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 모두를 위한 책입니다. 누구의 편을 들거나 한쪽 사정에만 귀 기울이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했습니다. “디자인은 이렇게 힘든 거니까 클라이언트, 당신이 양보하세요”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클라이언트는 당연한 얘길 하는 거니, 디자이너 당신은 하라는 대로 만드세요!”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이유는 결국‘ 잘하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그냥 그림판으로 만들어도 될 로고를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건 하나를 만들어도 ‘제대로’ 하고 싶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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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폴리오나 레퍼런스를 확인할 때는 두세 가지 시안을 함께 놓고 확인하자. 특히 파랑과 빨강을 어떻게 쓰는지 잘 확인하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자연색 즉 파란색과 갈색, 붉은색 계열은 역설적으로 개인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색이기도 하다. 섹시한 레드라고 해도 항상 버건디 계열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고혹적인 버건디보다 발칙하거나 발랄한 높은 채도의 빨강이 섹시함을 상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초록과 민트 계열에서는 예쁜 색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색 조합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유심히 보지는 말자. 컬러에 대한 취향과 민감도는 거의 보자마자 느낌으로 오니 스윽 봤을 때 ‘색이 이쁘다’라는 생각이 들면 거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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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디자인 업무는 ‘오더가 내려온 것을 툴을 이용해 만들어 내는 것’이 90퍼센트이고 ‘만든 그것을 다시 수정하는 것’이 10퍼센트이다. 디자이너의 중간자적 역할은 변함없지만, 행위의 개선이나 유발 등 디자인 본연의 힘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클라이언트의 손발이 되어 그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뒤 그것으로 마침표를 찍어 버리는 느낌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가 모두 행복하다면 기립 박수를 칠 일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디자이너는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이고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환멸감에 사로잡히고, 클라이언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틀 안에 나오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 p.107
페이스북에 올릴 이미지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이미지는 엄연히 다르다. 보도 자료용 이미지도 확연히 다르고, 블로그용 이미지도 다르게 베리에이션해야 한다. 디자인하는 마케터가 늘어나는 것은 이런 까닭 때문이다. 그때그때 알맞게 바로 제작할 수 있으면 가장 효율적이다. 최근에는 카드 뉴스 제작 툴이나, 뉴스레터 제작 툴, 리사이징 사이트 등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채널에 최적화된 이미지를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도구가 많아서 담당자가 직접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디자이너와 박 터지게 싸우고, 서로 ‘아 뭔데… 진짜…’ 하면서 빈정 상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주요 원인은 디자이너가 구축한 브랜드 가이드를 맞추지 않는다는 이유였는데, 사실 그 가이드라는 것이 디자이너가 홀로 제작한 경우가 많다. 서로의 업무 타입과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가이드는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다. 디지털 마케팅과 O2O 마케팅, UX 마케팅이 크게 성장하는 요즘, 급변하는 채널 특성에 맞추기 위해서는 유연한 가이드와 최소한의 원칙을 지니고 움직이는 것이 좋다. 당연히 디자이너도 이러한 채널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히 가로세로 픽셀만 외우고 다니는 시대는 끝났다.
--- p.114
방법의 차이야 있겠지만, 제안서 디자인을 한다고 치면 20페이지를 모두 완성하고 한 번에 보내 주는 방법이 있고, 하루하루 완성되는 분량마다 보내서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는 후자 쪽을 굉장히 선호한다. 빨리 보고 싶은 것이다. 4페이지 정도 만들어지면 바로바로 보내서 확인하고 즉각 피드백을 받는 형식이다. 시안도 그렇다. 리모트로 다른 곳에서 작업하는 경우에는 카톡으로 바로바로 복붙해서 “이렇게요?” “이렇게요?” 하며 확인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상당히 통쾌해하는 분이 많다. 이는 처음에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조율하며 얘기해 볼 문제인데, 실무자들은 항상 바쁘고 조급하므로 이들의 불안감을 덜어 내고 잘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p.193
회사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보니 친한 사람과 서먹한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대표와 친하고 팀장과 서먹하다면 보고 체계나 권한에 어긋나는 커뮤니케이션이 진행될 수도 있다. 더 높은 상급자에게 컨펌을 받아 버리면 팀장은 할 말이 없을 게 아닌가. 이러한 문제가 자주 발생하면, 디자인 팀 내부에서도 갈등이 생긴다. 의사결정 과정도 꼬이기 시작하면서 “저런 여우 같은 것, 이빨만 까고 있다, 진짜 입디자인한다” 등의 소리가 나온다. 원래 당하는 사람은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제3자의 눈이 정확하다. 직원들은 마치 아침드라마의 막장 음모를 보며 치솟는 분통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드라마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피해를 현실로 직접 경험하는 4DX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업무를 함에 있어 관계보다 먼저인 것이 문서와 시스템이다. 보고 체계와 컨펌 절차는 명확하게 지키도록 하자.
--- p.208
예를 들어 ‘잘 안 보인다’라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실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 시각적으로나 디자인적으로나 그게 상식적인 해결책이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는 폰트를 두껍게 하고 키우는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굵고 크고!=잘 보이는 것”이라는 프레임이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렇게 해서 가져가면 매우 좋아한다. 무너진 행간과 자간이 디자이너로서의 자부심과 커리어에 치명적인 아픔을 남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클라이언트가 만족하고 비딩을 따내고 디자이너가 인정받는다면 잘못된 일일까?
--- p.214
“이번 시안이 위에서 별로 맘에 안 든다고 하셔서, 다른 컨셉으로 진행해 봤으면 하는데요. 컨셉이 복잡하지는 않은데, 혹시 내일까지 될까요?” ‘다른 컨셉’으로 진행하는 것은 수정이 아니다. 또 복잡하고 안 복잡하고는 디자이너가 판단할 문제다. 여백이 몽골의 대평원 같고 텍스트 두 개, 선 몇 개만 있는 심플하기 그지없는 포스터인데도 레이어가 130개가 넘는 경우가 있다. 두 번째 오더부터는 ‘수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건 좀 이상하다. 보통, 상사가 내 보고서를 문서세절기에 넣으며 “다시 해 와”라고 할 때 ‘아, 문장 조금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지 않은가. 다른 컨셉으로 해 보자는 요청은 다 없던 걸로 하고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얘기다.
--- p.298
밑줄을 긋고 여백을 넓히는 모든 작업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후임, 동료, 타 부서, 협력업체 등 타인은 왜 그런 디자인이 등장했는지 모른다. 그리드가 무엇인지 모르고, 신묘한 색 조합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 디자인으로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디자이너도 모르고 있으면 이건 심각한 문제다. 기획자가 자기 기획안을 프레젠테이션하지 못하는 것, 회계 담당자가 수치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 마케터가 콘텐츠를 만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은 ‘감으로 만들어 내는 탈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업무’다.
--- p.323
“16일 날 전달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 말은 이런 뜻이다. “16일 날 드리겠습니다.” “요청이 필요한 부분을 알려 주시면 검토 후 피드백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필요한 자료가 있으시면 말해 주세요.” “코어 밸류가 좀 더 부각될 수 있는 방향이었으면 합니다”라는 말은 “3페이지 회사 소개 파트에 컬러 좀 사용해 주세요”라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쉽고 직관적으로 소통하자. 한자와 영어는 꼭 필요한, 또는 한글로 대체하기 힘든 개념이 아니라면 가급적 지양하기를 권한다. 아쉽게도 디자이너는 나와 같은 계통의 사람이 아니며, 내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