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이 두렵다. 너무나도 무섭다.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공포,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한 두려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무서움이 바로 죽음이다. 가급적 죽음에 대해 언급하거나 경험하고 싶지 않다. 모른 채 살고 싶다. 그럴 수가 없다. 문제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몰두한다. 혼자서 멍하니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어느 순간 불현듯 죽음에 대한 공포가 찾아온다. 아직도 멀다면 멀겠지만, 그 순간에 대한 소름이 느껴진다. 가쁜 숨, 무기력한 손짓, 떨리는 목소리, 극심한 고통, 지독한 외로움.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까.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 대단한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삶에 충실히 살았고, 이만큼이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죽음을 어떻게 느낄까. 나도 그런 죽음이 가능할까. “다 이루었다.”고.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p.398” 것은 못 하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갈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는 이런 나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한다. 임사체험이나 영적인 이야기들은 실로 믿기 어렵다. 저자와 같이 ‘호의적인 회의론자’의 입장을 취하더라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나머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100% 공감한다. 너무나도 우리는 거부하고 있다. 반드시 맞이할 일에 대해서, 불신하고 두려워 한다. 그런다고 오지 않을 죽음이 아니다.
나를 돌아본다. 늘 그렇듯 보지 않고 믿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 나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극히 오만하다. 욕심이다. 초조함이다. 내가 무엇을 이루겠다고 그렇게 애쓰는가. 살아감에도 태도가 중요하듯, 죽음에도 태도가 중요하다. 나는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는가.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 p.615”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죽음은 정말 두려운, 무서운 일인가. 저자의 대답에 평안을 얻진 못했지만, 자그마한 실마리를 얻는다. 인빅터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따스히 안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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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있게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주듯 값지게 쓴 인생은 편안한 죽음을 가져다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p.11
‘죽음’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누가 주인공이 되어야 할까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p.84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다른 차원을 이해하려면 알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p.168
우리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체험을 하고 있는 영적인 존재이다. p.201
‘호의적인 회의론자’ ... 새로운 사실에 대해 열려 있는 마음을 갖되 무비판적으로 아무것이나 덥석 믿지는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p.211
진정한 성공이란, 작은(p.397)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랠프 월도 에머슨 p.398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대해 어떤 관심과 예우를 보이느냐는 그 사회의 성숙도를 알려주는 척도다. p.401
어둠이 나를 뒤덮고 있는 밤에도,
온 세상이 탄광 속처럼 캄캄한 이 밤에도,
나는 신들에게 감사합니다.
내게 굴복하지 않는 영혼을 주셨으므로,
잔인한 삶의 질곡 속에 갇혔을 때도
나는 움츠러들거나 소리 내어 울지 않았습니다.
운명이 가혹하게 내 머리를 피투성이로 만들어도
나는 굽히지 않습니다.
이 분노와 눈물의 땅 너머에는
어둠의 공포만이 어른거립니다.
하지만 그 세월이 아무리 나를 위협해도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문이 아무리 굳게 닫혀 있어도,
형벌이 아무리 잔인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니까.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니까.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인빅터스(라틴어로 천하무적, 정복불능)>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을 준비해 나가시기를 p.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