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학문이란 단순한 사실의 진술이나 묘사 혹은 이에 대한 분석과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에게 천체의 움직임이나 물이 흘러가는 속도 그리고 나무와 곤충이 자라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 그리고 국가의 법과 통치, 물건의 가격과 판매와 같은 경제현상들을 추적하고 원리를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학문이 해야만 할 고유의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기억과 재현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은 자연과 인간사 속에서 선과 사랑 그리고 정의와 아름다움을 소망하고 갈구 하는 이성적 행위 그 자체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성적 행위를 통하여 무너져 내린 국가의 정의를 다시 세우고, 전쟁 속에서 선과 사랑을 지켜내며, 노예가 되었던 이들의 자유와 아름다움을 위해 분투하는 능력, 즉 학문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이 학문을 하는 이유는 비록 세계가 불완전할 지라도 우리에게는 완전한 선의 왕국을 향하여, 완전한 사랑의 왕국을 향하여, 영원한 진리의 왕국을 향하여 나아가야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명은 선험적인 것이고, 주어진 것이며, 신적인 것이기에 학문은 우리를 초월의 세계로 이끈다. 초월적 세계의 향유. 이것이 바로 학문이다. 이러한 학문의 사명을 지켜 나갈 때 인간은 독재자로부터 해방 되고, 빈곤이라는 악마와 싸울 수 있으며, 공동체를 치유 할 수 있고 심지어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
반면 유사학문이란 선함도, 정의도, 아름다움도, 진정한 자유도 없는 지식 체계이다. 이러한 지식 체계는 악마적이며 파괴적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유사학문의 악마적 속성을 경험해 왔다. 남영동 대공 분실을 설계한 건축가, 캄보디아 크메르 대학살을 위하여 고문 기계를 만든 엔지니어, 르완다 인종학살의 명분을 제시한 사회학자와 인류학자, 수백의 자이르 부족을 와해시키고 수백만을 노예로 잡아간 벨기에의 행정 전문가들, 남미 유아들의 영양실조를 막고자 실시한 급식 프로그램을 효율성을 이유로 집요히 훼방하여 끝내 철회 시키고만 경영학자. 이들은 뛰어난 능력으로 지식을 축적 하였으나, 이들의 지식은 악마적 유사학문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사랑과 정의를 파괴하고 자유를 구속하였으며 인간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무너뜨리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의 지식은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꿈꾸어야 할지에 대한 지표를 상실케 하였다.
따라서 참된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유사학문으로의 유혹에 대한 투쟁이 수반되어야 한다. 학문은 사랑이 없는 엄밀성에 대한 저항이며, 소망이 없는 객관성에 대한 투쟁이고, 아름다움이 없는 지식의 축적에 대한 항거이다. 다른 한편, 학문은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 되기 위한 존재론적 싸움이다. 인간다움의 아름다움과 인간다움의 선함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학문은 요구되기 때문이다.
개발학은 일차적으로는 삶의 끝자리에 서있는 모든 이들의 몸부림을 기록하고 분석하지만 더욱 궁극적으로는 이들이 만들어 나아가야할 소망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빈곤으로 인한 고통은 사라져야만 하고, 몇몇의 행복이 아닌 억압받는 이들을 보호하는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말씀을 선포하는 학문이다. 콩고 민주 공화국의 소년병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우칠 수 있도록 도우며, 남수단 지뢰 피해자들이 부족 간 갈등을 넘어 내전을 치유하는데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로힝야 부족을 차별하고 쫓아내는 어떠한 법과 제도도 거짓임을 밝히는 학문이 개발학이다. 전체 지구 인구의 1/3이 교육, 의료 보건, 수자원에 대한 적절한 접근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1/6은 매일 먹을 식량을 걱정해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며 보건소에 약품을 조달 할 수 있도록 하고 시골 마을 농장에서 카사바와 얌을 생산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함으로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학문이 개발학이다. 이러한 개발학의 이념적 정향성은 개발학이 놓여있어야 할 자리를 결정한다. 개발학의 자리는 우아하고 경건한 하늘 위 연구실이 아니라, 빈곤에 떠밀려온 인도네시아 난민들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이며, 내전으로 인하여 도망쳐 나온 D.R. 콩고와 남수단 난민들이 머물고 있고 우간다 카세세와 아주마니 그리고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자신의 토지를 잃어버린 농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캄보디아의 쓰레이산토 마을이다. 개발학이 자신의 자리를 옳게 잡았을 때 개발학은 위선적 가치중립을 넘어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설 수 있게 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당파성. 서구 학문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온 이 당파성이야 말로 개발학이 유념해야만 할 정향성이다.
이 책에서 저자 그린 던컨은 개발학이 학문으로서 자리 잡기 위한 조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개발학이 진정한 학문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능동적 시민사회와 효과적 정부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는 개발학의 역사로부터 저자가 얻은 교훈이기도 한데, 그에 따르면, 기존의 개발학이 던져온 질문들은 언제나 주류 경제학 특히나 경제 성장을 둘러싼 질문들로 점철이 되었고 이 질문들에 대한 답들은 언제나 개발학이 학문이 되기 위한 중심 토대를 잃어버리고 있어왔다. 개발학을 견인해온 주류 경제학은 언제나 생산과 소비의 증가를 통하여 재화의 전체 규모가 확장되면 다수가 만족하는 삶의 개선이 이루어지게 되리라고 설파해 왔다. 시기에 따라 정부와 시장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성장과 분배의 문제에 대한 논의 또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개발학의 토대라 여겨졌던 주류 경제학은 더 많은 재화의 유통에 관심이 있었지만, 경제 성장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확대하고, 정의의 토대가 되며 사랑과 진리를 소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비전은 보여주지 못해왔다. 개발학이 가지고 있어야할 궁극적 관심을 잃어버렸었던 것이다.
저자가 밝힌 능동적 시민사회란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주체적 시민을 의미한다. 빈곤의 처참함은 스스로의 운명을 타자에게 맡기는데 있는데, 유사 학문으로서의 개발학은 가난한 이들을 원조의 노예로 만들거나, 인간다운 삶을 시장에서 유통되는 재화로 만들어 그들에게서 인간다운 삶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빼앗아 버린다. 하지만, 참된 개발학은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자신의 운명을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워 빈곤에 대항하며 잃어버린 자신의 땅을 되찾을 시민 사회를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시민사회의 힘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만큼 낭만적이지는 않다. 개발은 효과적 정부를 요구한다. 이론상 정부는 국가의 행정과 재화를 제재할 법적 정당성을 가지지만 이러한 정부는 고전주의 경제학이 발견한 수많은 권력의 오용을 통하여 빈곤한 이들을 양산하고 개발의 뒷걸음치게도 해왔고 이러한 이유에서 신고전주의자들은 작은 정부를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능동적 시민사회의 견제를 통하여 정부가 개발을 견인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을 유치하고, 전략적 생산 시설을 세우며, 인프라를 건설하고 효과적인 세수 집행을 하는 것을 자본에만 맡겨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본의 본질상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이주민들은 개발로부터 소외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책의 미덕은 개발학의 이념적 정향성과 자리를 현실에 뿌리 내린 채 설명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론으로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시민사회와 효과적 정부가 함께 인간다운 삶을 되찾은 수많은 사례들을 통하여 개발학이 나아가야할 길을 설명하고 있다. 많은 개발학 서적들 가운데, 구체적인 인간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엮어 개발이 추구해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탁월함은 빛나고 있다.
역자는 2017년 7월 무정부 상태가 된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번역을 시작하였다. 카빌라 정권의 도덕적, 법적 정당성은 사라졌고 이로 인해 수도 킨샤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무정부 상태가 된 암담한 현실에서 번역은 진행 되었는데, 매일 아침이면 거리에서 책이 실사화 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거리에 넘쳐나는 걸인들, 흙먼지 속에서 카사바 몇 개, 감자 한 움큼을 팔려고 모여든 리미떼 시장 사람들, 행인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에 바쁜 경찰들,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서도 가족을 위해 장터로 나선 여성들. 정부는 이 현실을 타개해 나아갈 의지도 힘도 없고, 또한 시민들은 조직화 되지 못했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고 있다. 이들에게 이 책이 직접적인 도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독자들 중 선한 마음으로 이들을 위해 노력해줄 한 사람이 있다면 역자로서 더할 나위없는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번역을 소홀히 여기는 학계 풍토에도 불구하고 본 책을 번역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빈곤문제국제개발연구원의 정무권 교수와 한국연구재단에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또한 이 책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황정인, 이동석, 김성규, 김진희, 이혜정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조그마한 반도의 나라에서 잡을 수 없는 별을 잡는 심정으로 빈곤의 현장으로 뛰어들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 책이 조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역사가 후퇴하고, 선의 왕국은 오지 않으며, 인류는 갈수록 굶주리게 될 수도 있다.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더 많은 이들이 독재자를 위한 노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선한 싸움은 지고 말 것이며, 자유를 위한 노력들은 사그라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빛의 인도를 따라 동료들의 손을 잡고 선의 길을 떠나가야 할 것이다. 그 길이 멀고 험할 지라도.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