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판타지로 재현한 전쟁의 잔혹상
아랍의 카프카라 불리는 이라크 작가 아흐메드 사다위의 강렬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소설인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에는 폭발이 많이 등장한다. 미군 점령하의 바그다드에서 사람들은 쓰러지고 나뒹굴고 허공으로 날아간다. 때로는 거리에 발 하나, 팔 하나만 남기고, 때로는 기껏 핏빛 안개밖에 없다. 종파간의 폭력이 일상화하고, 차량폭탄 테러는 일상처럼 일어나며, 뉴스속보에도 사람들은 무감각하다.
이 같은 광기 속에 폐품업자 하디가 찰리 채플린 영화 속의 부랑자처럼 등장한다. 넝마주이인 하디는 지극히 단순한 인물이라 돈이 생기면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여유가 있으면 동네 창녀를 부른다. 폐품을 줍던 하디는 어느 날부턴가 폭발에 여기저기 흩어져나간 시체의 부위들을 주워오기 시작한다. 신체의 일부만 남기고 흩어진 다양한 사람들의 부위들을 꿰매는데, 그렇게 해서 온전한 몸을 만들어놓으면 누군가 장례를 치러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뒤바뀐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돌아오니 체액을 질질 흘리던 피조물이 메모 한 장 안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고 환상적인 이야기는 진지하게 나가다가 갑자기 어이없는 웃음이 터진다. 전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처참함 속에서 사다위가 구사하는 블랙유머는 독자의 방심한 틈을 파고든다.
작가는 괴물의 ‘심각한 부패문제’를 파고든다. 괴물은 일련의 살인사건의 용의자다. 정부 당국에서는 그의 외모가 끔찍하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듣고 못생긴 사람들만 골라 잡아들인다. 사다위의 어조는 익살스러우나 그의 의도는 너무도 진지하다. 이 소설은 복잡한 우화이며, 미국 침공 와중에 이라크 부족 간의 잔혹상을 다루고 있다. 특히 아들과 남편을 잃고, 유품을 받고도 그들의 죽음을 부정하며 살아서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성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라크에서는 정말로 죽었다고 믿은 사람이 가끔 돌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 저기 동굴 속에 은신해 있던 사람들이다.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은 야밤에 사람들을 겁주는 괴물 외에도 많은 얘기를 담고 있다. 낡은 건물과 호텔을 두고 갈등을 빚으니 부동산 소설이고, 주인공 기자가 괴물 이야기를 추적하니 저널리즘 소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발사와 호텔 경비병과 점성술사와 영화감독을 만난다. 케밥과 내장요리와 삶은 콩을 먹고 아라크 술을 비운다. 물담배를 피우고 욕정을 해소한다. 사다위는 자신의 소설 속에 수많은 인간사를 우겨넣었다. “이라크의 도시전설 100선”을 꾸리려는 기자도 만나고, 특수정보추적국은 아예 점성술사를 고용해 영력을 이용해 특수범죄를 감시하고, 테러를 예측하기까지 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처럼 사다위의 괴물도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나쁜 존재가 아님을 설명하고자 한다. 무턱대고 살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죽은 자들을 대신한 복수이며 그를 통해 정의를 이루려 한다.
괴물은 인터뷰를 하고 추종자의 말을 빌어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예를 들어, “신체부위의 출신과 배경의 다양하므로(민족, 부족, 인종, 사회계급까지) 나는 과거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불가능한 조합을 상징한다. 고로 이라크의 진정한 제1시민이다” 같은 식이다.
괴물은 복수를 주장하지만 진정한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호하다. 차라리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를 찾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괴물의 살인은 개인에게 국한된다.
괴물은 자신의 사명이 왜곡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처음에는 죄가 있는 사람들만 죽였으나, 신체부위를 교체해야 할 필요성에 이르자, 무고한 사람들도 마구잡이로 살상을 한다. ‘따져보면 죄 없는 자가 어디 있겠어? 지금 당장은 무고하다지만 십 년 전에 아내를 때리거나 어머니를 학대했다면?’
이렇듯 괴물은 사악한 지성을 빛내고, 자신의 파괴적 에너지를 합리화한다. 독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괴물의 논리에 설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다위의 목소리와 상상력은 참신하며, 한 국가의 트라우마를 풀어내는 능력도 아주 독특하다.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끔찍하면서도 일상적인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라크의 비극은 정신적 참사였다. 이 용맹하고 독특한 소설은 그 주제를 잡고 관련 의미들을 모조리 풀어내고자 한다.
번역자의 말 | 조영학
21세기 전쟁의 공포로 되살아난 괴물 ‘프랑켄슈타인’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의 번역 의뢰를 받았을 때 가장 마음 에 들었던 점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단어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나를 포함해 이토록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캐릭터가 프랑켄슈타인 외에 또 있었던가? 나로서는 말 그대로 ‘인생소설’이다! 물론 아흐메드 사다위가 이 작품으로 이라크 사상 최초로 국제아랍소설상을 수상하고, 한강의 『흰』과 함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후보이자, 최종 2인까지 올랐다는 사실도 놓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난 전혀 망설이지 않고 “네, 제가 하고 싶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해석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라면 오히려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이 『프랑켄슈타인』을 능가할 것 같다. 무명씨가 온갖 민족, 부족, 인종, 계급 등 다양한 출신과 배경의 조합인 것만큼이나(신체 부위의 출신과 배경이 다양하므로 나는 과거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불가능한 조합을 상징한다. -본문 중에서) 이 소설 역시 온갖 장르를 조금씩 떼어내 꿰매놓은 것처럼 정체를 규정하기가 어렵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드와이트 가너Dwight Garner는 심지어 이 소설을 두고 공포소설이자 저널리즘소설이라고 했는데, 다소 과장은 있어도 정곡을 찔렀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번역 원고를 받은 출판사의 첫 반응은 “재미있다”였다. 내 생각도 그렇다. 지루한 내용이면 번역을 하는 내내 한숨을 쉬거나 딴짓을 했을 텐데 이 소설만큼은 오히려 빡빡한 마감 일정을 앞당기기까지 했다. 당연히 작가 사다위의 독특한 서술방식과 스타일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그 구분마저 모호하게 만 드는 능청스러움이 읽는 이의 혼을 빼놓을 만하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 폐품업자 하디를 닮았다. 헛소리에 구체적인 조 미료를 더해, 관객들로 하여금 허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귀를 기울 이게 만드니 왜 아니겠는가. 또 하나의 이유를 짐작하자면 전쟁 당시 이라크의 모습이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닮았기 때문이리라. 미군정과 6.25 전쟁을 거쳐 군부독재까지, 무법과 폭력이 판치던 역사 속에서 우리 민초들이 겪었을 분노와 무기력과 체념이 이 소설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만 한편으로 바로 그 아픈 역사가 아흐메드 사다위라는 이라크 사상 최고의 소설가를 낳았을 터이니 그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