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즈음,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친구가 나라면 짝지을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했을 두 가지 재료를 활용한 요리를 내놓았다. 정말로 궁금했다. 어떻게 ‘이것이’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지? 그리고 세간에서는 헤스턴 블루멘탈이나 페란 아드리아, 그랜드 애커츠 같은 셰프들이 대담한 궁합이나 놀라운 풍미 조합을 선보이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이 음식에 접근하는 태도에는 풍미들의 연결고리에 관한 훨씬 깊은 이해가 저변에 깔려 있다. 살짝 강박적인 가정 요리사인 나에게는 그런 지식을 연구할 기구나 자원이 없었다. 나에게는 한 가지 맛이 어떻게, 왜 다른 맛과 어울리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적해주는 설명서와 입문서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풍미 사전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일단은 내가 직접 한 권을 엮어보기로 마음먹었다.
--- 「서문」 중에서
[초콜릿과 카다멈]
인형술사가 사용하는 검은 벨벳 커튼 같은 다크 초콜릿은 부드러운 배경이 되어 카다멈 본연의 색을 잘 살린다. 카다멈은 적당한 분량을 사용할 경우 묘한 감귤류와 유칼립투스, 그리고 따뜻한 나무와 꽃 풍미를 살려낼 수 있다. 더없이 평범한 다크 초콜릿에도 간 카다멈을 한 꼬집만 넣으면 고급스러운 맛이 난다.
--- p. 19
[커피와 생강]
17세기 후반 영국의 커피 하우스에서는 블랙커피에 생강, 클로브, 계피, 스피어민트 등의 선택지를 겸비하여 판매했다. 예멘에서는 지금도 커피 겉껍질로 내린 차에 향료 삼아 생강을 더한 음료가 인기를 누린다. 키샤르qishr라고 부르는 조합으로, 황금빛 액체를 작은 잔에 따라 마시면 톡 쏘는 풍미가 느껴져서 곧장 일종의 꿀 케이크인 빈트 알 산bint al sahn을 한 입 베어 물게 된다. 크리스마스 철이면 카페에서 내놓는 우유맛 가득한 진저브레드 음료의 에스프레소 애호가식 변주라고 생각하자.
--- p. 23
[양고기와 살구]
역사를 한참 되짚어 올라가는 조합이다. 13세기에 시작된 바그다드 요리책에서는 ‘살구 맛이 나는’이라는 뜻으로 미쉬미시야mishmishiya라고 불리는 천천히 익힌 양고기와 살구 타진을 선보인다. 양고기와 살구는 둘 다 달콤한 향신료에 잘 어울리며, 양고기가 기름기로 말린 살구의 톡 쏘는 신맛을 끊어주고 살구의 강렬한 단맛이 이미 매우 달콤한 양고기와 향신료, 아몬드에서 훨씬 짭짤하고 가벼우며 고기다운 맛이 나도록 만든다. 한편 사향 풍미가 농후한 살구는 양고기 육수와 계피, 고수, 쿠민을 머금고 통통하게 부풀어서 완성될 즈음에는 너무 느끼하거나 과일 향이 진하지 않게 된다. 비슷한 느낌으로 향신료를 가미한 필라프 또는 다진 말린 살구와 양파, 아몬드, 쌀 또는 쿠스쿠스를 버무려서 양고기를 채우는 식으로 살구와 양고기를 짝지을 수도 있다.
--- p. 69
[송로 버섯과 달걀]
생 송로 버섯을 손에 넣었다면 반드시 달걀과 함께 밀폐용기에 담아 두어야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루 이틀 후 송로 버섯이 기름진 달걀노른자에 향을 주입하고 나면 간단한 오믈렛, 스크램블드 에그, 달걀 프라이 요리를 만든다.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송로 버섯의 풍미를 풀어내고 퍼트리려면 반드시 지방이 필요하며, 특히 버터와 거위 기름을 사용하면 맛있는 결과물이 나온다. 달걀과 함께 낼 때 저민 마늘을 토스트 한 면에 문지르거나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들 때 달걀물을 풀기 전에 그릇 안쪽에 문지르는 등 마늘을 이용해서 송로 버섯의 풍미를 강화하는 요리사도 있다.
--- p. 164
[오이와 장미]
여름다운 허브 풍미를 공유한다. 스코틀랜드 에어셔 지방의 윌리엄 그랜트 앤 손William Grant & Sons에서 수작업으로 소량씩 제조하는 헨드릭스 진Hendrick’s Gin은 원래 잘 어울리는 오이와 장미의 조합을 한층 확장시킨다. 불가리아 장미와 으깬 오이를 더하는 다소 이질적인 방식은 장미 정원에서 오이 샌드위치를 먹는 영국의 고아한 발상에서 일부 영감을 받았다. 다른 식물 재료처럼 증류해서 음료에 넣는 대신, 커리나 스튜를 만들면서 섬세한 허브를 넣을 때처럼 마지막 블렌딩 단계에 더해 풍미를 유지한다. 오이는 헨드릭스 진에 독특한 신선함을, 장미는 연한 단맛을 선사한다.
--- p. 271
[사과와 돼지고기]
사과를 먹인 돼지의 고기는 돼지를 과수원에 풀어두었을 때 얻는 많은 이점 중 고작 하나일 뿐이다. 돼지는 땅에 거름을 주어서 비옥하게 만들고, 알아서 잘 먹으며 건강하게 살찌고, 떨어진 과일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글로스터셔 지방의 올드 스폿 돼지는 사실 과수원 돼지로도 알려져 있으며, 전설에 따르면 검은 반점도 사과로 인한 타박상으로 생긴 멍이라고 한다. 요리에서는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적절하게 구워 돌돌 말린 껍데기가 바삭바삭해진 돼지고기 한 접시에 사과를 곁들이면 커튼 뒤에 숨어 있던 입맛의 창문이 활짝 열린다. 사과 소스를 필요한 양보다 많이 만들자. 훨씬 많이 만들어야 한다. 워낙 다재다능한 재료라 아무리 많아도 절대 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 p. 392
[바나나와 커피]
바노피, 즉 바나나와 토피는 그야말로 세기의 커플이다. 바노피 파이는 페이스트리나 비스킷 바닥에 캐러멜과 저민 바나나, 커피 풍미 크림을 얹어서 만든다. 그러니 바노피 중 ‘offee’ 부분의 어원은 ‘토피’에서 따왔다고도, ‘커피’에서 따왔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나는 패스트리 대신 짭짤한 맥아 풍미로 막 익은 바나나의 신선한 풋내를 잡아주는 다이제스티브 비스킷으로 파이 바닥을 만든다. 커피콩에는 강한 휘발성을 띠며 향긋한 꽃 풍미와 클로브 같은 달콤한 향신료 느낌을 주는 알데히드와 에스테르가 함유되어 있다. 바나나에도 꽃 향과 클로브 성분이 있어서 커피와 잘 어울리는 것이다. 다만 그저 서로의 맛을 빌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자. 커피와 바나나는 머리가 아플 만큼 달콤하고 끈적일 수 있는 파이에 씁쓸하고 새콤한 풍미를 더해 단맛을 잡아준다.
--- p. 407
[복숭아와 바닐라]
20세기로 나아가는 전환기를 맞이한 사회 여성으로서, 본인의 이름을 딴 복숭아 디저트가 없다면 당신은 무명 인사일 뿐이다. 에스코피에는 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위해서 바닐라 시럽에 뭉근하게 익힌 복숭아를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곁들이고 설탕에 절인 제비꽃과 솜사탕을 올린 페체 아글롱peches aiglon을 만들어냈다.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의 모델이자 배우 겸 가수인 블랑슈 당티니에게는 반으로 자른 복숭아를 바닐라 시럽에 뭉근하게 익혀서 알파인 딸기 아이스크림에 얹고 농후한 비살균 크림을 더한 쿠프 당티니coupe d’Antigny가 있다. 에드워드 7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왕비는 껍질 벗긴 복숭아와 키르슈, 마라치노 체리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으며, 나폴레옹 3세의 아내 유진 황후의 이름을 딴 디저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야생 딸기를 장식하고 샴페인 사바용을 함께 낸다. 반으로 가른 복숭아에 체리를 암시하듯이 얹은 과자 쿠페 비너스coupe Venus에 영감을 준 이가 누구인지는 역사가 미처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 p. 414
[고수 씨와 레몬]
해롤드 맥기는 고수 씨에서 레몬과 꽃 느낌이 난다고 한다. 다른 이들은 오렌지에 조금 더 가까운 감귤류 향이라고 표현한다. 어느 쪽이든지 고수 씨는 레몬과 효과적인 궁합을 선보인다. 올리브를 절일 때 종종 같이 사용하며, 생선과도 잘 어울린다. 19세기에는 수시로 계피와 함께 아몬드 밀크나 크림 푸딩에 양념으로 쓰였다.
--- p. 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