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 그곳의 작고 따뜻한 도시들
후쿠오카에서 혈관처럼 뻗어 나간 기찻길을 따라 놓인 한적한 도시들. 벳푸, 유후인에서 온천을 하고 하우스텐보스, 아프리칸 사파리 같은 이색적인 관광지를 구경하기도 하고, 나가사키에서 아시아의 근대와 한국의 근현대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요새는 우레시노, 다케오, 히라도의 올레 코스로 걷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여행을 하기도, 더러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서 태어났고, 또 어떤 사람은 그곳에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히라도섬에서 자라 서울에서 가정을 꾸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울에서 자라 규슈 시골 마을을 거쳐 온천 도시 벳푸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벳푸에 엄마의 지친 한 해를 위로하고자 여행을 온 딸이 찾아오고, 모녀의 다음 목적지인 유후인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 보기로 한 두 친구도 있습니다. 그 자전거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후쿠오카 오호리 공원에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여행을 떠나온 한 여자가 앉아 있습니다. 그녀가 방금 다녀온 서점에는 명색이 출장이지만 할 일은 맥주를 마시는 것뿐인 두 남자가 서성이고 있고, 애초 면세품을 사는 게 목적이었기에 비행시간이 가장 짧은 후쿠오카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일곱 편의 규슈 단편은 하나의 도시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서로에 관해 알지 못하고 만난 적도 없으며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삶의 한 꺼풀 아래에는 서로를 향한 공감, 배려, 애정 같은 것들이 있어서 모두의 발밑을 조용히 지지해 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조용한 지지가 누군가에겐 부부나 모녀의 형태로, 누군가에겐 직장 동료나 친구, 반대로 그 관계에서 떨어져 나오려는 개인의 형태로 드러나지만, 결국 이 모든 건 우리가 반드시 어딘가에 속해 있고 또한 서로 엮여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기억이 겹치는 장소, 추억이 얽히는 장소로서 규슈가 있다면 그 안에서 일었다 사라지는 감성 안에는 가족이 있습니다.
단편들
단편 하나,
스즈키 경차가 홀연 멈춰 선 시골 마을 어느 오래된 저택. 들고양이처럼 자라는 스코틀랜드 혈통의 고양이, 자연농을 배우는 남편, 무심한 듯 싹싹한 시골 할머니들. 일본 농촌 공동체 속에서의 신혼은 파란만장하지는 않아도 신경 쓸 건 많습니다. 부부란, 마을이란, 공동체란, 그리고 한국도 아닌 외국 시골에서 살아간다는 건 또 무얼지.
단편 둘,
규슈의 서쪽 끝 히라도섬에서 나고 자란 필자는 13년 전 규슈를 떠나 서울에 정착합니다.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지자 히라도의 너른 들판, 바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지나온 가족에서 지금의 가족으로 이어지는, 나에게서 나에게로 닿는 연결고리. 우리는 어떻게 이어져 있는 걸까요?
단편 셋,
7년의 간격을 두고 규슈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동행은 다르지만, 예상치 못한 비, 여행에 대한 판이한 생각, 어쩐지 내내 갈등을 빚던 7년 전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의 후쿠오카와 지금의 후쿠오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그대로일까요? 시간이 흘러도 실수는 되풀이되는 걸까요?
단편 넷,
목표는 가방, 목적지는 면세점. 여행지도 여행도 필요 없다는 두 여자가 후쿠오카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여행의 목적을 다 이뤘다고 생각하면서. 텐진 밤거리의 무엇이 이들을 걷게 하고, 마시게 하고, 애초에 면세품이 아니라 이 도시가 목적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했을까요?
단편 다섯,
휴가는 잡았는데 업무는 늘어나고, 여행 준비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떠나 보기로 합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신사와 절과 공원과 해변에도 가보고. 그렇게 하나둘 목적지가 늘어납니다. 가야 할 곳도, 봐야 할 것도, 먹어 봐야 할 것도 점점 많아집니다. 어째서 다시 바빠지고 말았는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은 불가능한 걸까요?
단편 여섯,
엄마와 떠난 다섯 번째 겨울 여행. 엄마에 의존하는 딸이 엄마의 한 해를 위로해 주겠다며 여행지를 고릅니다. 계획은 딸이 세웠지만 어쩐지 엄마가 딸보다 더 적극적이고 편견 없이, ‘엄마의 여행’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여행지에서 딸은 매 순간 엄마를 발견해 갑니다.
단편 일곱,
새로운 프로젝트의 디자인 시안을 구하겠다며 후쿠오카로 출장 온 두 사람. 나이도 성향도 너무나 다르고 서로에게 호감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 출장이라고 떠나 왔지만 할 일은 없습니다. 그래도 무어라도 해야겠으니 서점과 도서관을 순례하다가 종국엔 대놓고 맥주만 마십니다. 그리고 털어놓는 직업과 인생에 관한 속마음. 이것은 여행일까요, 출장일까요? 이 출장을 마치고 나면 그들의 일, 그리고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브릭스 매거진의 두 번째 <도시 단편>
이 책은 <여행 매거진 BRICKS>에서 발간하는 두 번째 <도시 단편> 시리즈입니다. 브릭스는 “당신의 일상이 우리에겐 여행입니다.” 라는 생각으로 꾸려지는 ‘여행 에세이 매거진’입니다. 여행자들의 여행 후기와 여행자들이 선망하는 해외 도시에서 살고 있는 필자들의 생활상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보통의 일상도 여행만큼 특별하고, 여행은 또 그 나름 언제나 특별하니까요.
브릭스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여행하는 삶과 삶 속의 여행’을 생각합니다. 낯선 장르의 음악과 영화, 처음 맛보는 음식, 누군가의 남다른 생각, 이 모든 것이 여행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6년 『도쿄적 일상』을 발간하며 처음 ‘여행 인문학’이란 장르를 시도해 보았고, 그 기록들은 <도시 단편>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음 시리즈는 연변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교토에 이르는 시인 윤동주의 생애 궤적을 따라가는 『교토단편 ? 동주산책』, 눈이 없는 삿포로는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가 생각하는 『북해도 단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