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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개정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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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저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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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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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8년 04월 16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44쪽 | 432g | 128*188*30mm
ISBN10 1162203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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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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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 안 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한다는 핑계도 대지 않아. 개개인의 정의 실현이라면 그거야말로 웃다 숨넘어갈 소리지. 하지만 말이다. 쥐나 벌레를 잡아주는 대가로 모은 돈을, 나중에 내가 쥐나 벌레만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런대로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그렇게 말했던 사람과, 함께 밥상을 나누고 머리카락에 싸락눈이 내려앉는 평범한 일을, 그녀는 잠시나마 그려본 적이 있었다. 상대방이 코웃음 칠까 입 밖으로 내보지 못한 소박한 풍경을, 바라선 안 되는 나날을. --- p.34

그녀는 자신이 무용을 데려와 이름을 지어줬던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누구나 선뜻 내켜 데려가고 싶어 할 만큼 작거나 귀엽지 않았다는 기억만은 남아 있다. 아니, 기억보다는 지금의 외모로 보아 그때라고 썩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소급에서 비롯된 사고로, 어쩌면 아무도 데려갈 것처럼 생기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집어왔을 것인데, 당시 정황의 세부를 되살리지는 못하나 자신이 살아 있는 걸 주워왔다는 데 대한 당혹감, 살아 있는 것에 마음이 움직여 충동만으로 예정에 없던 행동을 한 데 대한 낭패감만은 선명하다.
집 안에 자신 말고도 살아 있는 누군가가 존재해서 그것에게 인사를 하게 될 줄은, 집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또는 집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할까 봐 초조해질 줄은, 자기 인생에서 그런 날이 다시 올 줄은, 무용을 데려오기 전에는 몰랐다. --- p.138~140

무언가를 하기로 생각하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가벼운 인사일지라도,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요즘 같아서는 더욱 그렇다. 돌아서면 곧바로 자기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잊고 마는 일상이니까. 그녀는 무용의 머리를 서너 번 쓸어내리며 한 음절씩 확고하게 말한다.
“다녀, 온다.”
숨이 붙어 있는 한은 다녀-올 것이다. 손발이 움직이는 한은, 언젠가 이 녀석이 기억에서 지워지거나 그 존재를 인식조차 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그녀는 현관문을 닫는다. --- p.168~169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집에 와서 그녀는 꼭 한 개를 먹었을 뿐이고, 그 뒤로 잊어버린 모양이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 p.225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 p.264~265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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