였다. 조선왕조를 연 정치세력은 고려왕조의 전통을 이어 처음에는 노비인구의 확산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1401년 태종은 노비와 양인과의 결혼을 전면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노비는 노奴와 비婢의 결혼만으로 단순 재생될 뿐이라는 노비제 봉쇄정책을 폈다.
1418년 8월 세종의 시대가 열렸다. 1420년 9월 예조판서 허조許稠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이를 수리하지 말고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허조는 중국 당의 태종이 노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설령 그 내용이 반역에 관한 것이라도 이를 수리하지 않고 노를 참해버린 고사를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이 같은 허조의 주장에 세종은 동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