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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랑 기계

불쌍한 사랑 기계

: 1997년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199이동
리뷰 총점9.0 리뷰 3건 | 판매지수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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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07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58쪽 | 128*205*20mm
ISBN13 9788932009155
ISBN10 893200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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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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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세필을 흔들어
자꾸만 가는 선을 내리긋듯이
그어서 뭉그러지려는 몸을
자꾸만 일으켜 세우듯이
뭉개진 몸은 지워졌다가
또다시 뭉개지네

카페 펄프의 의자는 욕조처럼 좁고
저 사람은 마치 물고기 흉내를 내는 것같아
입술 밖으로 퐁퐁 담배 연기를 내뽐고 있네
저사람은 마치
비 맞은 개처럼 욕조마다 붙은
전화기를 붙잡고 혼자 짖고 있네
전화기는 붉은 낙태아처럼 말이 없고
나 전화기를 치마 속에 감추고 싶네

나는 내 앞에 있으면 좋을 사람에게 말을 거네
-- 한번만 다시 생각해봐요
더러운 걸레같은 내 혀로
있으면 좋을 그 사람의 젖은 머리를 닦네

탐조등은 한번씩 우리 머리를 쓰다듬고
나는 이제 몽유병자처럼 두 손을 쳐들고
물로 만든 철조망을 향해 걸러나가네
쇠줄에 묶인 개처럼 저 불쌍한 사랑기계들

아직도 짖고 있네 .
--- p.136
햇빛 속에 늙은 여자 호박 하나 걸어간다
호박 속으로 한 사람이 들어온다
그 사람이 호박 속을 홍두깨로 민다
노랗고 붉은 섬유질의 방이 천지 사방으로 넓어진다
그 사이로 포크레인이 한 대 아른아른 지나간다
여름 한낮이 꿀 넣은 호박 속처럼 짙다

호박 속에는 127개의 씨가 있다
127개의 씨 속에는 127개의 호박이 들어 있다
그 호박들 속에는 다시 127개의 씨가 들어 있다
다시 그 씨 속에는 127×127×127×127개의 호박이 들어있다
머릿속에서 노오란 원자 호박탄이라도 터졌나
누가 내 머릿속 이 끈적거리는 전화선들을 걷어줄건가

김씨가 작두 아래 늙은 호박을 넣고 퍽퍽 쪼갠다
소 여물 줄 거라 한다
호박 속처럼 끈적끈적한 폭염 속
그 호박 속 사람들이 나가지 않는다

127×127×127×127들은 마음대로 들어오는데
나는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퍽 퍽 쪼개어 내 소에게 여물 먹일 수도 없다
호박이 속 검은 씨들을 악물고 막무가내 익어간다
--- p.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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