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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18년 03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44쪽 | 386g | 142*210*15mm
ISBN13 9791186061589
ISBN10 1186061588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머리말 - 004

1. 한국사 제1의 위인 - 015

2. 세종과 노비제
15~17세기 인구의 30~40%는 노비 _ 024
양반의 노비 규모 _ 026
입역立役과 납공納貢 _ 028
노비는 주인의 재물 _ 033
노비는 함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_ 036
노비 증식의 경로는 양천교혼良賤交婚 _ 039
노비제는 기자箕子의 법 _ 042
고려와 조선의 사회구성 _ 045
고려 노비의 처지는 그리
열악하지 않았다 _ 046
태종의 노비제 봉쇄정책 _ 050
세종, 노비의 권리를 박탈하다 _ 053
주자의 아름다운 말씀 _ 057
병길丙吉은 시신에 대해 묻지 않았다 _ 061
세종, 양천금혼의 빗장을 풀다 _ 062
충노忠奴 미담 _ 065
추노推奴 활극 _ 069
성군이라면 영조 _ 073
죽은 종을 위로하다 _ 076
『흥부전』의 세상 _ 079

3. 세종과 기생제
김치 종 _ 084
낙동강 푸른 물에 _ 087
슬픈 향복香卜 _ 089
직비直婢 _ 093
풍류비風流婢 _ 096
기생의 기원 _ 097
고려 기생의 신분 _ 101
비천卑賤 관념의 심화 _ 104
세종, 기생의 딸을 기생으로 삼다 _ 107
기녀를 두어 사졸士卒을 접대하라 _ 110
위안의 실태 _ 114
대를 이어 위안하다 _ 117
천산賤産과 천고賤姑 _ 119
기생 머리 올리기 _ 121
음녀淫女 속공屬公 _ 124
19세기의 기생제 _ 127
춘향의 꿈 _ 132

4. 세종과 사대주의
대몽골 울루스 _ 140
이씨 왕가의 내력 _ 142
최초의 세계지도 _ 145
기자箕子의 나라 _ 147
세종, 하늘에 대한 제사를 폐하다 _ 151
지성사대至誠事大 _ 156
사라진 부월斧鉞 _ 160
역월제易月制의 폐지 _ 163
도덕국가로의 순화 _ 169
백성에게 바른 한자음을
가르치다 _ 171
학계라 해도 집단연고의 무리 _ 175
최만리崔萬理의 반대 _ 178
소중화의 주체성 _ 180

5. 대한민국은 자유인의 공화국이다.
요약 _ 184
몇 가지 추가 _ 187
현대 한국사학의 문제점 _ 190
자유에 대한 상념 _ 194
그대는 자유인인가 _ 199
현대판 『소학小學』 _ 201
문명사의 대전환 _ 203
환상의 성립 _ 208

저자 소개 (1명)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환상의 나라」시리즈를 시작하면서
“환상의 나라,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아주 좋다, 멋지다, fantastic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 아니다. 허상이다, 착각이다, illusory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다.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데, 따져보니 근거가 없다,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거짓말로 판명된다, 그런 것이 내가 말하는 환상이다.
환상은 인간들을 큰 신뢰와 협동으로 이끌 수 없다. 환상이 빚은 역사와 현실의 간격은 정신과 육체의 분열을 야기한다. 환상은 그 자체로 반과학이다. 환상은 직시되어야 하며, 적절한 대안과 더불어 극복되어야 한다. 신생 대한민국의 지식인이 감당할 시대적 과제였다. 지난 70년의 건국사를 돌아볼 때 대학을 비롯한 지식사회가 그에 제대로 부응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식사회는 환상을 조장하는 역할에 골몰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나라는 갖가지 환상의 굴레에 심하게 옥죄인 가운데 숨쉬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안으로는 한 국민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이념의 대립이 심한 가운데 밖으로는 우방과 공연한 마찰을 일삼고 있다.
2016년 5월부터 3개월간 어느 인터넷 매체에서 ‘환상의 나라’라는 제목의 강의를 한 것은 그 같은 위기감에서였다. 모두 12개 주제였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컸던 순서로 몇 개를 나열하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나라는 누가 팔았는가’ ‘우리 민족, 그 불길함’ ‘위안소의 여인들’ ‘환상의 통일론’ 등이다. 지금의 이 책은 제1강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강의노트를 학술서로 평가받을 수 있는 분량과 형식으로 확장한 것이다. 나머지 강의에 대해서도 하나씩 같은 식으로 단행본을 출간할 계획이다.”

세종과 노비제
17세기 중엽 조선왕조의 인구는 대략 1,200만을 헤아렸다. 그중의 30~40%, 그러니까 360~480만의 인구가 노비 신분이었다. 노비가 그렇게나 많았던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김없는 사실이다. 1606년에 만들어진 경상도 산음현과 단성현의 호적이 전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랜 호적이다. 산음현 호적에서는 인구의 42%가 노비 신분이다. 단성현 호적에서는 64%이다. 1609년에 만들어진 울산부 호적이 있다. 거기서 노비의 인구 비중은 47%이다. 이상이 17세기 초라면, 17세기 말에는 1690년에 만들어진 대구부 호적이 있다. 거기서는 인구의 43%가 노비이다. 이처럼 17세기 경상도의 경우, 호적에 등록된 인구의 42~64%가 노비였다.
경상도 외의 호적으로서는 1663년에 만들어진 한성부 호적을 들 수 있다. 오늘날의 서울 아현동, 가좌동, 합정동 일대의 호적이다.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총 2,374명인데, 그 가운데 1,729명, 곧 73%가 노비이다.
당시 한성부의 인구는 대략 20만이었다. 그중의 절반은 4대문 안의 성내에서, 나머지 절반은 4대문 밖의 성저城底에서 살았다. 위 호적은 17세기 중엽 성저 인구의 근 4분의 3이 노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한성부, 곧 서울은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적 양반가문이 모여 사는 곳이다.
17세기 서울은 한 마디로 노비들이 바글바글하는 도시였다. 15, 16세기로 올라가면 전하는 호적이 없기 때문에 노비의 인구 비중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17세기보다 많았음은 거의 확실하다.『왕조실록』에 나오는 여러 정보를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15세기 말 총인구 900만 가운데 적어도 40%는 노비였다.
15~16세기 서울에 거주한 양반관료는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100명의 노비는 소유하였다. 관직이 높아지면 그 수가 더욱 많아져 수백 명쯤은 보통이었다. 현재 전하는 분재기分財記 가운데 노비를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은 정3품 관직의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이맹현李孟賢이란 사람인데, 총 758명에 달하였다. 그보다 품계가 높은 판서나 정승 급의 고관대작이면 1천 명을 넘기기 어렵지 않았다. 왕족으로 올라가면 아마도 수천 명이었을 것이다. 알려진 최대 규모는 세종의 제5왕자인 광평대군廣平大君과 제8왕자인 영응대군永膺大君이다. 『왕조실록』은 이 두 왕자의 노비가 각각 1만 명을 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왕조의 성립은 공동체사회에서 신분제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하였다. 조선왕조를 연 정치세력은 고려왕조의 전통을 이어 처음에는 노비인구의 확산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1401년 태종은 노비와 양인과의 결혼을 전면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노비는 노奴와 비婢의 결혼만으로 단순 재생될 뿐이라는 노비제 봉쇄정책을 폈다.
1418년 8월 세종의 시대가 열렸다. 1420년 9월 예조판서 허조許稠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이를 수리하지 말고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허조는 중국 당의 태종이 노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설령 그 내용이 반역에 관한 것이라도 이를 수리하지 않고 노를 참해버린 고사를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이 같은 허조의 주장에 세종은 동의하였다.
조선의 양반관료들은 노비의 주인 고소가 인륜의 명분에서 정당할 수도 있음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왕조실록』을 보면 노비의 고소를 일체 교형으로 다스리자는 신하들의 주장에 세종은 역시 순순히 동의하였다.
조선 노비제의 확립에 있어서 1422년의 노비고소금지법奴婢告訴禁止法 제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노예의 진정한 요건은 법 능력의 상실에 있다. 이를 가리켜 올란도 패터슨은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이라 하였다. 노예는 살아 있지만 실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불법 행위에 대해 맞설 권리가 없고 자신을 보호해줄 공동체를 상실한 상태가 노예의 본질이다.
조선왕조에 들어 노비 인구가 크게 팽창하게 된 데에는 세종의 역할이 컸다. 세종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박탈하였다. 이후 노비는 주인의 완전한 사유재산으로 변하였다. 노비를 함부로 죽여도 큰 죄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에 따라 노비 가격이 고려시대에 비해 5배나 뛰었다. 태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한편, 비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을 양인 신분으로 삼았다. 세종은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방임했으며, 노비와 양인 남자의 소생을 노비 신분으로 돌렸다. 세종은 노비를 정상의 인류로 간주하지 않았다. 세종은 자주 남편을 바꾼다는 편견에서 비의 정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종이 비의 소생을 모두 노비로 잡은 것에는 이 같은 노비관이 작용하였다. 이후 노비 인구가 부쩍 증가하는 가운데 한국사에서 노비제의 전성기가 열렸다.

세종과 기생제
1419년 세종 1년에 평안감사가 기생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건의하였다. 하나는 기생으로 인해 관리들의 풍기가 문란하니 관리의 기생 간음을 금하자는 것이다. 그는 한 기생을 여러 관리가 돌아가며 간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평안감사의 건의는 여러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에 의해 채택되었다.
다른 하나의 건의는 기생이 모자라니 확충하자는 것이다. 그에 대해 세종이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후 역사는 그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우선 각종 비로부터 기생을 보충하거나 그렇게 하자고 했으니 기생은 사실상 비와 동일한 신분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경국대전』은 교방의 기생은 정원이 230명이며 각 군현의 관비를 3년간 뽑아올려 충당한다고 규정하였다.
흔히들 기생을 춤추고 노래하고 성 접대를 하는 직업인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의 기생은 그러한 역을 국가로부터 강요받은 관비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원 기생의 딸을 기생으로 삼자고 했으니 기생은 그 신분을 세습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실제 세종 10년이면 고급 관료의 기첩이라도 그 자녀가 천역을 면치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1431년 1월이면 조선 기생제의 성립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조치가 내려졌다. 세종은 각 고을의 창기가 낳은 자식은 공사公私의 비가 남편을 자주 갈아치우는 예에 준하여 천인으로 삼자는 형조의 건의를 수락하였다. 여기서 기생의 딸을 기생으로, 기생의 아들을 관노로 삼는 신분세습의 율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뒤이어 1431년 11월 세종은 관비가 양인 남자와 낳은 자식도 부계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기생의 예에 준하여 모두 천인으로 돌리자는 건의에 찬성하였다.
1432년 3월 조선 노비제의 기틀을 놓은 종모법從母法의 성립은 1년 2개월 전 기생을 대상으로 한 종모법의 성립을 그 출발로 하였다. 따지고 보면 조선 기생제야말로 조선 노비제의 중핵을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정부와 지방관아에는 춤추고 노래하고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기생 신분의 여인들이 있었다. 기생의 신분은 딸에게 세습되었다. 특정 여인에게 성 접대의 역을 강요하고 세습시킨 다른 나라의 예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기생제는 세계사에서 한국사가 지닌 개성적 특질을 상징하고 있다. 그 기생제를 사실상 창출한 군왕이 다름아닌 세종이었다. 기생의 딸은 기생이라는 법은 세종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기생은 관비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이전 고려시대만 해도 기생은 관비가 아니었다. 나아가 세종은 국경지대의 고을에 군사를 접대할 기생을 설치하였다. 이후 전국의 각 군현에 수십 명씩의 기생이 배치되었다. 세종이 창출한 기생제는 20세기 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원류를 이루었다.

세종과 사대주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천제天祭는 천자의 고유한 예로서 제후는 이를 행할 수 없다는 주장이 신하들로부터 제기되었다. 태조와 태종은 그에 구애되지 않고 천제를 거행하였다. 1419년 세종 1년에 가뭄이 심하였다. 변계량이 원구단에서 천제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세종은 “참람한 예는 행함이 불가하다.”고 답하였다. 천제를 지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계량이 수천 년 동안 행해온 예를 폐함은 부당하며, 더구나 조선은 강토가 수천 리로써 중국 내의 백리 제후와 비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에 대해 세종은 “어찌 강토가 수천 리라 하여 천자의 예를 분수없이 행하리오.” 하면서 다시 거절하였다. 이에 변계량은 심한 가뭄을 맞아 제후가 하늘에 제사를 드림이 무슨 잘못인가라는 예의 임시변통론을 내세웠다. 이에 세종은 그 주장을 받아들여 천제를 거행하였다. 막 등극한 22세의 청년 세종은 나이 50세의 중신 변계량을 이길 수 없었다.
세종은 참을성 있게 그의 시대를 기다렸다. 그렇게 성격이 온유하고, 중신을 예우하고, 서둘지 않음이 세종의 훌륭한 인품이다. 그가 치세 당대에 신하들로부터 성군으로 칭송을 받은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천제는 제후가 행할 수 없는 참람한 예라는 세종의 소신은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실행을 보았다. 다음 해 1439년에 큰 가뭄이 들었다. 친히 원구단에 나가 천제를 거행하라는 상소가 있었지만 세종은 거절하였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왕조국가에 있어서 천제는 종묘와 함께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최고 수준의 의례였다. 천제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종묘는 조상신과의 관계에서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대변하였다. 1443년 천제가 최종 폐지됨으로써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제후국의 그것으로 충실히 정비되었다.
만국공법 이전의 전근대 세계에서 작고 약한 나라가 크고 강한 나라에 굴종하는 것은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고 백성을 평안케 하는 고육지책이다. 사대는 하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에게 정략적 관계이다. 하는 자는 속마음을 숨기고 받는 자는 상대를 의심한다. 조선 태종조까지의 사대가 그러하였다. 양국 간에는 군사적 긴장이 잠재하였다. 오고가는 사신은 상대국의 정치를 염탐하였다. 세종조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세종실록』을 읽으면 그 점을 확실히 느낀다. 한마디로 세종은 지성으로 사대하였다.
고려왕조는 군사국가였다. 그 점에서 도덕국가인 조선왕조와 달랐다. 고려는 3만여 명의 중앙군을 보유하였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고 그로부터 세를 걷어 살았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니 직업 군인으로서 전투력이 강하였다. 군사국가로서 고려는 전쟁에 장수를 파견하는 출정의出征儀라는 군례를 행하였다. 출정이 결정되면 우선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고 종묘에 이를 고한다. 이어서 대궐의 뜰에서 출정군의 원수에게 왕이 부월斧?을 내리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 같은 출정의는 천자의 예에 속한다. 부월은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였다. 부월을 받은 장수는 대궐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출정에 관한 모든 일을 처리할 권한을 갖는다. 군령을 어긴 휘하 장수와 사졸을 재량으로 처결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제후국도 출정의를 행했는데, 부월을 내리는 의식은 없었다. 제후에게는 내릴 만한 부월이 없었다. 부월이 없으니 출정군의 대장이 휘하 장수와 사졸을 처결하는 권한에도 제약이 있었다.
1419년 세종 1년에 이종무李從茂가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려 갈 때 세종은 한성부 두모포 백사장에서 이종무와 여러 장수를 전송하였을 뿐이다. 공식적인 군례는 없었다. 1433년 여진이 평안도 국경을 침범하여 최윤덕崔潤德이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되어 출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세종의 명에 따라 편찬된 오례五禮의 군례에서 출정의는 포함되지 않았다. 세종은 천자의 출정의는 고사하고, 제후의 출정의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군대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군사에 대한 세종의 자애는 엉뚱하게 조선왕조의 군대를 허물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가면서
조선왕조시대의 양반 신하 들이 세종을 성군으로 칭송한 사실은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다. 치세 30년간 이룩한 업적은 조선왕조 500여년의 기틀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까지 그를 성군으로 받들어야 하는가?
노비제와 기생제, 그리고 사대주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사실은 깡그리 생략하고, 21세기의 리더쉽을 세종에게서 찾으려는 환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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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조선 시대의 민낯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c****l | 2020.10.24 | 추천2 | 댓글0 리뷰제목
  몇 년 전에 『조선미시사(朝鮮微視史)』라는 강좌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국사책과 역사 다큐, 그리고 사극만으로 우리 역사를 알았던 저로서는 상당히 흥미진진한 부분이 많았던 역사 강좌였죠.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 뿐 아니라 여전히 호평받기 어려웠던 부분에 대한 재확인도 있었고, 학교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조선 시대 첩보전이나 무기 제조에 대한 내용도;
리뷰제목

  몇 년 전에 『조선미시사(朝鮮微視史)』라는 강좌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국사책과 역사 다큐, 그리고 사극만으로 우리 역사를 알았던 저로서는 상당히 흥미진진한 부분이 많았던 역사 강좌였죠.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 뿐 아니라 여전히 호평받기 어려웠던 부분에 대한 재확인도 있었고, 학교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조선 시대 첩보전이나 무기 제조에 대한 내용도 놀라웠구요. 그 강좌에서도 세종대왕과 조선시대를 다루기는 했는데, 조선이 그리 허술한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과 세종대왕의 인품이 강조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세종대왕과 우리 역사의 위대함에 대해 저 역시도 나름 국뽕에 어느 정도 취해 지내다가, 작년 조국 사태 이후로 역사를 보는 관점이 좀 달라졌습니다. 정치, 역사, 그리고 경제까지 생각이 여러 모로 바뀌었네요. 예전엔 그 세 가지가 각각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관심했는데, 지금 보니 그 셋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게 아니더군요. 그 전까지는 정치는 지루해서, 역사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서, 그리고 경제는 복잡해서 관련 서적까지 탐독해가며 들여다볼 분야는 아니라고 여겼던 걸 반성하는 중입니다. 정치는 곧 경제이고, 경제는 역사와도 멀리 떨어진 분야가 아니더라고요.

  이영훈 교수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는 그리 두꺼운 책도 아니고, 활자체도 그리 작지 않아서 분량도 많은 편은 아닙니다. 애초에 인터넷 매체에서 강의한 내용 중 한 강을 확장한 출간물이라 독파하는 데에 오래 걸리지도 않습니다. 책의 뒷부분에는 친절하게도 「찾아보기」까지 있어서 ‘앞에 나왔던 인물 or 사건’인 것 같은데...?‘싶으면 되짚어 보기도 편했네요.

  제목만 봐서는 ‘감히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인물 최고봉 세종대왕을 깎아내려?’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막상 읽어나가는 동안 제가 당연하다고 넘어갔던 사극의, 혹은 우리 전래 동화의 여러 부분들이 당연한 게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노비의 가격은 『경국대전』에서 저화 4천 장으로 정해졌다....(중략)...노비의 재산 가치는 666일의 임금에 해당하였다. 666일이 노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5~16세기의 연간 이자율은 대개 40% 수준이었다. 이에 노비 재산에서 발행하는 이자는 연간 266일의 임금과 같다. 원금과 이자를 합하면 도합 932일이다. 1년은 365일뿐이다. 이제 노비가 연중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도 원리금을 다 상환할 수 없다. 요컨대 노비 가격이 저화 4천 장이라 함은 조선의 노비는 원리적으로 해방이 불가능한 존재임을 의미하였다.                            (p.34)

 

  미국 흑인 노예 제도에 비해서는 나았다고 여겼던 노비 제도가 실상은 훨씬 처참했더군요. 게다가 고려 시대 노비의 재산 가치가 100~120일 임금에 해당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조선 시대 노비제의 상황이 얼마나 악화된 것인지도 알 수 있었구요.

  그리고, 그 옛날 『전설의 고향』이나 전래동화책에 나왔던 ‘개똥이, 마당쇠, 삼월이, 꽃분이’라는 이름들에 대해 막연하게 미신적인 작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순진한 믿음이었을 수도 있단 걸 알게 되었습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옛날에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하찮은 이름들을 붙인 게 아니라, 실은 그들을 동류의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붙였던 이름일 수 있단 걸요.

 

...노의 이름은 동물과 식물, 또는 물상에서 따온 것이 많았다. 동물의 경우를 열거하면 강아지, 도야지, 망아지, 송아지, 마당쇠, 두꺼비 등이다. 동물의 똥오줌에 비유한 경우도 많은데 소똥, 말똥, 개똥 등이다....(중략)... 비의 경우에는 삼월이나 구월처럼 태어난 달을 칭하거나, 역시 동물에 빙자하여 누른개 또는 암캐라 하든가, 얼굴이 예쁠 경우 꽃분이라 하였다....                          (p.36)

 

  저자는 세종대왕을 ‘저항이 드센 일에는 결코 무리를 하지 않는 온건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평합니다. 학술, 신분, 예제, 외교 방면에서는 큰 업적을 남겼다고도 하죠. 다만, 세종은 양반의 나라 조선 왕조의 성군이었으며, 지금 이 시대 -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존중되는 시대에도 추앙 받고 계승되어야할 지도자 상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집니다.

 

  요즘 유튜브 인구가 늘어나면서 국뽕 채널로 불리우는 영상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그걸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애국심의 바탕에는 어느 정도 국뽕도 들어있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게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 왜곡과 허상에서 기인한 거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동일한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과, 진실이 아닌 환상에 기인한 역사관을 갖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요.

  무결점의 영웅 신화보다는 불완전한 한 인간의 공(功)과 과(過)를 객관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가 자유지식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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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세종은 과연 성군이었을까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3점 s****y | 2020.04.10 | 추천3 | 댓글0 리뷰제목
우리에게는 유독 성역이 많다.그러나 학문과 역사에서 만큼은 성역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이다.우리 역사 최고의 성군이자 따라서 무한대의 성역으로 여겨졌던 세종대왕의 실제의 모습을 정면으로 다룬다.그동안 조선 4대 임금의 진솔한 모습을 그린 책들은 여러권 나왔었다.따라서 이 책의 내용이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러나 역사는 분명 해석의 영역이 있다.이;
리뷰제목
우리에게는 유독 성역이 많다.
그러나 학문과 역사에서 만큼은 성역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이다.

우리 역사 최고의 성군이자 따라서 무한대의 성역으로 여겨졌던 세종대왕의 실제의 모습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동안 조선 4대 임금의 진솔한 모습을 그린 책들은 여러권 나왔었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이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분명 해석의 영역이 있다.
이 책은 가장 도전적인 해석을 자유분방하게 내리고 있다.

크게 노비제, 기생제, 사대주의의 3대 측면에서 세종의 한계점을 적나라하게 분석하고 있다.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사대주의 측면이다.
세종의 명에 대한 사대 사상은 다소 병적인 측면까지 있었다.
백성의 고통으로 신하들이 만류했던 명 황제 진상품 사냥용 매 잡는 일을 멈추지 않는 모습에서 부모를 섬기듯하는 왕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p.158)

황제, 제후, 대부, 사, 양인, 천민으로 이어지는 고착된 신분제 아래서 제후의 역할에 그토록 충실하려 했던 임금의 모습은 충직한 신하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노비제도의 변화와 규모, 추이의 세밀한 분석을 통해 고려시대와 비교함으로써 조선시대 노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세종대왕이 기여했다는 연구 결과는 가장 큰 연구 성과이다.

훈민정음 창제과정 등은 좀 더 많은 학자들의 다양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세종은 신하들로부터 성군의 칭송을 끝없이 들었다.
이것이 오히려 백성들에게서 유리된 왕의 면모를 반증하는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역사를 기록하고 독점하는 양반 사대부들에게는 성군인 세종이 그들에게 억압밥고 고통당하는 민중에게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너무 멀고 높은 위치의 군왕은 아니었을까.

앞으로 세종 뿐만 아니라 역대 조선 왕에 대한 다양한 연구물과 많은 연구자틀이 나왔으면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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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d*******d | 2019.12.31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세종을 긍정적으로 보기만 하는 기존의 시각에 벗어나 새루운 관점에서 세종의 긍정적인 점에서만 벗어나서 세종 이후 사회적으로 미치는 면에 대해서 저자의 시각으로 저술한 책입니다 「환상의 나라」시리즈를 시작하면서“환상의 나라,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아주 좋다, 멋지다, fantastic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 아니다. 허상이다, 착각이다, illusory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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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을 긍정적으로 보기만 하는 기존의 시각에 벗어나 새루운 관점에서 세종의 긍정적인 점에서만 벗어나서 세종 이후 사회적으로 미치는 면에 대해서 저자의 시각으로 저술한 책입니다

 

「환상의 나라」시리즈를 시작하면서
“환상의 나라,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아주 좋다, 멋지다, fantastic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 아니다. 허상이다, 착각이다, illusory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다.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데, 따져보니 근거가 없다,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거짓말로 판명된다, 그런 것이 내가 말하는 환상이다.
환상은 인간들을 큰 신뢰와 협동으로 이끌 수 없다. 환상이 빚은 역사와 현실의 간격은 정신과 육체의 분열을 야기한다. 환상은 그 자체로 반과학이다. 환상은 직시되어야 하며, 적절한 대안과 더불어 극복되어야 한다. 신생 대한민국의 지식인이 감당할 시대적 과제였다. 지난 70년의 건국사를 돌아볼 때 대학을 비롯한 지식사회가 그에 제대로 부응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식사회는 환상을 조장하는 역할에 골몰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나라는 갖가지 환상의 굴레에 심하게 옥죄인 가운데 숨쉬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안으로는 한 국민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이념의 대립이 심한 가운데 밖으로는 우방과 공연한 마찰을 일삼고 있다.
2016년 5월부터 3개월간 어느 인터넷 매체에서 ‘환상의 나라’라는 제목의 강의를 한 것은 그 같은 위기감에서였다. 모두 12개 주제였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컸던 순서로 몇 개를 나열하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나라는 누가 팔았는가’ ‘우리 민족, 그 불길함’ ‘위안소의 여인들’ ‘환상의 통일론’ 등이다. 지금의 이 책은 제1강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강의노트를 학술서로 평가받을 수 있는 분량과 형식으로 확장한 것이다. 나머지 강의에 대해서도 하나씩 같은 식으로 단행본을 출간할 계획이다.”

세종과 노비제
17세기 중엽 조선왕조의 인구는 대략 1,200만을 헤아렸다. 그중의 30~40%, 그러니까 360~480만의 인구가 노비 신분이었다. 노비가 그렇게나 많았던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김없는 사실이다. 1606년에 만들어진 경상도 산음현과 단성현의 호적이 전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랜 호적이다. 산음현 호적에서는 인구의 42%가 노비 신분이다. 단성현 호적에서는 64%이다. 1609년에 만들어진 울산부 호적이 있다. 거기서 노비의 인구 비중은 47%이다. 이상이 17세기 초라면, 17세기 말에는 1690년에 만들어진 대구부 호적이 있다. 거기서는 인구의 43%가 노비이다. 이처럼 17세기 경상도의 경우, 호적에 등록된 인구의 42~64%가 노비였다.
경상도 외의 호적으로서는 1663년에 만들어진 한성부 호적을 들 수 있다. 오늘날의 서울 아현동, 가좌동, 합정동 일대의 호적이다.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총 2,374명인데, 그 가운데 1,729명, 곧 73%가 노비이다.
당시 한성부의 인구는 대략 20만이었다. 그중의 절반은 4대문 안의 성내에서, 나머지 절반은 4대문 밖의 성저城底에서 살았다. 위 호적은 17세기 중엽 성저 인구의 근 4분의 3이 노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한성부, 곧 서울은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적 양반가문이 모여 사는 곳이다.
17세기 서울은 한 마디로 노비들이 바글바글하는 도시였다. 15, 16세기로 올라가면 전하는 호적이 없기 때문에 노비의 인구 비중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17세기보다 많았음은 거의 확실하다.『왕조실록』에 나오는 여러 정보를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15세기 말 총인구 900만 가운데 적어도 40%는 노비였다.
15~16세기 서울에 거주한 양반관료는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100명의 노비는 소유하였다. 관직이 높아지면 그 수가 더욱 많아져 수백 명쯤은 보통이었다. 현재 전하는 분재기分財記 가운데 노비를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은 정3품 관직의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이맹현李孟賢이란 사람인데, 총 758명에 달하였다. 그보다 품계가 높은 판서나 정승 급의 고관대작이면 1천 명을 넘기기 어렵지 않았다. 왕족으로 올라가면 아마도 수천 명이었을 것이다. 알려진 최대 규모는 세종의 제5왕자인 광평대군廣平大君과 제8왕자인 영응대군永膺大君이다. 『왕조실록』은 이 두 왕자의 노비가 각각 1만 명을 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왕조의 성립은 공동체사회에서 신분제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하였다. 조선왕조를 연 정치세력은 고려왕조의 전통을 이어 처음에는 노비인구의 확산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1401년 태종은 노비와 양인과의 결혼을 전면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노비는 노奴와 비婢의 결혼만으로 단순 재생될 뿐이라는 노비제 봉쇄정책을 폈다.
1418년 8월 세종의 시대가 열렸다. 1420년 9월 예조판서 허조許稠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이를 수리하지 말고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허조는 중국 당의 태종이 노가 주인을 고소할 경우 설령 그 내용이 반역에 관한 것이라도 이를 수리하지 않고 노를 참해버린 고사를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이 같은 허조의 주장에 세종은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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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37건) 한줄평 총점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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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평점5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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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플래티넘 w***n | 2022.05.04
구매 평점5점
진실이 알려져 국민들이 환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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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로얄 e******s | 2022.01.24
평점1점
ㅋㅋㅋ 낚이지마세요 그냥 매국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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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플래티넘 ㅁ* | 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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