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12년 04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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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92쪽 | 208g | 148*210*15mm |
ISBN13 | 9788955615876 |
ISBN10 | 8955615876 |
출간일 | 2012년 04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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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92쪽 | 208g | 148*210*15mm |
ISBN13 | 9788955615876 |
ISBN10 | 8955615876 |
보르헤스는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와 장편 《모비딕》의 유사점에 대한 흥미로운 견해를 소개한다. 비록 작품의 무대인 물리적 배경의 차이로 두 작품의 규모가 다르게 느껴지지만, 두 작품은 본질적으로 주인공의 광기, 그리고 그 광기가 전염되어가는 양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의 화자는 월스트리트의 변호사로, 스스로를 야심 없는 ‘야망 없는 안전제일주의자’라 칭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얌전하고 성실해 보이는 바틀비를 고용하게 되면서부터 화자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바틀비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으며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모든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마지막 장을 펼치는 순간까지 독자는 그가 몇 살인지,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기괴하리만큼 부조리한 상황, “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는 바틀비의 말이 점진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며 한 사람의 인생이 죽음으로 치닫는 과정을 무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평생 평단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일생을 불행하게 보낸 작가 멜빌에게 세상은 아이러니와 부조리로 가득하게 느껴졌다. 〈필경사 바틀비〉는 가장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인 ‘허무함’과 현대인의 실존적인 고독을 보여주는, 슬프고도 강력한 흡입력을 지닌 세계문학의 걸작이다. |
삶의 불행과 고독을 관통하는 독특한 상상력_보르헤스 필경사 바틀비_월스트리트 이야기 작가 소개_허먼 멜빌 |
제목만 알고 있던 글을 또 한 편 읽었다. 이런 글이었구나, 이런 내용이었구나, 이런 지독함이 담겨 있었구나. 영영 모르고 살았다면 좀더 평온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알게 되어 앞으로의 삶이 덜 행복해진다 싶어도 그 불행의 한자락을 끝내 모른 채로 살지 않아서 다행이기만 하다는 마음이다. 오늘은 어째 내 마음이 여유로워진 듯하다. 바틀비 덕분일 것이다.
불행한 시대, 불행한 사람. 누군가는 행복과 행운에 겨워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반대쪽에는 전혀 그런 은혜를 입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든, 어느 공간이든. 내가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어느 쪽으로 넘어갈 것인가를 따지는 일은 그래서 많이 서글퍼진다. 아무래도 안도보다는 염려하는 마음이 크게 마련이니. 혹시라도 바틀비처럼 되면 어쩌나, 바틀비처럼 되고 싶지는 않은데, 바틀비라고 해서 그렇게 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지 않았겠는가, 바틀비, 바틀비......
책의 크기는 작은 편, 두께도 얇은 편이다. 한달음에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한 장 한 장, 한 장면 한 장면이 던지는 삶의 지독한 무게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하나인데 이런 이름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다. 내 의식이 한층 높아진 듯하다.
'광기'라는 말은 얼마 전까지 내 정신 안에 없던 것이었다. 보드 게임을 하던 중 '아컴 호러'나 '광기의 저택'과 같은 게임을 하면서 러브 크래프트라는 작가의 이름을 통해 서서히 친숙해진 낱말인데.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 미국 사회의 어느 영역에 널리 퍼졌다는 이 '광기'의 분위기가 당시 미국 소설과 어떤 연관성이 있었던 것인지 이제야 조금씩 잡히는 느낌이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그 시대 미국과 미국인들의 속성 일부를. 독립 전쟁과 남북 전쟁과 대공황과 자본주의 성장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등. 그리고 그 혼탁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의 절박한 의지를.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으리라 싶은 광기의 시대, 그 분위기를.
마음은 약하고 섬세하고, 그럼에도 의지의 어떤 부분은 지독히도 강하고, 올곧아서 타협하기 힘들어하는 성격을 가진 이들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참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모습이라는 게 어떠하든. 본인이 원해서 얻은 게 아닌 천성으로 갖고 태어난 사람들일 경우 더더욱. 바틀비처럼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속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 바틀비와 같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용기라면, 이 용기는 이 말을 하는 사람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이끌어주는 매개체가 되어 줄까. 글쎄, 답은 함부로 말할 수가 없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말하는 바틀비와 말 못하는 바틀비가 같이 살고 있을 것이니.
앞서 읽은 잡지인 뉴필로소퍼에서 소개 받은 책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과정과 이어지는 책으로. 사는 일은 참 쉬워 보이다가도 짬짬이 이런 어려운 문제를 만나 헷갈린다. 이 문제 앞에서 단순해지지 않아 다행이다. 바틀비의 고집이 내내 애잔하기만 하다.
창비에서 세계문학 단편선이 나왔을 때만 해도 고전의 맛을 알던 때가 아니었다.그럼에도불구하고 이 시리즈는 운좋게 읽고 리뷰도 써서 창비에서 상도 받고 그랬는데...그랬는데...맙소사 미국편은 리뷰가 없다.분명 읽었을 텐데...지인들과 필경사바틀비에 관해 이야기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그래서 <모비딕>도 읽고 싶다고 말한 기억도 나고,이후 모비딕을 재미나게 읽었는데 심지어 문동에서 일러스트로 출간된 <필경사바틀비>도 읽은 것 같은데..짧은 감상조차도 남기질 않았다.그래서 보르헤스가 고른 <필경사바틀비>가 읽고 싶어졌던 걸까?^^
<미국고전문학강의>를 조금은 재미나게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무튼 필경사바틀비 에 관한 설명에 로렌스의 평이 실려 있어 흥미롭긴 했다."로렌스는 멜빌이 천국을 믿었으며 그래서 그가 연옥에 살게 되었노라고 썼다."/89쪽 '멜빌에 관한 로렌스의 저 말은 '필경사바틀비'에서도 느낄수 있는 감정이였다.솔직히 말하면 머릿속 복잡한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로렌스가 명쾌(?)하개 정리해 준 것 도 같고.바틀비를 바라 보는 이들이 사는 곳이 연옥은 아니였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물론 바틀비 자신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연옥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70쪽 내외의 짧은 단편이다.게다가 변호사의 시선으로 바틀비를 관찰하는 형식으로 소설이 진행되다보니 뭔가 지속적인 긴장감이 들었다.특별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특별한 무언가가 뿜어지는 듯한 기분이랄까...피고용인이 고용인을 지배하는 듯한 이상한 분위기...신기한건 바틀비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반복적인 말 속에서 뭐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있지 ?라는 생각만 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때론 하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한 당당한 거부를 표현하는 것도 같고,또 융통성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어떨땐 소통 자체를 할 수 없는 사람인건가..라는 생각도 들고 고용인인 변호사가 자신을 조금은 양심적인 인물로 생각하고 싶어 바틀비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시작부터 끝까지 묘한 기분이 들게 한 소설이였다.이후 간략하게 바틀비의 과거에 관한 언급을 통해 그가 그럴수 밖에 없었음을..아니 그럴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지만..그럼에도 뒷맛이 썩 개운하지는 않았다."나는 바틀비 때문에 내가 겪고 있는 불편이 전부 영원의 세계에서부터 예정된 것이며 나처럼 하찮은 인간이 통찰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신비한 목적을 위해 그가 나에게 배정되었다는 논리에 빠지게 되었다."/68쪽 변호사가 하고 있는 생각을 나 역시 종종 드는 마음이라서 그랬을까...아니면 애초에 궁지로 몰아 넣지 않았으면 되지 않았던 거 아닌가 라고 따지고 싶은 걸까..흥미로운 건 이 바틀비 란 인물에 대해 들뢰즈,아감벤,지젝등 이론가들이 철학전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였다.그리고 보르헤스가 '필경사바틀비'를 바라본 시선에도 격한 공감이.."<<필경사바틀비>>는 꿈의 상상력이 낳은 한가로움 혹은 기교 이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그것은 세계의 일상인 아이러니들 가운데 하나인 '허무함'을 보여주는 슬프고 진실한 작품이다."
그저 기묘한 이야기로 느껴졌던 내용이 실상은 우리의 현실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다시금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도 부제를 마주하는 순간 읽었던 내용들이 재배치된다는 사실은 글을 읽을 때, 어떠한 관점을 갖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필경사 바틀비>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허먼 멜빌의 이 단편소설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 잘 부합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모비딕>과 더불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작품이 아닌가 싶다.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의미가 내포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 작품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었다는 생각이 들기에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로 만나볼 수 있게 된 점은 행운이 아닌가 싶었다.
이미 작가와 제목에서는 자주 들었던 터라 성급하게 읽기 시작해서일까? 처음에는 바틀비라는 필경사의 이야기가 자못 기묘하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화자인 변호사에게 고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하여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일체의 일들을 거부하는 그의 모습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현실에서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기에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왠지 당연해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화자인 변호사는 이러한 바틀비의 납득할 수 없는 모습에 대하여 나름의 배려와 기회를 주지만, 바틀비는 이상하리만큼 그러한 변호사의 호의를 철저히 무시 내지는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사무실에서 아예 기거하는 바틀비에 질린 변호사는 오히려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까지 바틀비를 피하는 모습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마저 든다.
결국 부랑아 수용소에서 끌려가서 거기에서도 일과 식사를 거부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는 바틀비의 삶은 읽는 이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그는 왜 일을 거부한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다시금 책의 처음으로 되돌아간 나에게 <Bartleby, the Scrivener : A story of Wall Street>라는 제목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갑자기 읽었던 내용들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통상 <필경사 바틀비>라는 제목만을 보았는데, 부제의 '월 스트리트의 이야기(A story of Wall Street)'를 보면서 한 남자의 기묘한 이야기가 아닌 월 스트리트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순과 비참한 근로자의 삶을 꼬집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다시 읽을 필요도 없이 바로 이 짧은 부제를 통해서 말이다.
바틀비가 고용되기 전부터 일하고 있던 두 명의 필경사 터키와 니퍼즈에 대한 이야기부터 생각해보자. 한 명은 오전에 다른 한 명은 오후에만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둘의 모습도 달리 보이게 된다. 이 둘은 완벽하게 제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시간의 반만 제대로 일을 하는 셈이다. 부제를 보기 전에는 이들을 고용한 변호사가 나중에 바틀비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단점을 눈감아주고 배려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적은 비용으로 이 둘을 고용할 수 있다는 효용성이 부각되면서 변호사의 철저한 관리자의 모습으로 보여지게 된다. 바틀비 역시 싸구려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모습은 그의 기행이 아니라 최소의 비용으로 근로자를 고용하여 최대의 효과를 내려는 변호사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중략) 내 사무실은 불투명 유리 접이문으로 구분된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내 필경사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내가 차지했다. 나는 기분에 따라 이 문을 열어놓기도 하고, 닫아 놓기도 했다. 나는 접이문 옆의 한 구석에 바틀비를 배치하되 내 구역 쪽에 두었다. 사소한 일을 해야 할 때 이 조용한 남자를 편하게 부르기 위히서였다. (중략) 한층 만족스러운 배치를 위해 나는 키가 높은 초록색 접이식 칸막이를 세워 바틀비를 내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하되, 내 목소리는 들릴 수 있게 했다.
- p. 32 ~ 33 中에서 -
변호사가 자신의 사무실의 모습에 대하여 설명하는 부분을 보자. 단순히 변호사가 운영하는 사무실의 배치도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 공간을 당시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으로 확장하고 나면 자본가 또는 경영인들이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하여 근로자들을 자유롭게 배치하고, 근로자는 이에 순응해야 하는 불편한 모습으로 비춰지게 된다. 시야를 차단하되 목소리는 들려야 한다는 변호사의 말은 오로지 근로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만이 존재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유용해. 나는 그와 잘 지낼 수 있어. 내가 그를 내쫓는다면 그는 나보다 덜 관대한 고용주에게 걸려 거칠게 다뤄지다 불쌍하게 쫓겨나 굶어 죽게 될 가능성이 높아. 그래, 나는 싼값에 즐거운 자기 긍정을 살 수 있어. 바틀비의 편을 들고 그의 이상한 고집을 너그럽게 봐준다해도 내가 지불해야 할 비용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내 영혼에는 장차 양심에 달콤한 양식이 쌓이는 거야.
- p. 41 中에서 -
일을 거부하는 바틀비에 대하여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던 변호사의 내면은 이처럼 그가 유용하다는 점과 더불어 그러한 관대함이 자신의 최소한의 양심에 명분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 대목은 근로자를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효용성과 자기만족에 근거한 것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변호사의 자비심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위선적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변호사는 당시 자본사회의 고용주 내지는 자본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에게 고용된 필경사들은 자본주의의 위계 질서와 비인간적인 사회구조의 희생양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틀비가 '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로 일을 거부하는 것은 그러한 암담하고 모순적인 사회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동적인 저항의 의미로 변이된다. 이러한 최소한의 수동적인 저항에도 크게 당황하는 변호사의 모습은 당시 자본주의의 모순과 구조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바틀비의 이러한 수동적이 저항을 의미하는'싶은'이라는 단어가 주위 동료들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에 경기를 일으키는 변호사의 모습 역시 근로자의 노동 운동을 두려워하는 자본가의 모습으로의 변이로 보여지게 된다.
부제를 통한 이러한 내용의 변이는 멜빌의 이 작품이 왜 보르헤스의 눈길을 끌었는지 공감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에 착안하여 이 작품을 그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에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필경사 바틀비>는 꿈의 상상력이 낳은 한가로움 혹은 기교 이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것은 세계의 일상인 아이러니들 가운데 하나인 '허무함'을 보여 주는 슬프고 진실한 작품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