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어느 토요일, 잔뜩 긴장한 채 서울 동교동의 한 성인 발레 전문학원에 들어섰다. 저 등록하러 왔습니다. 친절한 부원장이 물었다. 발레는 처음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몸에 안 맞을 수도 있는데 기초반 한 달만 들어보고 계속할지는 그때 결정하시죠. 아닙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신용카드를 내밀며 3개월 일시불 선결제 해주세요, 외쳤다. 개강은 2월 초니까 그때 오세요. 영수증을 손에 쥐고 문을 나서니 햇살이 따사로웠다. 수업 시작 전까지 살을 좀 뺄 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당시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복하게 야식을 즐기다가 고3 때의 몸무게를 회복한 상태였다. 운동을 꾸준하게 했으니 기초대사량이 높을 것이다, 많이 먹어도 잘 찌지 않을 것이다, 방심하다가 의문의 벌크업에 성공해버렸던 것이다.
---「3개월 일시불 선결제 해주세요」중에서
운동이란 걸 처음 시작한 건 서른이 넘어서였다. 여러 운동을 골고루 방황했지만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요가는 급한 내 성격에는 너무 조용해서 지루했다. 자전거는 한강 변에서 옷이 찢길 정도로 무릎에 심한 찰과상을 입은 뒤 속도 내기가 겁났다. 수영은 하필 새벽 수업이라 알 빠진 옥수수처럼 듬성듬성 나가다 보니 흥미를 잃었다. 피트니스는 잘못된 운동 방식 때문에 허벅지가 커져서 그만뒀다. 엉덩이와 허벅지 살을 빼는 데 좋다고 들어서 20킬로짜리 바벨을 등에 지고 각종 스쿼트를 무작정 열심히 했던 것이다. 젠장, 여자는 근력 운동을 해도 근육이 안 커진다고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생생한 반증이 여기에 있으므로 반드시 ‘대체로’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그때 생긴 바위 같은 큰 근육은 없어지지도 않는다. 하체 비만이 근육 돼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3개월 일시불 선결제 해주세요」중에서
플리에는 스스로를 높이겠다는 마음으로는 스스로 높아지지 않는 삶과 참 많이 닮았구나, 생각할 때가 있다. 내려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올라갈 수 있는 힘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바워크의 플리에를 하면서 가끔 불전에서 108배를 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나 자신을 최대한 낮춤으로써 사실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닮아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에 ‘플리에’의 순간이 있는 게 아닐까. 낮아지고, 떨어지고, 주저앉는 순간들 말이다. 원하던 일을 얻지 못했을 때,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어그러졌을 때, 사랑이 어긋났을 때, 누군가에게 거절당했을 때, 그건 넘어지는 게 아니다. 그저 각자의 ‘플리에’를 하는 거다. 높이 뛰어오르는 순간이 있으려면 플리에를 꼭 거쳐야 하고, 내려와야 할 순간에도 플리에는 꼭 필요한 거니까. 그래서 나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날에는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곤 한다. 플리에 같은 그 시기를 잘 지난다면, 인생의 속근육도 자라는 것이겠지.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중에서
동작을 연거푸 말아먹는 나 때문에 전체 수업의 진도까지 늦어지고 있었다. 당황했고, 숨이 가빠졌다. 정말이지 이보다 더 통째로 클래스를 망칠 수 있을까 싶었다. 쭉 펴고 시작했던 어깨는 안으로 수그러들었고, 꼿꼿해야 할 무릎은 말린 호박처럼 쭈그러들었다. 거울 속의 내가 그렇게 못나 보일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게 뒤로 숨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스튜디오를 나와 터덜터덜 집으로 발을 옮겼다. 땀을 씻어내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도 눈이 감기지 않았다. 뒤척이다 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었다. 베게에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좌절감이었다. 노력했는데도 이렇게 안 된다면, 발레, 이제 접어야 하는 건 아닐까.
---「셰네로 돌다가 통베 파드부레 다음에 앙드오르로 두 바퀴 돌고」중에서
비로소 몸의 움직임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온 근육을 긴장시키며 힘을 가득 채우기보다 호흡을 하며 숨을 불어넣는 방법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가수 박진영이 말한 ‘공기 반 소리 반’이 이거였나 싶었다. 내지르고 채우려는 강박이 아닌, 조금은 비우고 덜어내는 소리가 편안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쁜 습관이 한 번의 깨달음으로 짜잔 바뀌는 건 아닌지라, 여전히 몸에서 힘 빼라는 지적은 지겹도록 듣고 있다. 불교도가 되기로 결심했대서 갑자기 마음이 하해처럼 넓어진다거나, 기독교도가 되기로 하면서 갑자기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내 걸로 만들려면 꾸준히 연습하고 노력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높이 뛰어오르거나 다리를 차올리는 동작을 할 때도 힘이 필요한 부분만 힘을 주고 나머지는 힘을 빼야죠. 그래야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내 마음이 달라진 것처럼, 몸의 움직임도 가벼워질 날.
---「고백하자면 나는 힘 빼기를 두려워했다」중에서
발레에서 아름다움의 핵심은 어떤 동작이든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해내는 것이다. 그건 우아함의 본질이도 하다. 격렬한 감정이나 견디기 힘든 고통을 꼭꼭 씹어서 소화한 뒤 한 단계 승화하는 것이다. 무대 위의 발레리나는 어떤 순간에도 배역이 아닌 무용수 자신의 불안이나 통증을 날것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어떤 동작이든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중에서
체형과 상관없이 각자가 만들어내는 완벽한 순간이 있다. 키 작은 이가 누구보다 큰 에너지를 뿜어내며 힘차게 뛰어오르고, 통통한 이가 여왕처럼 우아하게 공간을 지배한다. 그럼 꼭 수업이 끝난 다음 쪼르르 달려가서 “아까 정말 멋있었어요”라고 한마디 작은 팬심을 전하지 않곤 배기지 못하겠다. 그런 이들을 보면서 나 같은 근육 돼지도 언젠가는 아름답게 발레를 출 수 있게 될 거라고 되뇌어본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고 했다. 하루하루 수업을 꾸준히 하다 보면 이 뻣뻣한 몸에도 충분히 발레가 깃들 것이다. 그때까지는 사랑하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무릎과 발목 관절을 소중히 아끼고, 성실하게 회사일 하면서 학원비를 열심히 벌 계획이다.
---「나는 내 몸을 다시 빚는 중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