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칫솔, 단추, 사다리, 만년필, 텀블러, 콘센트……
67가지 익숙한 일상 사물들을
힙하고 낯설게 사유하는 생각 훈련
저자는 3년 전 출간한 『사물의 철학』이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67가지 새로운 사물들을 다룬 이 책에서 사색의 깊이와 밀착성이 더 심화되었다고 느낀다면, 그건 그동안 사람들과 나눈 경험과 고민의 진폭이 고스란히 더해졌기 때문 아닐까. 마치 평범한 사물에서 빛나는 비유를 창조하는 시인처럼 그리고 익숙한 것에서 낯선 질문을 발견하는 철학자처럼, 저자는 문학과 철학의 테두리 안으로 우리를 유쾌하게 초대한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서로 다른 사물이 결합되어 있는 ‘만년필’의 뾰족한 펜촉에서 저자는 한비자가 말한 ‘양립할 수 없는 논리의 비공존성’과 마크 트웨인이 말한 ‘찌르는 웃음’으로서의 위트를 읽는다. 간단한 손 조작만으로 인간 시야의 한계를 비약적으로 넓혀주는 사물인 ‘드론(drone)’을 통해 소설창작론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인간 윤리의 불일치에서 비롯될 미래의 묵시록을 경고한다. 요즘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구루프’(헤어롤의 일종)를 머리에 달고 다니는 현상에 대해서는 ‘구루프는 억압에 대한 발랄한 도전이자 뻔뻔함의 현상학과 관련된 사물’이라며 프로이트의 이론과 연결짓는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일찍이 저자의 이런 시도에 대해 “사물 하나하나를 다시 사용하면서 세계를 근원적으로 경험해보려는 과감하고 예리한 사유”라고 평했던 것처럼, 저자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사물들에 겹겹이 싸인 의미의 층들을 때로는 미시적으로 헤집고 때로는 외연적으로 확장한다. 걸그룹과 여름 거리의 ‘핫팬츠’가 해방감, 주체성, 관음증, 물신성, 불황의 경제학이라는 측면에서 숙고되는가 하면, 어느덧 일상에서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 된 ‘에코백’은 유행을 넘어 도덕적·정치적 무의식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호’로 해석된다.
사물은 미디어다!
일상 사물에 대한 은밀하고 발칙한 체험
처음에는 도구로 탄생한 사물이 어떻게 도구 아닌 것, 또는 도구 이상의 것이 되는지를 이 책은 흥미롭게 보여준다. 스마트폰이 현대인의 생활 프레임 자체가 된 지금 ‘콘센트’라는 사물은 단순한 장치를 넘어 ‘도시인의 산소호흡기’로 진화했다. ‘텀블러’는 낯선 명칭을 통해 사물의 물성과 분리됨으로써 단순한 도구-생필품이 아니라 ‘기호’가 된다. 노년의 상징이었던 ‘지팡이’는 등산 붐이 불면서 단순히 몸을 의지하는 기구가 아니라 ‘등산 스틱’이라는 하나의 기호품으로 거듭나고 개인의 삶을 능동적이고 유쾌하게 영위하게 하는 ‘미디어’가 된다. 이렇듯 사물-미디어는 사용자의 감각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한 존재에 대한 인상과 관념을 간단히 바꾸는 힘을 가지기도 한다.
하나의 사물은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의 시간과 국가의 체제를 개념화하는 정서로 각인되기도 한다.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노란 리본’은 한국인의 가슴에서 매해 반복적으로 회귀하는 봄을 표상하며 한국 사회가 가진 온갖 모순과 비극이 응집된 큐브로 작동한다. ‘아파트’라는 사물은 도시에 다른 기하학을 허용하지 않고 팽창하기만 한다는 점에서 ‘사각형 제국주의’를 표방한 진정한 건축무한육면각체고, 그런 점에서 지금의 서울은 육면체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레고블록이라고 저자는 일갈한다. ‘인형뽑기 기계’는 현실적인 기대심리가 별로 없는 행위, 또한 뽑는다는 것 자체에 몰입하므로 오락이라 하기도 어색한 행위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허무주의’를 읽을 수 있는 충동의 사물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추구했던 것은 공동의 상식적 시각이 아닌, 오히려 그것에서 벗어나거나 넘어선 시각이었다. 표면의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보아뱀 속의 코끼리를 보는 너머의 눈, 존재의 깊이에 닿는 사색을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자는 호소인 것이다. 사물에 대한 이 은밀한 성찰이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의 씨앗을 뿌리고 삶의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