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의 머리가 황갈색 낙엽 더미 위에 놓여 있었다. 아몬드 모양의 눈은 차양처럼 우거진 단풍나무와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어둠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근처에서는 핏기 없는 손이 도움을 청하려는 듯 고개를 내밀었지만, 시신의 나머지 부분은 손이 닿지 않는 숲속 은밀한 곳에 여기저기 숨겨져 있었다.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손가락을 떨며 소녀의 머리칼을 가만히 어루만지고 차가운 뺨을 쓰다듬은 다음 머리를 들어서 너덜너덜하게 찢긴 목에 들러붙은 몇 장의 낙엽을 털고, 분필 조각이 몇 개 들어 있는 배낭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리고 손을 넣어 그녀의 눈을 감긴 다음 지퍼를 잠그고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들고 사라졌다. ---「프롤로그」중에서
맨 처음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겠지만. 문제는 뭔가 하면 맨 처음이 정확히 언제인지 우리 모두 의견이 엇갈린다는 것이었다. 뚱뚱이 개브가 생일선물로 분필이 담긴 통을 받았을 때일까? 우리가 분필로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일까 아니면 초크맨이 저절로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일까?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일까? 아니면 첫 번째 시신이 발견됐을 때일까? --- p.11
“초크맨을 조심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난들 알겠냐?” 그는 내 쪽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난들 여기 찾아오고 싶었겠냐? 난들 죽고 싶었겠어? 난들 이런 썩은 내를 풍기고 싶었겠어?” 그는 관절에 이상하게 매달린 팔로 나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이제 보니 팔이 관절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니었다. 어깻죽지를 뚫고 나왔다. 하얀 뼈가 흐릿한 달빛을 받고 번뜩였다. “내가 여기 찾아온 이유는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고요?” “네 잘못이거든, 똥바가지야. 이게 다 너 때문에 시작된 일이야.” --- p.146
내가 요즘 듣는 노래가 있다. 클로이가 하도 틀어서 비교적 견딜 수 있게 된, 프랭크 터너라는 포크 겸 펑크 가수의 노래다. 후렴구에 저지르지 않은 일로 기억되는 사람은 없다는 가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게 백 퍼센트 맞는 말은 아니다. 내 인생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 내가 하지 않은 말에 의해 결정되어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누락되었는가가 우리를 규정한다. 거짓말이 아니라 밝히지 않은 진실이 우리를 규정한다. --- p.212~213
우리는 스스로 해답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건 정답이다. 그게 인간의 천성이다. 우리는 원하는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질문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뭔가 하면 진실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그냥 진실인 습성이 있다. 우리는 그걸 믿느냐 믿지 않느냐만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 p.242
그는 어쩐지 달라 보였다. 전부터 말랐지만 지금은 수척해 보일 정도였다. 그게 인간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얼굴은 전보다 더 핼쑥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청바지에 받쳐 입은 검은색 티셔츠 밖으로 근육질의 팔이 드러났다. 반투명한 피부와 놀라운 대조를 이루는 푸르스름한 혈관 말고는 전부 하얬다. 그날, 그는 인간이 아니라 무슨 이상한 존재처럼 보였다. 꼭 초크맨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