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뭣도 모를 때 하는 거야. 최 부장이 지금 나이에 시집가면 오히려 손해야. 신혼 재미는커녕 가자마자 시부모 병 수발해야 할지도 몰라.” 나는 유부녀들의 모순된 넋두리를 이해하는 편이었지만 미혼이어서 뭘 모른다는 식의 어조에는 짜증이 났다. 피차 서로의 삶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텐데, 내 경험은 왜 관점으로서 존중되지 못하는 걸까. 꼬리를 무는 생각에 지칠 때쯤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이대로 평생 혼자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곁에 남아 있는 사람」중에서
어떡하지, 나는 이 남자애가 너무 좋았다. 그가 멀리 가버린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날 밤 어떻게 해서든 고백해야 했을까. 그랬다면 우리 사이의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았을지 지금으로서도 알 수가 없다. 설사 끝까지 갔다 해도 그 전에 달라지지 못한 것들이 그 후에 달라질 수 있었을까. ---「곁에 남아 있는 사람」중에서
소미는 남자 취향이 일관되게 분명했다. 그녀는 안경 쓴 남자를 한 치의 유보 없이 편애했다. 처음 사랑한 대상은 아빠였다. 유난히 짱구였던 아기 때 소미는 아빠의 금테 안경을 잡아 뺀 뒤 고작 성인 주먹 크기만 한 제 얼굴에 써보려고 낑낑댔다. 엉성하게 걸치는 데 성공하면 안경 너머 세상은 빙글빙글 돌았다. 소미가 어지러워서 휘청거릴 때면 어김없이 아빠가 다가와 숨 막히게 꽉 안아주었다. 다정하고 든든한 그 얼굴에는 안경이 존재했다. ---「안경」중에서
홀로 남은 방콕에서 희진은 내내 영욱을 떠올렸다. 함께 걷던 거리, 먹던 음식, 보던 풍경… 어딜 가든 그와 함께였다. 남은 기간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고 그만큼 그가 밉기도 했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안고 인천 공항에 도착한 날, 입국장의 무수한 인파 속에 영욱이 서 있었다. 희진에겐 주변 풍경이 지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열정과 보고만 있어도 가슴 아린 그리움이 복잡한 문제들을 단순화시켰다. 희진은 온 힘을 다해 영욱에게 달려갔다. ---「치앙마이」중에서
“사람을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것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 슬아도 나중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아빠처럼 해. 그거면 돼. 마찬가지로 슬퍼해야 할 때 충분히 슬퍼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딱 거기까지야.” ---「치앙마이」중에서
어머니는 내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호수로 눈을 돌려 감탄사를 연발했다. 신난 발걸음이 물에 너무 가까워지는 듯해서 신경이 쓰였지만 한껏 들뜬 어머니가 귀여웠다. 사진에서나 보았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이 겹쳐졌다. 동시에 여기저기 주삿바늘을 꽂은 아버지 옆에서 오랜 시간 무력감에 길들어갔을 어머니의 모습이 처음으로 손에 잡히듯 그려졌다. 어머니에게 다가가 가는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슬가슬한 카디건의 감촉 뒤에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상혁아, 난 괜찮아.” 어느새 몸을 돌린 어머니가 나를 보듬었다. 어머니는 한없이 작고 약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보살핌을 받는 쪽은 끝까지 자식일까. ---「우리가 잠든 사이」중에서
“내가 널 사랑한다고.” 지훈은 더없이 확고한 어조로 소영의 입을 막았다. 정말 소중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은 허구였다. 소영은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간절히 원해왔고, 총체적이고 유보 없는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누가 뭐래도 너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좋은 사람이자 근사한 여자라고 긍정해줄 사랑. 어느덧 그녀의 가슴속에서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따스한 바람이 나부꼈다. 소영은 겹겹이 입고 있던 마음의 갑옷을 떼어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나의 이력서」중에서
“그거 자격지심이야, 오빠. 괜히 화낼 이유를 만들려고 하지 마.” “네가 상대를 그렇게 몰아간다고는 생각 안 해?” 소영은 마음을 최대한 무디게 만들고 그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문득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 징조도 없이 폭발해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견뎌내며 분노를 삭이느라 일그러진 표정이 자리 잡은 엄마. 거울을 들여다보니 자신의 얼굴이 무기력하게 아버지를 대하던 엄마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나의 이력서」중에서
서로 간에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삶. 주완이 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화내거나 상처 주지 않는 삶이었다. 그는 꿈이나 천직, 사회적 성공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일은 생계를 해결하는 수단이므로 성실히 임하고 남는 시간에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었다. 직업은 직업일 뿐이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으니까. ---「Keep Calm and Carry On」중에서
점차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게 소소한 삶의 기쁨이 되어갔다. 수현은 서점에 들렀다 온 날이면 침대에 누워 그날 나눈 이야기를 하나하나 반추하고 음미했다. 회사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일과 삶의 방식이 있는지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