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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1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356g | 143*208*20mm
ISBN13 9788992168830
ISBN10 899216883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프롤로그

1. 인생은 과연 무의미할까?
1. 카뮈 _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2. 시지프스 _ 원초적 무의미
3. 시지프스의 삶 VS 인간의 삶
4. 시지프스의 삶이 무의미한 이유는?

2. 시지프스 구하기
1. 객관적 가치
2. 주관적 만족
3. 생명의 풍경 _ 삶의 의미는 삶 자체일까?
4. 사라진다는 것
5. 영원한 권태
6. 본능의 시지프스
7. 욕구의 주체성

3. 무엇이 삶의 의미인가?
1. 영원한 무의미
2. 냉동인간과 마크로풀로스
3. 벌레의 관점, 인간의 관점, 우주적 관점
4. 내부의 관점과 외부의 관점
5. 부조리에 대응하는 자세 _ 아이러니
6. 아이러니의 전략
7. 천국과 지옥

4. 더 커다란 의미를 위하여
1. 객관적 가치를 통한 주관적 만족
2. 변화와 성장
3. 시지프스 VS 라인홀트 메스너
4. 자기완성
5. 시지프스에게 사회가 있다면?
6. 우리 모두는 시지프스다 _ 공동체
7. 자아실현에서 존재의 완성으로

5. 의미와 무의미를 넘어서
1. 인생의 의미를 묻는 까닭은?
2. 의미의 세 단계
3. 의미의 의미
4. 죽음 뒤에 남는 것
5. 한계의 초월
6. 의미와 가치
7. 의미의 북극 _ 무한을 향해
8. 인생은 정말 무의미할까?
9. 무의미한 삶이란?

맺음말
후기
해제 : 굿바이 카뮈, 굿바이 청춘 - 이현우(로쟈)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이윤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워싱턴 주립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받았다. 개인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삶의 의미를 주제로 공부하면서 틈틈이 관련 도서들을 번역, 집필하고 있다. 《빅 퀘스천》, 《종교 본능》(근간)을 공역했고, 삶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다룬 인생론을 쓰는 게 인생의 커다란 목표이다. 《굿바이 카뮈》는 그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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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시지프스에게 같은 방식으로 형벌을 내리지만, 약간 생각을 바꿔서 ‘변태적으로’ 자비롭게도 그에게 어떤 이상하고도 비합리적인 충동, 즉 바위를 굴려 올리는 본능을 심어놓는다고 가정하자. 이것을 변태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 자체는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합리적 이유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스는 그러한 본능을 가지고 있고, 그 본능은 바위를 굴려 올림으로 써만 충족되므로, 그는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리고, 바위가 굴러 내리자마자 쉬지도 않고 또 굴려 올린다. 그것도 기꺼이, 매우 즐거워하면서 말이다.” 이 덧칠한 그림에서 신들이 시지프스가 원하는 것을 형벌로 준 것인지, 아니면 형벌의 내용을 소원하도록 그의 머리를 살짝 돌게 만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 이제 더 이상 그의 삶은 예전처럼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할 수 없다. 바위 굴리기는 기쁨의 원천이며, 그는 평생, 아니 영원히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꿈에도 바라는 지상천국의 모습이 아닐까? --- p.32-33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초은하계 정부에서는 지구인이야 알든 말든 상관없이, 수백만 년 전부터 지구의 공전 궤도가 새로운 은하계 여행 도로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지구를 철거한다는 계획을 공고하고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를 기해 지구라는 행성과 그 위의 60억 인류와 생명체는 은하계에서 마치 개미집이 철거되듯 순식간에 소멸하게 된다. … 인간 삶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고 보는 허무주의의 관점은 더 큰 존재가 외부로부터 작은 것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때,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드러나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일면적인 시선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부조리하고 허무하다고만 본다면 그것은 외부의 일면적 시선을 마치 전면적 시선인 양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 p.82-83

우리는 앞에서 어떤 것을 내부의 시선으로 볼 때는 가치 있고 중요하게 나타나는 반면,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는 하찮고 무의미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실존주의자들이 의미를 중요한 문제로 보는 것은 의미를 내부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일 수 있다. 반면 현자가 의미를 중요한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은 의미를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삶을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데까지는 성공하여 삶의 의미(또는 무의미)를 인식하는 데까지는 도달했지만, 삶의 의미의 외부로까지는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 --- p.139

카뮈의 대표작《이방인》과《시지프 신화》는 20대에 쓰여졌다. 그래서 아직은 사춘기의 느낌이 묻어난다. 인간의 의미 요구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우주에 절망하는 카뮈의 모습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얻지 못해 좌절한 소년의 어리광이 느껴지기도 한다. 장년기에 이른 사람이 여전히 카뮈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나이착오적’이다. 카뮈보다 2,500년 앞서 우주의 냉정함을 깨달은 노자의 경우를 보면 노인네다운 담담한 관조로 무심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생의 각 단계에 맞게 기어 변속이 필요한 것이다. -- p.144

우리는 이처럼 객관적 가치와 주관적 만족을 통한 자기완성이라는 귀납적 기준과 더 넓은 가치의 연결망 속에서의 자기초월이라는 연역적 기준을 통해 우리들의 다양한 삶의 형태에 대해 그 의 미의 상대적 크기를 평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삶과 죽음을 비교해보면, 삶은 죽음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삶은 객관적 가치 생산을 통한 주관적 만족이라는 귀납적 의미 기준을 충족할 가능성이 있지만, 죽음은 그 가능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또한 삶은 죽음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죽음은 삶을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기적 통일성이라는 가치 기준에서 볼 때 삶이 죽음보다 더 가치 있다. 결국 헤스먼이 말하는 인생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자살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보다 더 무의미하기 때문이며,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더 의미 있기 때문이다. 카뮈의 말대로 인생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부조리한 삶이 조리 있는 죽음보다 가치 있다.
--- 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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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의미에 대해 철학적으로 정면승부하기
카뮈는 일찍이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자살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철학의 근본 문제라는 것. 하지만 인생의 무의미함을 절절히 묘사했던 카뮈 자신은 자살하지 않았고, 풍부한 삶을 즐기다가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0년 가을, 하버드 대학에서 한 사내가 총 1,900여 장에 이르는 철학적 유서를 남긴 채 권총 자살한다. 자신의 허무주의 논증을 몸으로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인생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이 책은 자칫 치명적일 수도 있는 물음, 즉 “인생은 과연 무의미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영어권 철학자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의미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전반부는 실천윤리학자 리처드 테일러가 시지프스의 신화를 모티브로 전개한 독창적이고 기발한 사고실험을 인용하여, 원초적 무의미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삶의 의미가 생겨날 수 있는지를 귀납적으로 탐색한다. 후반부는 로버트 노직이 전개한 의미의 개념 분석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 구조를 연역적으로 밝혀낸다. 그리고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귀납적 탐색과 연역적 탐색이 동일한 결론으로 이어짐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의미를 논증해낸다.

시지프스는 어떻게 무의미의 감옥을 탈출할 수 있을까?
리처드 테일러는 아무런 목적도 결과도 없는, 고통스런 노동을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삶이 어떻게 무의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사고실험을 통해 면밀히 따져본다. 시지프스가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함께 바위를 굴린다면? 가치없는 바위 대신에 값비싼 보석덩어리를 굴린다면? 무거운 바위 대신에 가벼운 조약돌을 옮긴다면? 올라갈 때마다 바위를 바꿔가며 옮긴다면?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지만 좀처럼 의미는 생겨나지 않는다. 과연 시지프스는 무의미의 감옥을 탈출할 수 있을까? 테일러는 이리저리 모색한 끝에 마침내 두 가지 후보를 찾아낸다.

“만일 시지프스가 올려놓은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지 않는다면? 산 위에서 건축되어 아름답고 견고한 신전이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면?” 테일러가 생각해낸 첫 번째 의미의 원천은 아름답고 견고한 신전이라는 노동의 목적이자 가치의 생산물이다. 산꼭대기에 올려놓자마자 굴러 떨어지는 바위와 달리 여기서는 노동의 구체적 결과물이 나타나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다. 원래의 풍경을 지배하던 무목적성이라는 암울한 안개가 다소 사라지면서 의미의 모습이 서서히 떠오르는 듯하다.

테일러가 두 번째 의미의 원천으로 찾아낸 것은 주관적 만족이다.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같은 방식으로 형벌을 내리지만, 약간 생각을 바꿔서 자비롭게도 그에게 어떤 이상하고도 비합리적인 충동, 즉 바위를 굴려 올리는 본능을 심어놓는다면? 그렇다면 시지프스는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바위를 굴려 올릴 것이다.” 이 그림에서 시지프스의 형벌이 달라진 것은 없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바위는 끊임없이 올라갔다가 굴러 내릴 것이며, 어떠한 과업도 완수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지프스의 핏줄에 흐르는 본능적 욕구가 충족됨으로써 그의 삶은 마치 지상천국에 있는 것처럼 기쁨과 환희에 넘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테일러의 사고 실험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더욱 진전시킨다. 아름답고 견고한 신전이라는 객관적 가치도 언젠가는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신전이라는 객관적 가치도 단지 천천히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불과한 것, 따라서 결국은 허무한 것이 아닐까? 만일 신전이 사라지지 않고 영구불변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시지프스는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권태 속에 빠지지 않겠는가? 본능이 충족되는 주관적 만족에 대해서도 저자는 객관적 가치가 결여된 주관적 만족이 삶의 의미를 보장할 수 있는가를 물으며 테일러 논증의 약점을 밝혀낸다. 그렇다면 시지프스는 도대체 어떻게 의미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작별하다
이 책은 저자가 20대 초반부터 궁리해온, 카뮈로 상징되는 삶의 의미에 대한 오랜 갈증과 탐문을 철학함의 자세로 정리한 대답이다. 이 책의 해제를 쓴 인터넷 서평가 로쟈가 말했듯 이것은 존재의 이유를 물었던 청춘의 질문에 대한 인생 2라운드에서의 답변이다. 저자는 원초적으로 무의미해 보이는 시지프스의 삶이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반적인 모습과 같다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무의미해 보이는 시지프스의 삶에서 먼저 의미를 찾아야 한다. 저자는 바로 이 난제에 도전한다. 그리고는 20여 년 해묵은 문제에 대해 마침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답변을 얻었다고 자평한다. 저자는 삶의 의미에 대해 알듯 말듯한 모호한 대답으로 마무리하는 명상서나, 밑도 끝도 없이 ‘사랑입니다, 희망입니다’를 부르짖는 자기계발서식 해법을 배격한다. 인생의 의미는 개인이 각자 깨닫는 것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결론에 이르지도 않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생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는 ‘안전한’ 통념을 뒤집고 저자만의 명쾌한 논리와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영미철학의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의미론을 종합하여 삶의 의미 체계를 “주관적 만족과 객관적 가치의 확대재생산을 통한 존재의 완성”이라고 정리한다. 이 의미 기준에 따라 석가모니나 예수 등의 성인들, 간디, 안중근, 스콧 니어링 등의 역사적 인물, 그리고 성철, 노무현, 안철수 등 동시대 인물들의 인생의 의미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인생의 문제를 사이비 문제로 진단했던 분석철학이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내놓기 시작한 삶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위로가 아니라 의미를 찾으라
이 책은 현재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거나 한때나마 의문을 품어본 사람을 위한 책이다. 이 의문은 우울증에 걸려 고독과 좌절에 빠진 사람이 던지는 질문과는 다르다. 그것은 큰 병에 걸렸거나, 실직을 했거나, 연애에 실패했거나, 가족을 잃었거나 등의 이런저런 사연 때문에 절망에 빠진 ‘귀납적인’ 허무감이 아니라, 삶이 원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단 하나의 대전제로부터 출발하는 ‘연역적인’ 허무감에서 나오는 물음이다.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주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나 종교적 위안은 여기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만족스런 답을 얻지 못한 독자,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감성적인 위로가 아니라 이성적 논리를 가지고 탐구하고 싶은 독자,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었던 독자, 열심히는 살지만 왜 사는지는 모르겠다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예기치 않은 깨달음과 즐거움을 줄 것이다.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굿바이 카뮈’란 말이 뜻하는 것은 카뮈란 말로 상징되는 철학적 고민과의 작별이다. 바로 삶의 의미,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의 작별이다. 이 문제를 두고 저자는 영어권 철학자들의 논의를 참고하여 면밀하고 체계적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런 스타일은 개념의 명료화를 지향했던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영향에 힘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분석철학에서는 보통 삶의 의미와 같은 실존주의적 물음을 문제로 성립할 수 없는, 되지도 않는 문제로 기각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논리를 지렛대로 삼아서 삶의 의미라는 바위, 매번 다시 굴러 떨어지던 시지프스의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고자 한다. 저자는 성공한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스무 살에 이 정도로 삶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면, 굳이 철학과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핏 《논리철학논고》를 통해서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소했다고 자부한 비트겐슈타인의 자신감을 떠올리게 한다.
'이현우(필명 로쟈, 작가)'

회원리뷰 (2건) 리뷰 총점10.0

혜택 및 유의사항?
무의미함의 무의미함에 대해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밤****다 | 2022.06.30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인생이 살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삶의 모퉁이마다 불쑥 불쑥 나타난다. 설사 인생을 걸었을만한 숭고한 가치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도 달성된 후의 허무감은 피해갈 수 없다. 하물며, 객관적 가치라곤 만들어 내지 못하는 여타의 삶이란 또 어떠하겠는가. 철학자 미첼 헤스먼은 무려 1900장의 문서에 인생의 무의미함을 남겨 놓고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에서 자살했다. 그;
리뷰제목

인생이 살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삶의 모퉁이마다 불쑥 불쑥 나타난다. 설사 인생을 걸었을만한 숭고한 가치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도 달성된 후의 허무감은 피해갈 수 없다. 하물며, 객관적 가치라곤 만들어 내지 못하는 여타의 삶이란 또 어떠하겠는가. 철학자 미첼 헤스먼은 무려 1900장의 문서에 인생의 무의미함을 남겨 놓고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에서 자살했다. 그의 자살은 모든 다양한 시도에도 결국 의미를 찾지 못하는 패배자의 자살이라기보다, 차근 차근 쌓아올린 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도달한 귀납적 결론이라는 편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때문에 저자는 이를 종교적 이유를 갖고 분신하는 베트남 승려의 모습에 가깝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저자는 과연 그의 말처럼 인생이란 무의미한 것이며 자살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허무한 것인지 철학적으로 밝히고자 했다.

 

무의미를 가장 설득력 있고 일관되게 주장했던 작가는 '카뮈'이다. 그의 글들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허무주의의 제1명제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점에 비하면, 카뮈의 삶이 무척 가치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는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문학사에 길이 남았으며, 레지스탕스 운동 등으로 신념을 위했고, 미모의 여배우들과의 관계에서도 큰 행복을 맛보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허무주의의 대표적인 카뮈의 작품 '시지프스의 신화'를 분석해본다. 알려진 바와 같이 고린도의 왕이었던 시지프스는 신들을 노하게 한 어떤 죄로 인해 매일같이 큰 바위를 정상까지 올리는 벌을 받는다. 정상에 다다르면 그 바위는 다시 시작점으로 내려가고 시지프스는 다시 이 일을 반복한다. 이는 흡사 지금 우리의 삶과 거의 일치한다고도 보여진다. 그렇다면 시지프스의 삶이 무의미 한 것이라면 우리의 삶 또한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의 저서 '선과 악'의 마지막 장에서 시지프스 신화를 다룬 부분을 통해 이 신화를 분석한다. 사람들은 시지프스의 노동이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어려움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체만한 바위가 아니라 주먹만한 돌을 정상으로 옮기는 것이라면 괜찮아져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시지프스의 고통은 경감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의 고통의 근원이 노동의 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 노동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은 공허함에서 나온다.

 

시지프의 과제가 주는 공포는, 그것이 쉽건 어렵건 간에 시지프스가 실패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제에 아예 성공이라 간주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우주에서 철학하기 p.40)

 

설사 신들이 노동의 과정에서 시지프스가 기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해도 그는 아무 의미없는 행위에 행복을 느낀 채 맹목적 노동을 반복하는 퇴행 환자 같은 인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욕구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는 더욱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주관적 의미가 아닌 객관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어떨까. 돌을 굴리는 행위가 하나의 신전을 건설해 나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상상해보는 식이다. 이 과정은 조금 달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세월의 풍화에 의해 사라지는 것은 돌이 떨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사 신전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리에는 영원한 권태가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의미로의 귀결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가치나 목적을 갖고 행위를 할 때를 생각해 보자. 아무리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 할 지라도 일년, 십 년이 지나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해진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한 맥락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행위를 하는 당시에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사실 중요한 것은 행위를 할 당시의 감정일 뿐이다. 무의미 하다는 것은 시선을 외부로 향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태를 내부의 시선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 지금의 시점이 아니라 먼 훗날의 시점에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우주의 관점에서, 유한의 관점이 아니라 무한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에만 발생하다는 사실이다. (p.62)

 

결국 허무주의의 근간에는 외부의 관점을 내부의 시선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매미 유충이 17년 동안 기다린다는 사실을 하찮게 여길지라도 매미 유충에게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생존의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달성하려는 신념이나 목표도 사회전체, 국가전체로 볼 때 나아가 지구 전체로 볼 땐 지나치게 무의미한 행위인 것이다. 결국 우리 관점이 어디에서 존재하느냐는 허무주의 극복의 중요한 키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인생이 의미를 갖기 위해 객관적 가치 생산을 위한 주관적 만족이 가능해야 한다. 말초적인 욕망이나 단순한 행복감이 아닌 객관적 가치를 지니는 행위를 통해 존재완성의 과정은 달성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잭슨 폴록의 'NO 5'로 인공지능 로봇을 다룬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도 등장한 그림이다.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물감 뿌리기면서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만약 마지막 결과를 예상하고 무의미함에 비중을 두었다면 그는 한 부분도 완성하지 못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알기 전에는 이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결국 그는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의미를 갖는 인생이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 그려진 그림이든 애착을 갖고 이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삶을 자살로 마무리한 톨스토이도 있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삶에서 생의 존재를 발견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저자가 카뮈에게 안녕을 고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알고 깨닫는 것에서 결론을 내리기 보다, 삶 이면의 무의미를 알면서도 현재의 하루에 충실할 수 있는 자세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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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삶의 '의미'는?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j****w | 2013.01.14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삶의 의미에 대해 처음 생각해 본 것은 언제였을까.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죽는 것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마 초등학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어머니는 당시 웃으면서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삶의 의미와 관련된 질문을 처음으로 던져본 때가 아닌가 한다. &n;
리뷰제목

  삶의 의미에 대해 처음 생각해 본 것은 언제였을까.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죽는 것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마 초등학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어머니는 당시 웃으면서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삶의 의미와 관련된 질문을 처음으로 던져본 때가 아닌가 한다.

  커가면서 교육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여러 책들을 접해봤지만, ‘이것이 삶의 의미다라고 명확히 정의해 놓은 것은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각각의 삶이 모두 의미 있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을 뿐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정의해 본다는 것은 상당히 막연하고 생소한 일이었다. 교과서를 통해 접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삶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굿바이 카뮈라는 책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철학과를 전공한 저자는 본디 철학과에서는 인생의 의미를 다루지 않는다는 허무한 답변을 얻은 뒤, 여러 영미철학계의 연구들을 참고하여 본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삶의 의미에 대해 알 듯 말 듯한 모호한 대답으로 마무리하거나, 인생의 의미는 개인이 각자 깨닫는 것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결론을 피하고자 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이 굿바이 카뮈라는 작품이라고 한다.

  삶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한 논리적 여정은 그 반대쪽 극단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삶의 무의미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시지프스의 신화가 어찌하여 무의미한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며, 이 과정에서 그는 의미 있는 삶의 프레임으로 주관적 만족의 여부와 객관적 가치의 생산 여부라는 두 가지 요인을 제시한다. 끝없이 제자리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삶도 만일 스스로가 그 일로 인해 행복해 하고(주관적 만족), 힘들게 올린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멋진 신전으로 재탄생함으로써 객관적 가치를 생산해 낸다면 그렇게 무의미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시지프스가 연구를 통해 돌을 더 잘 굴려 올리는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점점 성장한다면 어떨까? 또한 시지프스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격려해줄 사회적 관계망이 존재한다면?

  무의미하게만 여겨졌던 시지프스의 삶에 의미를 찾아주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주관적 만족과 객관적 가치의 확대재생산을 통한 존재의 완성이라는 삶의 의미 체계를 설립한다.

 

  개인적으로 위에 제시된 삶의 의미 체계가 많은 형태의 삶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4년간 공부해 왔던 전기공학이라는 학문을 포기하고 치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선택하게 되었다. 기존의 전공이 적성에도 맞지 않아 많은 괴로움을 느꼈던(주관적 만족의 부재) 상황에서 50대까지 뻔히 보이는, 그것도 밝지 않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 이런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한 어떤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객관적 가치 생산의 어려움). 스스로가 한계에 부딪히자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나는 사람을 대하는 일을 좋아하며(주관적 만족), 그런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객관적 가치의 생산) 길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종합하여 찾아낸 길이 치의학이라는 새로운 전공이었고, 보다 적성에 맞는 일을 통해 보람을 찾고 있는 요즘은 예전에 비해 하루하루가 보다 열정적이고 행복함을 느낀다.

  뒤늦게나마 주관적 만족을 느끼며 객관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냄으로써 청소년기에 미처 이루지 못한 자아실현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물론 이를 두고 감히 완벽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또한 가끔은 삶의 고뇌와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낄 때도 많지만, 충분히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목적한 바를 이루고, 그 목적한 바가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이며, 거기에 더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적 가치를 생산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의미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것은 막연한 뜬구름 같은 것이 아니라, 충분히 정의하고 그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지표를 제시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을 의미 있는 삶의 길로 이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시발점이 되어준 작품 굿바이 카뮈와 작가 이 윤에게 경의를 표한다.

 

 

 

  ‘무의미는 결코 세계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다. 어떤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태를 내부의 시선

  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 지금의 시점이 아니라 먼 훗날의 시점에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우주의

  관점에서, 유한의 관점이 아니라 무한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에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본문 61p 중에서

 

  ‘만일 영원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부조리라는 현상 자체도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본문 85p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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