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의 탄생
1950년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의 제안으로, 이듬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석탄 및 철광석 채굴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출범시켰다. ECSC는 유럽 안의 관련 산업을 관장하는 독립된 정부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이처럼 부분적이지만 통합을 추진한 ECSC의 성공은 또 다른 분야의 통합을 자극했다. 그 결과는 1958년 유럽원자력공동체의 설립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출범한 유럽경제공동체는 유럽 통합으로 가는 물꼬를 텄다. EEC는 관세 동맹을 통해 회원국들 사이에 상품, 자본, 노동 등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한편, 회원국 이외의 국가에 대해서는 공동 관세를 매겼다. 출범 초기 5년 동안 EEC는 6개 회원국의 국민총생산을 20퍼센트 이상 성장시키는 경제 효과를 발휘했다.
EEC의 성장에 놀란 영국은 1960년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스웨덴 등과 함께 새로운 경제 블록인 유럽자유무역연합을 만들었다. EFTA는 관세 적용을 EEC처럼 공동이 아닌, 회원국의 자율 결정에 맡겼다. 바야흐로 유럽은 EEC와 EFTA 등 두 경제 블록이 경쟁하는 체제가 되었는데, 결속력이 강한 EEC가 좀 더 우세했다. 그 때문에 1961년 EFTA의 주도국인 영국이 EEC에 가입을 신청했다. EEC의 주도권을 영국에 빼앗길 수도 있다고 우려한 프랑스 대통령 드골의 반대로 영국의 가입 신청은 반려되었다.
이에 영국은 1967년 또다시 EEC에 가입을 신청했다. 역시나 드골의 반대로 가입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1969년 프랑스 대통령이 드골에서 조르주 퐁피두로 바뀌면서 영국은 덴마크, 아일랜드 등과 함께 1973년 EEC의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1967년 EEC, ECSC, EURATOM 등 3대 경제기구는 집행부의 통합을 결의한 바 있었다. 그 결과로 생겨난 기구가 유럽 공동체인데, 여기에는 1973년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 1981년 그리스, 1986년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추가로 가입했다.
1991년, EC의 회원국 정상들이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EC를 확대 개편한 유럽연합의 결성을 결의했다. 유럽의 경제적 통합을 넘어 정치, 군사적 통합까지 내다본 EU의 출범을 위해 EC 회원국들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수용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덴마크의 경우 재투표까지 가는 진통 끝에 조약을 수용하여 1993년 11월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분야를 하나로 통합하는 거대 국가인 EU가 탄생했다.
이후 회원국이 속속 추가된 EU는 2002년 공동 화폐인 유로가 통용되기 시작했으며, 2004년 EU의 국회라 할 수 있는 유럽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2009년 회원국 정상들이 참여해 역내의 주요한 정치 및 제도적 사안을 결정하는 EU 정상회의가 가동되었다. 2016년 EU 회원국의 수는 28개국인데, 6월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를 결정하면서 관련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EU의 역내 인구는 약 5억 1,000만 명이고, 국내총생산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16조 4,000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통합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한편으로,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EU의 성장을 저해하는 변화들도 조성되었다. 우선 동유럽 국가들이 EU에 대거 가입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값싼 동유럽 노동력의 서유럽 진입을 촉진시켰다. 그에 따라 서유럽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었고, 동유럽의 경우는 자국의 우수 인력들이 서유럽으로 빠져나가 경제 발전에 차질을 겪게 되었다.
다음으로 회원국들 사이에 경제적 격차가 크고 주력 산업도 제각각인 상황에서 시행된 유로화의 통용은 환율에 따른 빈부 격차 심화라는 문제를 낳았다. 이런 와중에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세계 경제 침체가 유럽을 직격했다.
이때 국가 부채가 높고 재정 상태가 부실했던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등 이른바 유럽의 돼지들에 속한 나라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특히 그리스는 2010년 EU와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등 국가 부도 위기 상황에 내몰리기도 했다.
경제 악화로 EU 체제의 여러 단점들이 부각되면서 정치적 우경화가 심화되고, EU 결성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들이 조성되었다. 2016년 이른바 영국의 브렉시트로 현실화된 EU 탈퇴는 연쇄적인 추가 탈퇴의 우려를 고조시켰다. 이러한 우려를 씻어 내려는 EU 내부의 노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 행보가 보다 진전된 통합으로 갈지, 혹은 분열로 갈지 여부에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팍스 로마나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자신과 불화하던 황후 도미티아의 심복에게 살해되었다. 사건에 은밀히 가담해 온 원로원은 재빠르게 혼란을 수습했고, 소속 의원이었던 네르바를 황제로 추대했다. 네르바의 제위 기간은 겨우 3년에 불과했지만, 제국의 황제권을 안정적으로 승계시킬 수 있는 질서를 만들었다. 즉, 권력 투쟁과 내란을 초래할 수 있는 황제 세습제를 버리는 대신,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삼아 미리 후계자로 선포하는 선양의 방식이었다.
98년, 후임 황제가 네르바의 권력을 승계하면서 시작된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로마의 정치는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다. 네르바를 포함한 다섯 명의 황제들이 선양으로 통치권을 이어 가던 이른바 5현제 시대 때, 로마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서 번영과 평화를 누렸다.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해당 시기는 96년부터 180년까지 지속되었고,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로마의 전성기로 꼽힌다.
한니발의 활약과 스키피오의 반격
기원전 219년, 카르타고의 장수로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고 있던 한니발은 로마 원정길에 나섰다. 5만여 명의 대군과 코끼리 부대가 그를 따랐다. 타깃이 된 로마가 바다를 주시하고 있는 동안, 한니발의 군대는 육로를 통해 로마로 접근해 갔다.
행군은 몇 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피레네산맥을 넘고 다시 알프스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한니발은 병사의 절반을 잃었다. 하지만 로마에 적대적인 켈트족 용병의 합류로 병력은 다시 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탈리아 땅에 들어선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군을 속속 무찔렀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의 여신은 확실히 카르타고 편이었다. 침략자들을 막으려던 당시 로마의 집정관 플라미니우스조차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정도로 원정군의 공세는 매서웠다.
연전연승을 거둔 한니발의 용병술이 결정적으로 빛을 발한 것은 기원전 216년 벌어진 칸나이 전투였다. 이탈리아 남부에 자리한 칸나이 지방에서 한니발은 8만 명에 달하는 로마 대군을 상대로 초승달 전법을 사용했다. 좌우로 띠처럼 길게 늘어선 부대의 중앙에는 약한 병사들을, 좌우 날개 쪽에는 강한 기병들을 배치해, 공격해 들어오는 적들을 중앙에서 받아내는 동안 기병들이 날개를 펴서 감싸듯이 재빠르게 적들을 포위하는 방식이었다.
위에서 굽어보면 마치 초승달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 전법에 말려든 로마군은 7만 명이 죽고 1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참전한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도 거의 죽고, 사령관 테렌티우스는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때 한니발의 부하는 6,000명 정도가 전사했다.
칸나이의 압승 이후로도 한니발의 원정군은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로마군과 싸웠는데, 전투에는 이겼어도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이탈리아에서 체류하는 10년 동안 원정군은 서서히 지쳐 간 반면, 로마군은 한니발의 전법을 연구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모색했다. 로마의 반격을 이끈 선봉장은 스키피오였다. 스키피오의 등장과 함께 승리의 여신은 변덕을 부려 로마를 편들기 시작했다. 기원전 211년 히스파니아 원정을 결행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을 격파함으로써 이탈리아의 한니발을 지원할 수 없게 만들었다. 기원전 205년에는 집정관으로서 카르타고 원정에 나서, 한니발이 본국으로 돌아오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기원전 202년 카르타고 인근 자마 평원에서 적진의 코끼리를 소음으로 놀래어 난동을 부리게 하는 전법으로 한니발을 꺾었다.
이로써 2차전에서도 승리를 거둔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히스파니아를 비롯한 모든 식민지를 넘겨받았다. 로마의 속주로 전락한 카르타고는 50년 동안 거액의 전쟁 보상금을 갚아야 했다. 이런 와중에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한니발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로마군에 쫓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50년 동안 갚아야 할 전쟁 보상금을 10년 만에 갚아 버렸다. 카르타고의 저력에 놀란 로마는 후환을 없앨 요량으로 북아프리카의 소국 누미디아를 부추겨 카르타고를 침략하게 만들었다. 당시 로마의 허락 없이 전쟁을 할 수 없었던 카르타고는 참다 참다 반격에 나섰는데, 로마는 이를 빌미삼아 기원전 149년에 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카르타고는 결사 항전했지만, 비대칭인 전력으로 로마 원정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도시는 불길 속에 휩싸였고, 살아남은 카르타고인은 모두 노예로 팔려 나갔다. 로마와 치른 마지막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기원전 146년 지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