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2년 01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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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24쪽 | 356g | 143*208*20mm |
ISBN13 | 9788992168830 |
ISBN10 | 8992168837 |
발행일 | 2012년 01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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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24쪽 | 356g | 143*208*20mm |
ISBN13 | 9788992168830 |
ISBN10 | 8992168837 |
프롤로그 1. 인생은 과연 무의미할까? 1. 카뮈 _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2. 시지프스 _ 원초적 무의미 3. 시지프스의 삶 VS 인간의 삶 4. 시지프스의 삶이 무의미한 이유는? 2. 시지프스 구하기 1. 객관적 가치 2. 주관적 만족 3. 생명의 풍경 _ 삶의 의미는 삶 자체일까? 4. 사라진다는 것 5. 영원한 권태 6. 본능의 시지프스 7. 욕구의 주체성 3. 무엇이 삶의 의미인가? 1. 영원한 무의미 2. 냉동인간과 마크로풀로스 3. 벌레의 관점, 인간의 관점, 우주적 관점 4. 내부의 관점과 외부의 관점 5. 부조리에 대응하는 자세 _ 아이러니 6. 아이러니의 전략 7. 천국과 지옥 4. 더 커다란 의미를 위하여 1. 객관적 가치를 통한 주관적 만족 2. 변화와 성장 3. 시지프스 VS 라인홀트 메스너 4. 자기완성 5. 시지프스에게 사회가 있다면? 6. 우리 모두는 시지프스다 _ 공동체 7. 자아실현에서 존재의 완성으로 5. 의미와 무의미를 넘어서 1. 인생의 의미를 묻는 까닭은? 2. 의미의 세 단계 3. 의미의 의미 4. 죽음 뒤에 남는 것 5. 한계의 초월 6. 의미와 가치 7. 의미의 북극 _ 무한을 향해 8. 인생은 정말 무의미할까? 9. 무의미한 삶이란? 맺음말 후기 해제 : 굿바이 카뮈, 굿바이 청춘 - 이현우(로쟈) |
인생이 살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삶의 모퉁이마다 불쑥 불쑥 나타난다. 설사 인생을 걸었을만한 숭고한 가치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도 달성된 후의 허무감은 피해갈 수 없다. 하물며, 객관적 가치라곤 만들어 내지 못하는 여타의 삶이란 또 어떠하겠는가. 철학자 미첼 헤스먼은 무려 1900장의 문서에 인생의 무의미함을 남겨 놓고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에서 자살했다. 그의 자살은 모든 다양한 시도에도 결국 의미를 찾지 못하는 패배자의 자살이라기보다, 차근 차근 쌓아올린 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도달한 귀납적 결론이라는 편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때문에 저자는 이를 종교적 이유를 갖고 분신하는 베트남 승려의 모습에 가깝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저자는 과연 그의 말처럼 인생이란 무의미한 것이며 자살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허무한 것인지 철학적으로 밝히고자 했다. 무의미를 가장 설득력 있고 일관되게 주장했던 작가는 '카뮈'이다. 그의 글들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허무주의의 제1명제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점에 비하면, 카뮈의 삶이 무척 가치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는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문학사에 길이 남았으며, 레지스탕스 운동 등으로 신념을 위했고, 미모의 여배우들과의 관계에서도 큰 행복을 맛보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허무주의의 대표적인 카뮈의 작품 '시지프스의 신화'를 분석해본다. 알려진 바와 같이 고린도의 왕이었던 시지프스는 신들을 노하게 한 어떤 죄로 인해 매일같이 큰 바위를 정상까지 올리는 벌을 받는다. 정상에 다다르면 그 바위는 다시 시작점으로 내려가고 시지프스는 다시 이 일을 반복한다. 이는 흡사 지금 우리의 삶과 거의 일치한다고도 보여진다. 그렇다면 시지프스의 삶이 무의미 한 것이라면 우리의 삶 또한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의 저서 '선과 악'의 마지막 장에서 시지프스 신화를 다룬 부분을 통해 이 신화를 분석한다. 사람들은 시지프스의 노동이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어려움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체만한 바위가 아니라 주먹만한 돌을 정상으로 옮기는 것이라면 괜찮아져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시지프스의 고통은 경감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의 고통의 근원이 노동의 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 노동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은 공허함에서 나온다.
설사 신들이 노동의 과정에서 시지프스가 기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해도 그는 아무 의미없는 행위에 행복을 느낀 채 맹목적 노동을 반복하는 퇴행 환자 같은 인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욕구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는 더욱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주관적 의미가 아닌 객관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어떨까. 돌을 굴리는 행위가 하나의 신전을 건설해 나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상상해보는 식이다. 이 과정은 조금 달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세월의 풍화에 의해 사라지는 것은 돌이 떨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사 신전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리에는 영원한 권태가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의미로의 귀결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가치나 목적을 갖고 행위를 할 때를 생각해 보자. 아무리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 할 지라도 일년, 십 년이 지나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해진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한 맥락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행위를 하는 당시에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사실 중요한 것은 행위를 할 당시의 감정일 뿐이다. 무의미 하다는 것은 시선을 외부로 향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허무주의의 근간에는 외부의 관점을 내부의 시선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매미 유충이 17년 동안 기다린다는 사실을 하찮게 여길지라도 매미 유충에게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생존의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달성하려는 신념이나 목표도 사회전체, 국가전체로 볼 때 나아가 지구 전체로 볼 땐 지나치게 무의미한 행위인 것이다. 결국 우리 관점이 어디에서 존재하느냐는 허무주의 극복의 중요한 키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인생이 의미를 갖기 위해 객관적 가치 생산을 위한 주관적 만족이 가능해야 한다. 말초적인 욕망이나 단순한 행복감이 아닌 객관적 가치를 지니는 행위를 통해 존재완성의 과정은 달성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잭슨 폴록의 'NO 5'로 인공지능 로봇을 다룬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도 등장한 그림이다.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물감 뿌리기면서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만약 마지막 결과를 예상하고 무의미함에 비중을 두었다면 그는 한 부분도 완성하지 못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알기 전에는 이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결국 그는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의미를 갖는 인생이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 그려진 그림이든 애착을 갖고 이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삶을 자살로 마무리한 톨스토이도 있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삶에서 생의 존재를 발견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저자가 카뮈에게 안녕을 고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알고 깨닫는 것에서 결론을 내리기 보다, 삶 이면의 무의미를 알면서도 현재의 하루에 충실할 수 있는 자세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
삶의 의미에 대해 처음 생각해 본 것은 언제였을까.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죽는 것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마 초등학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어머니는 당시 웃으면서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삶의 의미와 관련된 질문을 처음으로 던져본 때가 아닌가 한다.
커가면서 교육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여러 책들을 접해봤지만, ‘이것이 삶의 의미다’라고 명확히 정의해 놓은 것은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각각의 삶이 모두 의미 있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을 뿐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정의해 본다는 것은 상당히 막연하고 생소한 일이었다. 교과서를 통해 접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삶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굿바이 카뮈’라는 책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철학과를 전공한 저자는 본디 철학과에서는 인생의 의미를 다루지 않는다는 허무한 답변을 얻은 뒤, 여러 영미철학계의 연구들을 참고하여 본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삶의 의미에 대해 알 듯 말 듯한 모호한 대답으로 마무리하거나, 인생의 의미는 개인이 각자 깨닫는 것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결론을 피하고자 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이 ‘굿바이 카뮈’ 라는 작품이라고 한다.
삶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한 논리적 여정은 그 반대쪽 극단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삶의 무의미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시지프스의 신화’ 가 어찌하여 무의미한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며, 이 과정에서 그는 의미 있는 삶의 프레임으로 주관적 만족의 여부와 객관적 가치의 생산 여부라는 두 가지 요인을 제시한다. 끝없이 제자리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삶도 만일 스스로가 그 일로 인해 행복해 하고(주관적 만족), 힘들게 올린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멋진 신전으로 재탄생함으로써 객관적 가치를 생산해 낸다면 그렇게 무의미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시지프스가 연구를 통해 돌을 더 잘 굴려 올리는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점점 성장한다면 어떨까? 또한 시지프스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격려해줄 사회적 관계망이 존재한다면?
무의미하게만 여겨졌던 시지프스의 삶에 의미를 찾아주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주관적 만족과 객관적 가치의 확대재생산을 통한 존재의 완성”이라는 삶의 의미 체계를 설립한다.
개인적으로 위에 제시된 삶의 의미 체계가 많은 형태의 삶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4년간 공부해 왔던 전기공학이라는 학문을 포기하고 치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선택하게 되었다. 기존의 전공이 적성에도 맞지 않아 많은 괴로움을 느꼈던(주관적 만족의 부재) 상황에서 50대까지 뻔히 보이는, 그것도 밝지 않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 이런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한 어떤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객관적 가치 생산의 어려움). 스스로가 한계에 부딪히자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나는 사람을 대하는 일을 좋아하며(주관적 만족), 그런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객관적 가치의 생산) 길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종합하여 찾아낸 길이 치의학이라는 새로운 전공이었고, 보다 적성에 맞는 일을 통해 보람을 찾고 있는 요즘은 예전에 비해 하루하루가 보다 열정적이고 행복함을 느낀다.
뒤늦게나마 주관적 만족을 느끼며 객관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냄으로써 청소년기에 미처 이루지 못한 자아실현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물론 이를 두고 감히 완벽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또한 가끔은 삶의 고뇌와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낄 때도 많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목적한 바를 이루고, 그 목적한 바가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이며, 거기에 더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적 가치를 생산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의미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것은 막연한 뜬구름 같은 것이 아니라, 충분히 정의하고 그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지표를 제시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을 의미 있는 삶의 길로 이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시발점이 되어준 작품 ‘굿바이 카뮈’와 작가 이 윤에게 경의를 표한다.
‘무의미는 결코 세계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다. 어떤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태를 내부의 시선
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 지금의 시점이 아니라 먼 훗날의 시점에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우주의
관점에서, 유한의 관점이 아니라 무한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에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본문 61p 중에서>
‘만일 영원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부조리라는 현상 자체도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본문 85p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