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텍스트에서 출발하지만 텍스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한다. 말하자면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상태,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존재할 뿐인 무정형의 상태에 언어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작가를 일종의 번역가로 볼 수도 있고 번역가를 일종의 작가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어떤 플롯을 한강은 한국어로 번역했고 스미스는 영어로 번역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어느 시점부터 작가와 번역가는 대등한 존재가 된다. ---「번역한다는 것, 번역된다는 것」중에서
번역가들은 자신이 다루는 텍스트를 읽고 또 읽고 다시 읽는다. 일을 하지 않을 때도 끊임없이 그 텍스트를 생각한다. 그 문장에서 작가가 한 말은 무슨 뜻일까? (……)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에 일어나는 간극을 메우기 위해 줄기차게 매달린다. 그래서 번역가는 그 작품의 가장 성실한 독자이자 가장 열렬한 독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번역을 꿈꾸는 이들이 이 말을 고려해준다면 좋겠다. 이 일은 끊임없이 텍스트와 대화를 나누며 읽고 또 읽는 생활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또한 옮길 수 없는 텍스트를 옮기는 일에 비애와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마저도 즐길 경지에 오르면 굉장히 강력한 무기가 생기는 셈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이모든 괴로움과 슬픔을 음미할 준비가 됐다면, 번역의 세계로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름답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 번역」중에서
직역·의역 논쟁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주는 간단한 예로 관용 표현이 있다. ‘핫 포테이토 hot potato ’라는 표현을 맨 처음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까다로운 문제’로 의역할 것인가, ‘뜨거운 감자’로 직역할 것인가? (……) ‘뜨거운 감자’는 단순한 번역어가 아니라 한국어의 관용표현이 되어 우리말에서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그런데 과연 ‘hot potato’와 ‘뜨거운 감자’는 같은 의미(내포)일까? 이런 의견을 생각해보라. “영어권에서는 감자를 뜨거울 때 먹지 않으니 뜨거운 감자는 기피 대상이고 그래서 이런 관용어가 생긴 것입니다. (……) 하지만 한국인들은 뜨거운 감자를 맛있다고 합니다.” 하긴 한국어 ‘뜨거운 감자’는 호호 불면서 먹는 맛있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뜨거운 감자’는 잘못된 번역일까?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뜨거운 감자’를 순수한 한국어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뜨거운 감자’가 영어의 관용 표현임을 아는 사람은(대부분의 사람이 학생 시절 영어 시간에 배워서 알 것이다) ‘뜨거운 감자’의 의미를 한국이 아니라 영어권의 맥락에서 유추해야 함을 안다. 그러니 ‘hot potato’라는 간단한 표현을 직역할지 의역할지조차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직역, 의역 논쟁」중에서
소설 번역가에게는 한 가지 일이 더 있다. 작가가 묘사한 풍경, 사건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옮길 때 단순한 내용 전달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의도까지 읽어내 그것에 가깝게 옮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그 작품의 문장을 이해하고 감상하고 음미까지 해야 한다. 가능하면 작품과 심각한 사랑에 빠져야 한다. (……) 외국 소설은 특히나 이국적인 나라의 도시나 자연의 풍광을 배경으로 할 때가 많다. 나는 먼저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떠올린다.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그때의 날씨, 온도, 습도까지 치밀하게 상상한다. 그것들을 종합해 활동사진 이미지로 만들어본다. (……) 그렇게 해서 나타난 도시, 유적지, 자연환경의 실제 모습을 내 머릿속 그림과 대조한다. 이미지가 선명할수록 번역가의 실감도 커지고 그에 따라 원고의 해상도도 높아진다. ---「책으로 떠나는 여행」중에서
번역은 잠과 같다. 한 번에 몰아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이도 말고 적게도 말고 매일 꾸준히 해야 한다. 그런데 2~3개월의 주기에서 번역가가 괴력을 발휘하는 시기가 딱 한 번 있는데 바로 마감 일주일 전이다. 마감이 눈앞에 닥치면 편집자의 얼굴이 어른거리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고 밤에도 잠이 오지 않는다. 번역가가 마감을 이유로 약속을 취소하더라도 서운해 마시라. 마감은 단순한 핑계가 아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번역가는 오늘 무엇을 할까? 마감을 일주일 앞둔 번역가라면 번역을 할 것이다. ---「번역가와 시간」중에서
책 한 권을 번역하는 데 짧게는 한두 달에서 서너 달까지 걸린다고 생각해보자. 결과물을 넘기기 전까지는 처음 계약할 때 받은 계약금 100만 원을 제외하고 아무 수입도 없다. (……) 그렇다면 번역가는 어떻게 생활해야 할까? 처음 계약했을 때 받은 100만 원 남짓 되는 돈으로 급한 불을 끄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 나는 이제 중견 번역가가 돼서 고맙게도 작업 의뢰가 끊이지 않고 들어오지만 불규칙한 번역료 지급일 때문에 수입이 들어오는 주기는 여전히 들쭉날쭉하다. 번역료는 올랐지만 그만큼 체력이 떨어졌고 의뢰받는 원고의 난도는 대체로 높아졌다. 그러니 결국 내가 해낼 수 있는 작업량은 초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번역료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몇 달치 생활비를 쌓아두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니 각종 공과금과 카드 대금 지급일이 몰리는 월말이면 가슴이 답답하다. ---「번역료를 받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중에서
우리가 외래어 표기법을 지키는 이유는 외국어 인명이나 지명을 정확하게 불러주어 꽃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끼리 소통하기 위해서다. 정확한 표기보다 중요한 것은 발음하기 쉬운 표기, 즉 한국어 음운 체계에 맞는 표기다. 각 언어권은 자기네 음운 체계에 맞도록 외래어를 수용했다. 이를테면 영어 이름 ‘존(John)’은 그리스어 ‘야니(Γιαννη)’, 독일어 ‘요한(Johann)’, 덴마크어 ‘한스(Hans)’, 헝가리어 ‘야노시(Janos)’, 아일랜드어 ‘숀(Sean)’, 프랑스어 ‘장(Jean)’, 이탈리아어 ‘조반니(Giovanni)’, 스페인어 ‘후안(Juan)’, 포르투갈어 ‘주앙(Joao)’ 등으로 철자와 발음이 제각각이다. 우리가 ‘존 폰 노이만’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영국에서는 ‘존 본 노이먼’, 독일에서는 ‘요한 폰 노이만’, 헝가리에서는 ‘너이만 야노시 러요시’라고 부른다. 이 나라들은 전부 자기네 식으로 이름을 바꿔 부르는데 왜 우리만 원음대로 부르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일까? ---「‘Fuzon Chung’을 찾아서」중에서
언젠가 어느 국내 작가가 자신의 소설이 영화로 나온 것을 극장에서 보다가 중간에 나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기가 그린 주인공과 영화 속 주인공이 너무 달라서 황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해가 간다. 비록 작가는 아닌 번역가이지만 내가 옮긴 소설이 영화로 나오면 매번 가슴이 뛴다. 원작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라졌을까 궁금해하며 극장을 찾아가서 하나하나 뜯어본다. 놀라기도 하고 실망도 하고 어느 순간 뿌듯하기도 한다. 미우나 고우나 이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는 데 나도 일조했다는 혼자만의 다독임이라고나 할까? 좋든 나쁘든 그 역시 나의 분신인 셈이다. 1000만 분의 1일지라도.
---「스크린셀러 뒷담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