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도는 국가에 봉사한다는 자부심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아니라면 저 많은 노인들을 처리할 때 필연적으로 들러붙는 죄책감, 동족 살해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극복하지 못해 정신이 이상해졌을 것이다. 군인들이 외부의 적과 대치하는 동안 장길도는 내부의 적과 대치해왔다. 둘 중 어느 한쪽의 결기와 희생이 덜하다고 말할 수 없다. 장길도는 사명감과 충성심이 투철한 사람이었고, 바로 그 덕분에 팀장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적어도 현재의 노령연금TF팀 중에는 장길도만큼 길고 화려한 이력을 지닌 외곽 공무원이 없었다.
그런데 그 팀이, 그 조직이, 그 국가가 아내를 해치려는 중이었다.
--- p.42~43
병원에 도착한 지 닷새가 되던 날 밤에 원 씨는 병실 창문을 통해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누구든 잡히기만 하면 실력을 보여주려고 벼르는 의사가 주변에 득실거렸음에도 이번엔 심장이 파열되었기 때문에 어찌 손써볼 틈이 없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의 추측은 비슷했다. 원 씨는 늙었다. 가진 게 없고, 별 희망도 없고, 하루하루 지치기만 했다. 살아 있으면 뭐 하나. 병원비는 또 누가 내나. 왜 굳이 이 고생을 하나.
그랬던 게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꽤 합리적이어서 부검이 생략되었다. 국가는 모든 죽음을 부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게 다 국민의 세금이다.
--- p.51~52
적색 리스트에 오른 과다 수급자를 처리할 때 노령연금TF팀의 외곽 공무원들은 주로 ‘가능성을 높인다’고 표현한다. 어차피 인생은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의 목숨이란 참으로 질긴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보면 피로 가득 찬 풍선과 다를 바 없다.
--- p.55~56
지하철은 늙은이가 밥 먹는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시간이 남아도는 이들만 지하철을 타기 때문이다. 장길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노인들이었다. 하나같이 ‘내가 경험이 많아 다 안다’는 표정과 ‘나이 들어서 창피하다’는 표정을 함께 짓고 있었다. 전자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고, 후자는 너무 당연해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그들의 무임승차를 벌충하기 위해 젊은이들의 지하철 요금은 어지간한 밥 한 끼 값을 넘은 지 오래다. 값싼 고령 인력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도 갖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 p.72~73
“자살이지 뭐. 어쩔 수 없던 거지.”
“뭐를?”
“싫은 거지.”
“뭐가?”
“제가 늙은 게 싫은 거지. 유서에 이런저런 사연을 남겨봤자 조사해보면 결국은 그게 그거지, 팍삭 늙은 게 싫은 거지.”
“그게, 그런 건가?”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자신을 공격하는 거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도 있나?”
“있지.”
“누구?”
“늙은이들.”
--- p.82~83
은퇴한 전직 공무원 장 씨(70세, 남)는 서울 성북구 자신의 집에서 전깃줄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서랍에서 나온 달랑 넉 줄짜리 유서에는 오래 앓던 아내의 죽음에 상심하여 삶의 동기를 잃었다고 적혀 있었다. 장 씨 부부를 오래 보아온 이들은 아내를 떠나보낸 장 씨가 자살을 안 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사람들이 상처받은 서로에게 더 관심을 갖지 않는 한 이러한 죽음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덕에 사회는 숨통을 트고, 한층 젊어진다.
--- p.83
“사실 내 아내가 적색 리스트에 오른 건 좀 문제가 있다네. 내가 봤는데, 그간 수령액이 한 80%쯤에 불과하더군. 적색 리스트에는 보통 100% 수급자들이 오르잖은가.”
장길도의 말에 젊은이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 와이프가 올해 79, 그렇지?”
장길도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젊은이가 말했다.
“연금이 저축해둔 돈 찾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생산인구 소득을 거둬 비생산인구들에게 나눠주는 거야. 요새 청년 세 명이 노인 일곱 명을 부양하고 있어. 청년들이 100만 원씩을 벌면 너희 늙은이들한테 쪽쪽 빨려서 집에는 대략 50만 원씩 가져간단 말이야. 그 돈으로 애인 만나 찻집에 가고 결혼을 하고 애도 낳아 기르고 월세도 내야 돼. 나머지 50만 원은 당신 같은 늙은이들한테 갖다 바치고 말이야. 뭐, 80%쯤이라고? 80%면 괜찮은 거야? 이봐 장길도 씨, 양심이 좀 있어야지!”
--- p.125~126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 죽어!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지 그게 사람이야? 요즘 툭하면 100살이야.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데 대체 왜들 안 죽는 거야! 온갖 잡다한 병에 걸려 골골대면서도 살아 있으니 마냥 기분 좋아? 기분 막 째져? 어제도 출근하다 보니 어떤 노파가 횡단보도를 점거하고는 5분 동안 건너더라고. 영락없이 지각을 해서 이사장님한테 꾸중 들었지 뭐야. 나라 전체가 그래. 사방이 꽉 막혀서 썩어가고 있어. 하는 일이라고는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주제에 당신들 대체 왜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거야!”
--- p.126~127
수련 씨와의 근사한 40년.
장길도는 생각했다.
길지 않았다. 정말 짧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수련 씨는 없다.
싹 죽여버리고 싶은 새파란 개새끼들만 있다.
바보, 뭐가 애국이고 국가냐. 수련 씨 같은 착한 노인을 죽여야 유지되는 게 무슨 나라냐. 이따위 나라는 한시바삐 멸망해주는 게 인류에 대한 기여다.
--- p.129~130
전부 끝난 것이다. 장길도는 이틀간의 전력 질주 속에서 분실해버린 단어들을 하나둘 속으로 헤아려보았다. 누나, 스승과 동료, 자존심, 신뢰, 명예, 애국……. 너무 많고 또 너무 뜨거워 속이 바짝바짝 탔다. 새콤한 사과 한 알이 먹고 싶었다. 아니다. 사과를 먹고 싶은 게 아니다. 사과 따위는 개한테 줘버려도 좋다. 그깟 사과가 뭐라고 그걸 구하려 밤새 달렸던 자신의 젊음과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사과 두 알을 꼭지째 우적우적 씹어 먹던 수련 씨의 젊음, 그토록 수많은 게 가능했던 젊음, 그리고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저 새파란 젊음이 그리운 것이다.
--- p.133
“자네들은 가망이 좀 있는 거 같은가? 이길 것 같아? 아닐세. 곰곰이 따져보면 자네들도 가망 없긴 마찬가지야. 시간이 노인의 편이 아닌 것처럼 젊은이의 편도 아니지. 시간은 결국 살아 있는 모두를 배신할 걸세. 싸우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덧 자네들도 맥없이 늙어 있을 테니까.”
---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