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이 둘 사이에서 양방향 작용이 진행되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이중의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리스도의 궁극적 성취라는 목적지에 비추어 구약성경 이야기의 온전한 의미를 볼 수 있다. 또 하나님이 구약성경에 드러내신 역사적 선언들과 의도에 비추어 그분이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의 여러 의미들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다.
예수-01. 예수님과 구약 이야기 중에서
기계화된 운송수단이 나타나기 전, 한 아버지가 다섯 살 난 아들에게 스물한 살이 되면 말 한 필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자동차가 발명된다. 그리고 스물한 살 생일날 아침, 아들은 ‘아빠의 사랑을 담고’ 집밖에 서 있는 자동차를 발견한다. 이 상황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왜 말이 아니라 자동차를 주느냐, 아버지는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한다면 참으로 이상할 것이다. 더욱이 아들이 말보다 훨씬 좋은 자동차를 받은 후에도 말을 주겠다던 아버지의 문자적인 약속에 매달리며 말도 받아야겠다고 우긴
다면 더욱 이상할 것이다. 약속할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방향으로 상황이 바뀜에 따라 아버지는 문자적으로 약속을 지킨 것 이상으로 약속을 지켰다. 원래의 약속은 당시에 구할 수 있는 운송수단의 형태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버지는 약속의 원래 문구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약속을 지켰다. 16년 전, 아버지는 당시의 용어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새로운 역사적 사건의 빛에 비추어 그 약속을 지켰다.
예수-02. 예수님과 구약의 약속 중에서
구약의 여호와의 종이 예수님과 교회에 끼친 깊은 영향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벌이는 모든 기독교 선교의 본보기와 원형이 되어야 한다. 놀랍게도,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처음에는 이름도 없이 등장하셨고, 멸시와 억압과 배척과 무시를 당하는 사람들을 긍휼로 섬기는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것을 우리 행동의 본보기로 분명히 정해 주셨다. 참으로 잊지 못할 섬김의 본이었다.
예수-04. 예수님과 구약이 말하는 그분의 사명 중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적인 요구사항을 깊이 묵상하심으로 인생의 방향을 정하셨다. 율법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지 인식하는 감각을 되살려 주셨다. 또 히브리 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하심으로 자신이 토라를 부당하게 입맛대로 골라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셨다. 아니, 토라를 주의 깊게 읽고 이해하면 토라 자체에 담긴 고유의 가치척도와 우선순위에 대한 감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앞서 말했다시피, 예수님은 토라를 보호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실상 그 의도를 파묻어 버리고 말았던, 그 겹겹이 덧붙여진 규정들을 걷어 내시고 토라의 요지에 담긴 단순함과 명확성을 다시 드러내 주셨다.
예수-05. 예수님과 구약의 가치 기준 중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통해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셨던 성경의 남녀 등장인물들은 오늘날의 당신과 나만큼이나 타락한 죄인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성경 속 누군가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았거나 능력을 덧입었다고 해서 그들이 죄 없는 사람이었던 것도, 이후 그들이 행한 모든 일이 도덕적으로 완벽했던 것도, 하나님이 원하신 바와 모든 면에서 일치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약함이 죄악된 한 사람 안에서 만났을 때, 그 결과는 많은 경우 예측불능이었고 그 양상 역시 불분명하기 그지없었다. 성경의 어떤 인물이 하나님의 영으로 능력을 받았다 해도 그는 여전히 우리처럼 타락하고 죄악된 자였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상황이 그러한데, 오늘날에는 오죽하겠는가?
성령-02. 능력 주시는 영 중에서
구약성경의 그 영은 아무 신이나 막연한 신적 충동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곧 야웨의 영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보면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의 성품이 모든 정의와 의로움, 진리와 고결함의 토대임을 의심의 여지없이 알 수 있다. 이 야웨는 우주의 보좌에 좌정하시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시 97:2)이신 분이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의 영을 진실로 가진 사람이라면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할 것이고, 그분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귀하게 여길 것이며, 그분의 관심사에 집중할 것이다. 따라서 정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성령-03. 예언의 영 중에서
혹시 한때의 나처럼 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방식의 삶, 인간관계, 행동습관에 계속 머물고 싶은 유혹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그에게 꼭 전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메뚜기떼가 달려들어 인생의 푸른 것, 기쁨과 성장과 비옥함을 다 빼앗아 갈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그분의 자비와 은혜로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까지 회복시켜 주시는 그분의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이 심오하고 황송한 진리를 경험을 통해 배웠다. 나는 평생 기독교 신앙을 믿고 공적 기독교 사역을 펼치며 살았는데도, 결코 예외일 수 없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메뚜기 떼에게 먹혀야 비로소 주님께 돌아가 그분의 약속이 진리임을 체험하게 될까?
성령-05. 오실 영 중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직접 말하는 구약성경 본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중 한 본문이 인간사회에서 약하고 취약한 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약한 자들의 전형인 고아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버림받았거나 부모와사별하여 자연적인 보호의 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친히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01. 자녀를 위해 일하시는 아버지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을 아버지로 아는 일과,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일은 동일하고 똑같이 영원하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는 이 둘이 어느 정도 구분될 수 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안에는 시내산 언약이 깨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영속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약을 깨뜨릴 수는 있어도, 아버지의 아들이기를 중단할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고달프게 살면서 깨어진 언약의 처참함을 체험했지만, 여전히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분의 맏아들로 주장하신 것은 출애굽 이전, 시내산 언약 이전의 일이었다(출 4:22). 그리고 그 주장은 시내산 언약이 산산이 깨어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하나님-04. 그분은 백성의 아버지이시다 중에서
적대적인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 하면(에스겔의 환상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나, 에스겔의 사역 대상이던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자손처럼),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신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선교의 현장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상대한다. 때로는 우리 문화가 섬기는 신들이 우리를 조롱하기도 한다. 그런 신들로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우상, 풍요, 오만, 탐욕의 상징들, 경제적 군사적 지배를 위한 강력한 조직, 다른 종교의 위협과 경쟁, 언론의 냉소주의와 과장, 사회에서 성공과 명성에 따라오는 휘황찬란한 보상의 유혹 등이 있다. 때로는 우리와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약하고 주변부로 밀려나 있어서, 강력한 적대세력의 공격에 노출된 취약한 무방비 상태로 느껴지기도 한다. 세계의 어떤 지역에서는 교회에 대한 적의가 폭력으로 나타나 그리스도 안의 많은 형제자매들이 물리적 위협과 공격, 사회적 불이익, 엄청난 심리적/영적 압력, 투옥, 고문, 심지어 죽음까지도 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곡에 대한 예언이 남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08. 하나님의 승리를 기대하자 중에서
우리는 위험한 시기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역사의 온갖 위험했던 시기와 암울했던 시대에도 줄곧 이어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약성경을 낳은 1세기는 복음의 전령들에게 만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선교 사명을 받아들였고 위험에 잘 대처했다. 예수님은 “가서 모든 안전한 민족을 제자를 삼으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기독교 선교는 유리한 상황, 평화, 평정에 의지한 적이 없다. 물론 우리는 바울이 말한 대로 평화로운 상황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 상황이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딤전 2:1-4).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상황에 의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온 땅에 알려지고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그것이 우리 선교의 원동력과 추진력이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의 초점이고 하나님이 역사를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목적이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한다면, 그분의 선교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분의 힘과 보호하심을 덧입고 이 위험한 세계의 벅찬 난관들을 직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09.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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