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이 있는 여행은 우리를 서서히 바꾼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질문의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의도와는 다르게, 또 어떤 때는 정반대로 진행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니체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니체에 관한 책을 덮고 그가 걸은 길을 걸으면서 그를 경험하는 것이 더 나은 것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길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니체를 발견할 수 있다.
---「에필로그」중에서
그런데 우리가 니체를 찾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놓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살고 있으면서도 진정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을 때 니체는 우리에게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프롤로그」중에서
니체는 짧은, 너무나 짧은 삶의 순간에 영원의 낙인을 찍고자 했다.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을 위한 긴 여행, 그것이 니체의 유목민적 방랑의 길이다. 그 길의 시작과 끝에는 고통을 당하는 ‘나’와 고통을 통해 본래의 자기를 찾고자 하는 ‘나’가 있다. 우리는 그 여정에서 우리가 무한히 반복되는 수많은 존재 중 하나라는 비극적인 인식을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축복일까 아니면 비극일까?
---「1장: 결단하는 낙타는 사자가 된다」중에서
만년설로 호수는 더욱더 어두워진다. 어찌 보면 하늘과 맞닿아 있는 하얀색 높은 산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연둣빛 초원으로 잠시 변했다가 검푸른 호수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호수의 기운이 알 수 없는 검은 미로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다. 산에 오르지 않으면 이 절묘한 색의 조화를 어떻게 보고 느낄 수 있겠는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대립과 조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충돌하고 조화를 이루는 알프스를 실제 체험하지 않고서는 니체의 철학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장: 희극이 되어버린 비극」중에서
니체는 산에서 바다로 간다,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금방 떠나진 않았지만 늘 가슴에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불현듯 떠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여행도 사실은 오랜 기간 가슴속에서 숙성을 거친 것이다.
---「3장: 음험한 바다와 냉혹한 고산」중에서
세상에는 준비하지 않고 우연히 찾아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있다. 30년 전 베네치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모든 것을 철두철미하게 계획했었다. 어느 곳을 들르고, 어디에서 식사를 하고, 언제 쉴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짜놓은 치밀한 일정표. 베네치아에 서 받은 인상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목적과는 달리 나의 기억에 남은 것은 미리 공부한 것뿐이었다. 이번엔 아무 준비 없이 베네치아에 와 있다. 숨 막히는 무더위가 현기증을 일으킨다. 이미지의 현기증. 베네치아는 갑자기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오고, 수많은 변신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다.
---「4장: 선악의 저편에서 다채로운 정적을 듣다」중에서
우리는 이제껏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찾았던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탐색하다 보면 결국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유 자체, 아름다움 자체, 풍요로움 자체를 위해 여행을 떠나지만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4장: 선악의 저편에서 다채로운 정적을 듣다」중에서
니체는 고뇌하는 사람에게는 염세주의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딱 부러지게 말한다. 염세주의에 빠져 이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어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삶에 대해 더 이상 고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뇌하는 사람에게 너무 염세적이 되지 말라는 것은 쓸데없는 말이다. 삶의 의미를 철저하게 탐색하기 위해서 필요한 고뇌의 공간은 어디일까. 삶에 낯설고 적대적이기까지 한 환경을 겪지 않고서는 우리는 삶의 저 심오한 밑바닥을 인식할 수 없다.
---「5장: 허무주의의 탄생」중에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감을 받았다는 수를레이 바위가 산책로가 끝나는 곳 어딘가에 있다고 하니 주위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30분 정도 걸었는데도 커다란 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사상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영원회귀 사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호숫가의 벤치에 앉아 니체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깊이 명상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런 생각도 수를레이 바위에 대한 호기심을 잠재우지는 못한다. 영원회귀 사상의 단초를 제공한 바위라면 어딘가 대단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6장: 영원회귀의 통찰」중에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면 우선 자신에게서 가장 경멸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물을 줄 알아야 한다. “경멸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멸스럽기 짝이 없다”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다. 자신을 경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꿈과 동경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가슴에 반짝이는 별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새로운 삶과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사랑, 창조, 동경, 별이라는 낱말들이 낯설게 들린다면, 그 사람은 마지막 인간임에 틀림없다. 아무런 목표 없이 그날그날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7장: 파도로 나아가는 광대」중에서
사상에도 높은 산과 깊은 심연이 있는 것일까. 그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 걸친 위험한 줄을 탄다. 니체는 스스로 다짐한다. 결코 주위를 돌아보지 말라! 그것이 최선의 용기다. 너의 뒤에는 어떤 길도 보이지 않는다. 그 어느 누구도 너의 뒤를 따라올 수 없다. 발을 내디디기만 하면 길은 곧바로 지워지니까..---「8장: 두 발로 하는 사유」중에서
니체가 산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영감을 얻고 바닷가에서 그것을 완성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현대인은 기존의 선악관이 지배하는 육지에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넓은 바다를 무서워한다. 새롭고 낯선 가치를 혐오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선악의 저편으로 넘어가려면 우리의 육지를 떠나야 한다.---「9장: 미래 철학의 향유」중에서
니체가 바라보고 있는 대양이 여전히 짙은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우리가 본래의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니체와 함께 떠난 길에서 어떤 자기를 찾았는지 역시 모를 일이다. 우리는 이 길에서 자신만의 니체를 발견하고, 자신이 발견한 니체와 함께 고유한 자기를 발견한다. 어떻게 사람은 본래의 자기가 되는가? 이 물음은 본래의 자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니체가 말한 것처럼 나에게 가장 먼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자기 발견의 길을 떠나지 못한다.
---「12장: 전복의 망치가 남긴 상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