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기본소득을 논의하지 않는 독일
4차 산업혁명을 둘러싼 논의가 뜨겁다. 4차 산업혁명을 위한 기술과 동력을 마련하는 문제부터 규제 개혁, 기본소득에 이르기까지 여러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정작 국민이 우려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는 미진하다. 국민의 가장 큰 걱정은 지능화, 자동화로 일자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 청년 실업과 고용 불안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에 대한 불안이 높다. 그러나 노동의 미래는 공론화되지 않고 있다. 그에 비해 기본소득 문제는 논의가 꽤 활발하다.
2017년 4월 초 한국노동연구원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ES 한국 사무소가 공동 주최한 ‘노동 4.01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독일 노동조합 간부들과 대학 교수들이 많은 주제를 발표했다. 발표 후 청중 하나가 독일에서는 기본소득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다. 독일에서 온 한 교수는 독일 노동계와 학계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다. 독일 기업 최고경영자 모임에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독일 노조는 기업들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의심하며 논의조차 반대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 교수의 답변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기본적으로 노동은 신성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기 때문에 노동 없는 사회는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 노조도 자동화로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한다. 대책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일자리를 잃게 될 노동자에게 제공하는 전직 훈련이다. 두 번째로는 새롭게 생기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학교 같은 곳에서 키워 주는 것이다. 노동 시간 단축도 병행돼야 한다. 그래도 일자리가 부족하고 실업자가 생긴다면 기본소득이 필요할 수 있다고 본다.”
독일에서 기본소득 정책은 맨 나중에야 검토할 수 있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2016년 국민 소득이 1인당 9만 달러로 고소득 사회 복지 국가인 스위스에서도 월 300만 원의 기본소득 지급 여부를 두고 진행된 국민 투표가 부결되긴 했지만, 노사정 협력이 잘되는 사회 민주주의 국가인 독일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조차 없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국제적 흐름에 비춰 볼 때 우리 사회는 순서가 바뀐 논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발표자는 독일 노조가 2000년대 초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oder 전 총리의 노동 개혁에 반대해 어려움에 부닥쳤던 일화를 언급했다. 당시도 자동화로 일자리가 감소하는 시대였는데 개혁에 대한 노조의 저항이 실패한 경험이 있는 터라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변화에는 다르게 대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노동자들도 시대의 큰 흐름을 따르며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노사가 서로 발전할 수 있는 질 좋은 노동을 추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독일 정부가 추진한 인더스트리 4.0Industrie 4.02에 기원을 둔다. 독일은 저출생·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와 제조 경쟁력을 위협하는 미국 주도의 디지털화에 대응해 몇 년간의 논의와 준비를 거쳐 전 국가적 전략으로 인더스트리 4.0을 추진하고 있다. 고도의 자동화에 대응한 인더스트리 4.0이라는 사회적 논의의 결과가 바로 노동 4.0이다. 다시 말해 인더스트리 4.0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노동 4.0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 독일은 양질의 노동, 디지털 시대의 전문 인력, 새로운 일자리를 위한 교육 등 인더스트리 4.0의 성공을 위한 한 축으로서 노동의 역할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논의의 결과를 2017년 초 《노동 4.0 백서Weissbuch Arbeiten 4.0》로 발간했다.
백서는 디지털화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높은 노동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생산 이익의 분배, 플랫폼형 대기업의 이윤에 대한 세금 부과 문제, 공공재와 서비스의 현대적 인프라 구축 등 거시 경제 차원의 틀을 만들고, 그에 따라 노동 정책을 짜는 방안을 제시한다. 노동 정책과 사회 정책을 긴밀히 연결해 독일이 달성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는 ‘국민 100퍼센트의 노동’이다.
《노동 4.0 백서》는 독일 사용자와 노동자,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2년에 걸쳐 대화하고 연구한 결과물이다. 직업 세계, 노동 시장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결과를 축약해 다루고 있다. 물론 독일 노동 4.0의 논의 배경과 상황은 한국과 다르다. 그러나 오늘날 정상으로 간주하는 현상이 더는 정상이 아닐 미래에 대한 전망과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사회와 경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노동의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 정부는 시민과의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미래Futurale]라는 제목의 영화 시리즈를 독일 전역 18개 도시의 극장에서 상영했다. 이때 시민들에게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화되는 사회 변동 속에서 ‘좋은 노동’이라는 이상은 어떻게 유지되고 강화될 수 있을까?”
우리도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는 독일의 방식을 배울 필요가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준비는 디지털 시대의 산업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컨센서스를 마련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노동 정책과 사회 정책을 긴밀히 연결해 독일이 달성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는 ‘국민 100퍼센트의 노동’이다. --- p.10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준비는 디지털 시대의 산업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컨센서스를 마련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p.11
디지털을 제대로 알아야 4차 산업혁명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p.15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가상 물리 시스템(CPS·Cyber Physical System)이다.--- p.18
인더스트리 4.0의 궁극적인 목표는 IT를 접목한 전 국가의 스마트 공장화smart factory다.--- p.21
디지털화는 백서의 핵심 주제다. 그러나 디지털화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p.24
디지털화는 세 가지 분야에서 급격한 발전과 상호 작용을 통해 진화한다. 첫째, IT와 소프트웨어다. 둘째, 로봇과 센서다. 셋째, 네트워크 시스템의 발전이다.--- p.30
경제, 사회의 변화는 생활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달라진 생활 방식과 가치관은 미래 노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p.36
디지털 상거래 플랫폼, 우버와 에어비엔비 같은 중개 플랫폼을 거쳐 IT를 기반으로 개별 노동자들을 연결시켜 주는 중개 플랫폼인 크라우드 워킹crowd work 플랫폼이 등장하고 있다.--- p.43
자원의 공유와 공동 이용이 확산되면 소유의 의미가 사라지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다. 혁신적 생산 수단은 더 이상 대기업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다.--- p.44
근로 시간과 장소의 유연화는 노동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강화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일과 삶의 양립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p.46
한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이 모두 적정한 보수를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p.48
전일제와 파트타임제, 취업과 가정생활에 의한 경력 단절, 고용 노동과 자영업을 나누는 경계선이 흐려지고 있다. ‘무정형無定形 노동’이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다.--- p.53
사회적 협력, 소통, 다문화 이해, 창의적 사고 및 추상적 사고, 신속한 정보 처리 및 정보 선별 능력과 디지털 문해력은 노동 시장에서의 성공을 위해 필수적이다.--- p.56
공유 경제, 협업 공유재collaborative commons 방식인 협동조합은 중앙 집권적 플랫폼의 대안이 될 수 있다.--- p.59
노동 자체가 건강과 평안, 노동자의 역량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인간적인 노동의 의미다.--- p.60
노동 시간, 노동 공간의 유연성이 커지는 디지털화의 특성을 고려할 때 노동자들이 일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심신의 건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p.61
산업이 디지털과 접목된 구조적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디지털의 특성을 재고하고 산업과 노동을 재창조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p.73
디지털 시대에는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유연한 조직이 승리할 것이다.--- p.74
혁신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혁신적인 시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파격적 지원이 필요하다.--- p.78
디지털 기반의 생산 체계는 분리(분업)에서 통합(융합)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p.85
사회가 전체성보다 다양성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도시 공동체가 강화돼야 한다.--- p.90
네 가지 미래 원형은 지속 성장의 미래growth, 쇠퇴의 미래collapse, 자제의 미래disciplined, 변혁의 미래transformation를 의미한다.--- p.92
한국 노동의 미래에 대한 전략은 우리의 생태계에 맞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 이제는 우리의 시각에서 본격적 논의가 필요하다.
--- 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