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우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도 있게 마련이죠. 남편의 첫 기일, 공원묘지에 갔다 돌아오는 전철역 플랫폼에서 남편과 꼭 닮은 옆모습을 발견하는 일 같은. 용문역 상행선 플랫폼 끄트머리에 선 당신은 까만 양복에 까만 넥타이 차림이었죠. 한 걸음 한 걸음 홀린 듯 다가가다 이목구비의 반쪽 윤곽이 완전해지는 순간 우뚝 멈춰 서고 말았어요. 반듯한 콧날, 윗입술을 포갤 듯 도톰한 아랫입술, 날렵한 턱선. 게다가 무표정 일 때도 움푹 팬 보조개까지. 영락없는 남편이었죠.
--- p.11
“처음 봤을 때부터 단발이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무표정한 얼굴과 덤덤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당신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말했어요.
“처……음……이오?”
내가 조심스레 물었어요.
“아, 오늘 가게에 들어오실 때요.”
당신이 빠르게 말했어요. 특유의 비밀스런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스탠드도 안 켠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은 채로, 살아 꿈틀대는 야행성의 무언가로 보이는 그래프를 서둘러 노트북 화면에 띄우던 순간의 남편처럼. “안 잤어?” 웅얼거리며 어떤 흔적을 지우듯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이던 남편처럼.
--- p.29~30
수혜자 앞에서 기증자의 유족임을 밝히는 게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순간 용기로써 누그러뜨려야 했던 어두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처음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가슴 외진 곳으로 미열처럼 번져가던 불길한 끌림 탓이었는지도. 당신과 나 사이에 남편 얘기는 일종의 판도라 상자였으니까. 맨 밑바닥에 남은 불확실한 희망 하나로 수많은 절망을 견디려는 무모한 마음을 먹게 되는 비극의 씨앗.
--- p.39~40
“필요하면 월차라도 써야죠. 진작부터 뵙고 싶었던 분인데.”
카페로 되돌아올 때부터 예감하고 있던 일이었어요. 그래요. 당신 얘기를 들은 건 한참 전이었죠. 남편이 땅에 묻히고 두 달 뒤, 병원으로부터 수술이 성공적이라는 소식과 함께 피기증자가 만 나봤으면 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내키지 않았어요. 아니, 두려웠어요. 꿈속에서조차 텅 빈 얼굴로 나타나는 남편을 남몰래 품고 살아야 했던 시간, 그 와중에 당신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당신을 만나면 남편은 영원히 텅 빈 얼굴로 남게 될 것 같았으니까.
“실은 용문역에서부터 눈치채고 있었어요.”
--- p.43p
얼굴 기증에 처음부터 찬성한 건 아니었어요.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못했죠. 간이나 콩 팥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의 눈, 코, 입을 기다리는 환자가 있다니.
“안면이오?”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정확히는 각막, 코뼈, 턱뼈, 일부 피부 조직이죠. 같은 얼굴이 될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사람 인상은 눈매가 8할이니까.”
--- p.47
“그 사람 얘기가 왜 그리 궁금해요?”
나도 모르게 따지듯 묻고 말았어요.
나는 제 발소리에 놀란 도둑처럼 움츠러들었지만, 당신은 주저 없이 대답했어요.
“두 번째 삶을 주신 분이니까.”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요. 익숙한 모퉁이 너머에서 새로운 풍경과 맞닥뜨린 것처럼. 길 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과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는 안도. 서로의 동심원 안쪽을 좀먹어 들어가면서도 부추기듯 나란히 커져가는 모순된 두 개의 파문. 두 번째 삶이란 나에게 그런 의미였죠. 또 다른 삶. 남편과 살면서 막연한 공상으로만 품었던 ‘가보지 못한 길’.
--- p.63~64
“궁정의 광대는 바보인 척하지만 왕의 어두운 비밀을 품고 있어. 나 하나 바보 되면 모두 무사 하지만 똑똑하게 굴면 다 죽어. 사람들이 내게서 보는 것은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는 왕의 어둠 속에 있지.”
어느새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있었어요.
광대, 어두운 비밀. 진짜 나.
그러니까 웃음 뒤에 감춰진 진짜 남편의 진실.
어서 자리를 뜨고 싶어졌어요. 조금 더 있다가 는 알고 싶지 않은 그 진실을 듣게 될 것만 같았죠.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결박된 것처럼, 아니, 사자 앞에서 굳어버린 사람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어요.
--- p.80~81
반듯한 사람이었는데. 조문객 입에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바깥 공기라도 한 모금 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어요. 반듯한 사람이 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한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한 잘못? 제일 견디기 힘든 건 실제로 반듯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스스로를 들볶는 질문이 급기야 ‘반듯한 사람으로 죽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라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진저리치며 의연한 미망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죠.
--- p.82
“좌회전해 오는 뺑소니 차량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고객님께서는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꺾으셨어요,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지키려 드는 사람처럼, 틀림없는 팩트입니다. 스키드 마크는 구라를 모르거든요.”
남편은 자살을 기도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동승자를 보호하려 했던 거예요. 4월 1일이라는 특별한 날짜와 관련된 누군가를. 반쪽이 된 차에 서 제 발로 내려온, 의식을 잃은 자신을 구급대원에게 넘기고 자취를 감춘, 설악산에 있어야 할 시간에 엉뚱한 국도를 달리고 있게 만든 누군가를.
--- p.85
당신은 누구인가요?
남편의 얼굴을 한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마음 같아서는 수천, 수만 번이라도 그러고 싶었지만 차마 걸음을 멈추지 못했어요. 대답과 상관없이, 진실의 향방과 무관하게, 묻는 행위만으로도 당신을 잃게 될 테니까. 내가 갈구한 건 진실이지 당신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내 마음속 양팔저울 한쪽 끝에 진실이 올려져 있었다면 나머지 끝에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당신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어요. 곧 드러날 진실이 그 모두를 파괴하는 진실이라 해도 내 앞에 나타난 이후의 당신만큼은 그 진실의 맞은편에 서 있지 않으리라고.
--- p.118
밀려 들어오는 복숭아꽃 향기. 남편의 차는 복숭아꽃 만발한 국도를 달리고 있어요. 남편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입을 떼는 순간 시커먼 무언가가 맹렬한 속도로 다가와요. 진홍빛 복숭아 꽃잎 흩날리며, 무방비로 노출된 인생의 옆구리로 달려들어요. 끔찍한 농담처럼. 마지막 순간 남편이 웃어요. 옆자리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요. 우는 듯 웃는 얼굴, 웃는 듯 우는 얼굴. 말 못 할 비밀을 품고 살아온 자의 비통한 얼굴.
--- p.130~131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냐고요? 액자 속 그림 같은 존재를 향한 호기심이었을지도. 확실한 건 잠깐 빌린 손수건 한 장쯤 간직하고 있어도 미움받지는 않겠구나, 돌려주지 않으면 내 것이 될지도 몰라, 이상한 기대에 사로잡히는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내 인생에는 그 비슷한 것조차 찾아온 적이 없다는 사실.
--- p.133~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