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하며 가장 자주 떠올린 단어는 ‘무지’였다.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하는 과정은 모든 게 새로웠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단어에 익숙해지고 그 뜻을 배워야 했던 면도 있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사람은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그 고정관념을 나는 오랫동안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로서 쓴 수많은 논문에서 성별이라는 변수는 남과 여로 고정된 것이었으니까. 트랜스젠더의 목소리에는, 내게는 더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어떤 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누군가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었다. 은행에서 신원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보일 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나는 짐작조차 못했다.
--- p.19
“한국에 청소년 트랜스젠더가 있어요?” 2013년, 청소년 트랜스젠더 생애사 연구를 할 때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는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낯설게 느끼고, ‘청소년기에도 성전환 수술을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도 어느 날 갑자기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성전환 수술과 같은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고, 자신이 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로 사회적 삶을 살게 되기까지는 긴 고민과 협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 p.54
“자고 일어나면 그냥 막연하게 여자가 되어 있겠지, 그런 생각, 그게 굉장히 어릴 때부터 있었거든요. (중략)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하리수가 처음 나온 거죠. 그때 엄청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현실을 딱 보게 된 거죠. 그 전에는 막연하게 이번 열두 번째 생일에는 내가 몸이 제대로 돌아갈 거야, 하느님이 와서 미안하다고 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다가, 저 같은 사람이 실제로 있는 거구나, 이게 현실이 맞구나, 그런 생각을 한 거죠.”(트랜스여성 F)
--- p.59
돈을 모아 의료적 조치를 받고, 법적 성별을 정정할 때까지 긴 시간을 보낼 자신의 “청춘이 아깝지 않냐”는 한 연구 참여자의 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는 성별정정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자신의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며 그 “청춘”의 시간을 벌써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제 청춘이 아깝지 않아요?”라는 청소년 트랜스젠더의 질문에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떤 답을 가지고 있을까?
--- p.70
전체 응답자 중 80%에 달하는 트랜스젠더는 가족에게 필요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를 가족들과 이야기할 수 없다고 밝혔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트랜스젠더는 법적으로 성별을 정정하려면 부모 동의서가 필요하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할 때, 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은 트랜스젠더의 삶에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한다.
--- p.75~76
법적 성별을 정정하기 이전이라면 트랜스젠더의 주민등록번호는 이들이 직업을 구하는 과정에서 장벽으로 작용한다. 젠더퀴어 K는 본인의 주민등록번호와 자신의 외양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하는 분위기”를 해치기 때문에 “출근하지 말라”고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적이 있었다. 트랜스남성 O 역시 주민등록번호로 인해 구직하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이에 대한 차선책으로, “경마장” 같이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지 않는 곳에서 일하기도 한다.
--- p.85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 트랜스젠더가 의료적 트랜지션을 받을 때 마주하는 가장 큰 어려움이 경제적인 부담임을 보여 준다. 총 143명의 응답자 중 51명(35.7%)이 경제적인 이유로 호르몬 투여를 하지 않고 있거나 중단한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173명 중 105명(60.7%)이 같은 이유로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 p.116
한국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트랜스젠더가 살고 있을까? 아직까지 한국에서 국가 단위의 설문조사를 통해 트랜스젠더 인구 규모를 파악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해외 연구에서 제시한 트랜스젠더 인구 추정치를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2017년 미국에서 진행된 한 연구에서는 트랜스젠더의 규모를 인구 10만 명당 390명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트랜스젠더 인구 규모를 추정하려는 여러 연구가 있었지만, 이 연구들이 대표성 문제나 표집방법 등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데 비해 2017년의 연구는 이를 보완한 결과다. 인구 10만 명당 390명이라는 숫자를 한국 사회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이를 2017년 7월 1일 기준, 한국 인구 5,144만 6,201명에 적용하면 한국 트랜스젠더의 인구 규모는 20만 640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 p.126~127
이들은 피임약처럼 호르몬 성분을 포함하고 있지만, 처방전 없이 구매 가능한 약물을 사용하거나 국내외 온라인 판매자 또는 지인을 통해 호르몬제를 사고 있었다. 호르몬 요법은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용량을 조절해야 하고, 정기적인 검진 또한 중요하다. 특히 호르몬을 의사의 처방 없이 임의로 복용할 경우, 혈전색전증이나 간 수치 상승 등 내과적 부작용이 발생했을 때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 있다.
--- p.144
미국은 의료보장체계가 메디케어(Medicare)나 메디케이드(Medicaid) 같은 공공영역의 의료보장제도와 민간회사가 운영하는 민간의료보험으로 나뉘어 있다. 65세 이상의 노인을 지원하는 연방정부의 의료보장제도인 메디케어는 호르몬 요법과 성전환 수술을 포함하고 있으며,[17, 18] 65세 이하 저소득층과 장애인에 대한 의료보장제도인 메디케이드는 주 정부별로 운영해 지역에 따라 의료적 트랜지션의 보장 여부가 다르다.[17] 미국에서 대부분의 민간보험은 명시적으로 의료적 트랜지션을 보장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으나 보험사에 따라 보장하는 경우가 있다.
--- p.163
“한번은 60세가 넘은 MtF 트랜스젠더 분께서 찾아와 호르몬 치료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 나이에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초기 용량을 얼마로 시작해야 하는지, 투약 주기는 얼마나 자주 할지, 또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알려진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을 설득하려고 했다. 대개 트랜스젠더의 경우 60대는 호르몬 치료를 다 끝내는 시기이고 갱년기가 지난 시점이라, 여성 호르몬 치료를 하는 게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그분 말씀이 이랬다. 젊었을 때는 호르몬 치료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나중에 호르몬 치료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이미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어서 할 수 없었다고. 이제는 아이들도 시집 장가 다 보냈고 아내와는 이혼했다고 하면서, 죽을 때 죽더라도 여자 몸으로 죽고 싶다고 했다. 순간 너무 울컥했다. 그래서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떤 의사도 권장하지 않을 60대 노인에게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고 말았다. 시작은 했는데, 언제 끝을 내야 하는지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계속 고민 중이다.”
--- p.184~185
“자궁절제가 왜 성별정정에 필요한가? 재생산의 권리는 기본적 권리고, 임신을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본인이 자궁·난소가 있는 몸이 싫고 그에 대한 위화감을 가지고 있어서 제거하고 싶다면 그건 선택의 문제다. 호르몬 치료를 통해 내 몸을 바꾸고 지향하는 성별정체성을 확립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호르몬 치료나 자궁·가슴절제 수술을 선택할 수 있다. 본인이 인식하는 성별정체성의 신체를 갖기 위해 수술을 하는 건 본인의 선택 문제니까. 그런데 그걸 다른 사람이 강요할 문제는 전혀 아니다.”
---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