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속되지 않고 접속만 하고 사는 시대, 슬픔이 아니라 슬픔 의 이미지만 소비해서 슬픔을 알 수도 없는 시대, 사랑을 해 보기도 전에 사랑의 불가능성을 냉소하면서 연애유희에 중독되어 있는 시대.
아닌 것은 버리자고, 놓친 것은 위험하더라도 다시 붙잡자고, 밤을 함께 걷자고 말하고 싶었다.
---「서문」중에서
다음 문장의 괄호에 들어갈 단어를 생각해보자.
헤르만 헤세가 『정원 일의 즐거움』에서 쓴 말이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건 ( ) 사는 것이다.”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은 모르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삶의 방법.
괄호 안에는 ‘아름답게’가 들어간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삶의 방법,
아름답게 사는 것.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중에서
자본주의에서는 무언가를 하는 능력보다
하지 않는 능력이 더 빛난다.
돈을 벌 수 있지만 돈 벌 일을 하지 않고,
유명해질 수 있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능력.
조르조 아감벤의 말처럼,
최고의 능력이란 능력(potence)과 불능(impotence)을 똑같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시를 쓰지 않는 시인,
노래하지 않는 가수,
사진을 찍지 않는 사진작가,
그리고 글을 쓰지 않는 글쟁이.
이 긴장 속에서만이
진정한 작품이 나온다.
---「하지 않는 능력」중에서
단테의 『신곡』에서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다.
지옥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옥의 성문 앞에서 신음한다.
뜨뜻미지근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잘한 일도 없고, 잘못한 일도 없으며
미지근하게 순종적으로
혹은 비겁하게 산 영혼들이
지옥에도 못 들어가는
최악의 인간이다.
뭐라도 해야 한다.
뭐라도 꿈꾸어야 한다.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고
법을 어기게 되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윤리다.
---「지옥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들」중에서
어렸을 때의 성장이
더 배움으로써 가능했다면
어른의 성장은
배운 것을 하나씩 의심하면서 시작된다.
진짜와 가짜를 가려 나가는 과정,
그래서 온전히 진짜만 남기는 것이
어른의 성장이다.
그때 바라보게 되는 낯선 자신이
바로 진짜 자기의 모습이다.
낯선 자신을 마주하지 못한다면
어른이 될 수 없다.
---「의심하는 어른」중에서
일관성 있는 사람이 되라 한다.
불가능하고, 적절치 않다.
한 개인 안에는 수많은 자아가 들어 있다.
내적 대화라는 것이 그래서 가능하다.
그 자아들이 공존하는 한, 일관성은 불가능하다.
만약 일관적인 사람이라면
그는 많은 자아를 억압하는
폭력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자아가 다른 자아를 주저앉힐 때, 우리는 외로워진다.
외로움이란 자기 자신과 친하지 않아서 생긴다.
---「일관성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중에서
고정희 시인은 이렇게 썼다.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이것이 사랑법 첫째라고 했다.
그대란 연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모든 이가 그대다.
자식도, 부모도, 친구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돌덩이가 필요하다.
착한 고정희 시인은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 기대는,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
기대와 바꾸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기대 때문에 잃는 것도 자기 자신이다.
기대했다가 배신당했다고 말들 하지만,
기대란 것이 원래
자기중심적인 데이터 때문에 부풀려진 허상이다.
기대하지 말고
바라보면 된다.
바라보기 위해서
가슴 한복판에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덩이를 매달면 된다.
---「기대 때문에 잃는다」중에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오히려 쉽다. 정확하게 사랑하기도 이 에 비하면 쉽다. 정확하게 분노하기가 가장 어렵다. 분노는 어떻게 하는가. 말로, 몸의 떨림으로, 손짓으로 발짓으로, 온 몸의 경련으로, 피로, 호흡으로 한다.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 심포니다. 그런데 분노라는 것이 조화가 되면 또한 정확한 분노가 아니다. ‘이거다’ 하는 순간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분노다.
그러나 분노해야 한다. 분노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으면 상대가, 세상이 ‘나’라는 존재를 전혀 모르거나, 오해하거나, 매장한다.
분노가 터지는 일들이 종종 있다. 점점 잦아진다. 부끄럽지만 속아줄 때가 많다. 사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속아줄 때 가 더 많다.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말에 기대었을지도 모른다. “속지 않는 자가 속는다.” 속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 더 속는 다는 말이다. 세속적으로 재해석하자면 적절하게 속아주는 것이 안 속는 길이라는 건데, 이건 사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속아주는 건 그냥 속는 거다. 속아주는 것이기에 자기 자신도 속이는 거다. 결국, 속아줘도, 속아주지 않아도 속게 된다. 이 세상은 속지 않고 살 수 없다.
일관된 답은 없다. 그때그때 가장 타당한 자리에 설 수 있을 뿐이다. 정확하게 분노할 수만 있다면 지나치게 틀린 자리에는 들지 않게 될 것이다.
---「밤의 모퉁이에서: 정확한 분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