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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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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10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440쪽 | 526g | 135*210*30mm
ISBN13 9791161251301
ISBN10 116125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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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침대에 걸터앉아 물밀 듯 쏟아지는 향긋한 햇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릇파릇한 하늘에는 새하얀 깃털과도 같은 것들이 물결치듯 일고 있었다. 앤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처음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밀려왔지만, 이윽고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여긴 초록 지붕 집이고, 이곳 사람들은 남자아이가 아니라서 나를 원하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아침이었다. 그리고 창밖으로는 벚나무가 한아름 피어 있었다. 침대에서 쿵 뛰어내린 앤은 마루를 뛰어가 빗살문을 열어젖혔다. 창문이 삐거덕거리며 잘 열리지 않았다. 마치 꽤나 오랫동안 열려본 적이 없는 듯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창문이 하도 꽉 끼어서 무얼 받쳐놓을 필요도 없었다. 앤은 무릎을 꿇고 6월의 아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녀의 눈은 기쁨으로 반짝였다.
‘아, 어쩜 이렇게 아름답지? 정말 사랑스러운 곳이지 않아? 여기서 머물 수 없다니 섭섭해.’
하지만 이곳에 산다고 상상하고 싶었다. 상상의 나래는 펼칠 수 있는 곳이었다. 커다란 벚나무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있었고, 억척스럽게 피어난 꽃들이 잎사귀를 덮고 있었다. 집 양쪽으로는 사과나무와 벗나무가 꽃잎을 흩날리는 큰 과수원이 있었고, 나무 밑 풀밭에는 민들레가 흩뿌려져 있었다. 뜰에 핀 보랏빛 라일락의 알싸하고도 달콤한 향기가 아침 바람을 타고 다락방 창문까지 날아들었다. 토끼풀이 소복한 푸른 풀밭은 골짜기까지 비탈을 이루고 있었다. 골짜기에는 냇물이 흘러내렸고 흰 자작나무가 줄지어 자랐다. 그 아래로는 고사리와 이끼와 같은 식물들이 쑥쑥 자라나는 것 같았다. 골짜기 너머로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의 초록빛 깃털로 뒤덮인 언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빛나는 호수 반대편에서 보았던 작은 회색 지붕 집의 모퉁이가 슬며시 보였다. 왼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마구간이 있었고, 초록색으로 물든 낮은 등선의 들판 저 멀리로는 반짝이는 푸른 빛 바다가 어렴풋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앤의 눈동자는 이 모든 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우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동안 사랑스럽지 못한 것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던 가엾은 소녀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곳은 앤이 꿈꾸던 그 모습 그대로 사랑스러웠다. --- p.50

마릴라도 앤에게 해줄 말이 있었지만 애써 말하지 않았다. 지금 말해버리면 앤이 흥분해서 식욕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앤이 자두 절임을 다 먹고 나서야 마릴라가 말했다.
“배리 부인이 오후에 다녀가셨단다, 앤. 너를 보고 싶어하셨는데, 널 깨울 수가 없겠더구나. 네가 미니 메이의 목숨을 구했다면서 포도주 일은 미안했다고 사과하셨단다. 네가 일부러 다이애나를 취하게 하려던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셨대. 그리고 네가 부디 자신을 용서하고, 다이애나와 다시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구나. 다이애나는 어젯밤에 독감에 걸려서 밖에 나갈 수가 없다고 하니, 보고 싶으면 네가 저녁에 방문해보도록 하고. 앤 그렇게 날뛰지 좀 말고!”
마릴라는 주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앤은 너무 들뜬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은 흥분해서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마릴라 아주머니, 저 지금 당장 가도 되나요? 설거지는 못했지만요, 제가 돌아와서 씻을게요. 이 격정적인 순간에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설거지 같은 걸 하고 있을 수가 없잖아요.” --- p.207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희생이라뇨! 초록 지붕 집을 파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게 제일 마음 아픈 일인걸요. 이 소중한 집을 지켜야 해요. 저는 마음을 다잡았어요. 저는 레드먼드로 가지 않아요. 저는 여기에 머물면서 교사 일을 할 거예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하지만 네 꿈은 어쩌고……. 그리고…….”
“전 예나 지금이나 야심차요. 다만 목표가 조금 변경되었을 뿐이에요. 저는 훌륭한 교사가 될 거예요. 그리고 아주머니의 눈도 지켜드릴 거고요. 집에서 저 혼자 대학 과정을 공부해볼까 해요. 정말 계획이 많죠, 마릴라 아주머니? 지난 일주일 동안 고민한 거라고요. 전 이곳에서의 생활에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러다 보면 결실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퀸스를 졸업했을 땐 제 미래가 곧게 뻗은 대로 같았어요. 그 길을 가다보면 이정표를 보게 될 거라 생각했죠. 지금은 길모퉁이에 서 있어요. 이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멋진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어요. 길모퉁이 그 자체만으로도 멋지잖아요. 길 너머의 풍경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해요. 초록빛의 영광이 있을지, 부드럽고 화사한 빛과 어둠이 있을지. 새로운 풍경, 새로운 아름다움 같은 것 말이에요. 저 멀리에선 어떤 언덕과 골짜기가 굽어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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