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2013년부터 서울경제신문 부설 백상경제연구원이 서울시교육청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인문학 아카데미 '고인돌(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서울시교육청 산하 공공도서관과 학교에서 성황리에 진행중인 강연의 내용들을 다듬어서 책에 싣고, 일부는 특별히 필진을 모시기도 했다. 총 12명의 필진이 자신의 전문분야를 가지고 월,화,수,목,금 5일에 하나씩 짧은 강의를 하는 형식을 갖췄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나름 인문학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자부심(?) 같은 게 있었다. 에이 내가 그래도 뼛속까지 문과인데, 라는 생각. 그래도 웬만큼 수박 겉핥기는 해봤다, 라는 생각.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나의 착각은 산산조각나버렸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에 실린 이야기들은 그 두께만큼이나 깊이가 깊었고, 필진 열두 명의 다양한 구성만큼이나 말하는 범위가 넓었다. 제 1강의 저자는 최형선이라는 분이다. 사실 이번에 처음 본 저자인데 생태학자라고 한다. 무심코 책을 넘겼는데 이건... 늘 문과의 글만 읽어오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뻥을 좀 보태서 글의 98%는 동물과 생물 이야기이다. 이게 왜 인문학이지? 인문학 수업이라면서 왜 1강부터 생물 이야기로 나오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물론 2강부터는 다른 저자의 전혀 다른 글이 나오겠지만, 왠지 제목이 주는 기대감과는 다르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지 한참 지났음에도 리뷰를 쓰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던 이유는 팔할이 '1장이 가져다 준 까마득함'이었다(심지어 뒤에 11강이 더 남았기 때문에!).하지만, 아마 이 책이 아니었으면 이런 분의 글을 읽을 기회도 없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 나오는 다른 저자의 글 중에도 내 취향에 맞는 글이 있고 아닌 글이 있다. 중간쯤에 나오는 조선시대 청나라에 불었던 한류(韓流)이야기나 수레 이야기처럼 내 취향에 맞는 이야기들, 얼마전 비트코인 대란으로 인해 유명해졌던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 등 최근 이슈였던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있었다. 밀덕(밀리터리 마니아) 취향에 딱 맞춘 한 저자의 전쟁사 이야기는 마치 유튜브를 보듯 재밌게 읽었다. 그렇게 쭈욱 읽고서 무심코 내가 어려워했던 제 1강, 생물 이야기를 펼쳤더니 뭔가 다르게 보인다. 저자가 던지는 모든 메시지는 문자 자체로는 동물 이야기다. 사슴이 나오고, 레밍이 나오고, 북극곰과 불곰이 나오고 급기야 남방코끼리물범까지 나오는 동안 인간과 인문학에 대한 얘기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 뒤에, 이 이야기들을 선별한 기준은 다분히 인문학의 관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구나, 라는 걸 찾았다(실은, 소제목이 아니었다면 평생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인문학이라는 건 참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인문학이야, 라고 정의할 수도 없다. 누구는 경제 얘기만, 누구는 전쟁 얘기만, 누구는 동물 얘기만 주구장창 했지만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다 인문학이고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썰풀기(이야기)이다. 함부로 인문학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고, 인문학을 함부로 지루하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을까. 그건 어찌 보면 인문학을 너무 좁은 범위에 가두는 것이며, 사실은 그 비좁은 영역을 벗어나면 얼마든지 매력뿜뿜하는 이야기들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