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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 양장, 개정판 ]
허수경 | 난다 | 2018년 08월 08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3 리뷰 30건 | 판매지수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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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8월 08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382g | 124*188*30mm
ISBN13 9791188862160
ISBN10 118886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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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마당에 서 있으면 흰 꽃들이 보인다. 어둠 속에서 꽃은 희게 빛난다. 문득 하늘을 본다. 하늘길 위를 비행기가 엉금엉금 걸어가고 있다. 하늘이 길인 것이다. 땅만큼 길인 것이다. 언젠가 하늘길을 다시 밟을 때 어둠 속에서 이 흰 꽃들을 다시 보았으면 좋겠다. 사무치는 빛. 그러면 하늘길을 돌아 지상의 길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기에…… 하늘에 묻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늘길, 지상길」중에서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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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시집을 통째로 외우고 다녔다. 그러나 ‘스승’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빈 바람처럼 쓸리던 마음이 어느새 다다라 문을 두드리면, ‘왔어!’ 하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 문을 열어주는 시.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몫의 술잔을 비우는 시. 그것으로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종교이고 한 편의 시가 어떤 마음에게 신앙이라는 것을 알려준, ‘사원’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는 한 사람이 자라 성인이 되고 가족을 이루고 한 세대를 완성하고는, 그저 저녁을 보고 있어도 좋을 만큼의 시간을 먼 마을에서 보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여기서도 거기서도 서로를 그리워했던 시간. 모든 일들을 꿈으로 돌려놓아도 좋을 시간. 기어이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을 말이다. 나는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사원’의 오랜 예배였던 그 ‘시간’을 이 책에서 만난다. 이런 기억과 함께.

어느 여름날, 그는 바닥까지 끌리는 긴 우산을 한쪽 팔에 걸고서 뮌스터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우리는 바빌론의 폐허에서 발굴한 ‘진흙개’의 기록이 남아 있을 연구실 창문을 함께 올려다보았고, 아픈 날 벗들의 이름을 앉혀놓고 혼자 밥을 먹었다는 중국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며 토끼가 자주 출몰했다는 기숙사를 멀찌감치 지나치기도 했다. 마치 모든 이유가 그 이름을 모국어로 불러주기 위함이라는 듯, 마당에 심어놓은 고향의 꽃과 채소들 앞에 나를 세워놓았던 저녁. 그리고 어둠 속으로 퇴화해가는 존재를 이야기했던 밤. 아침엔 가는 길에 먹으라며 새벽부터 만 김밥이 식탁 위에 동그랗게 올려져 있었다. ‘늙은 산들의 마을’을 떠나올 때, 밀밭에서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까마귀떼는 검은 물방울처럼 보이기도 했다.
- 신용목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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