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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창비시선-427이동
김사이 | 창비 | 2018년 12월 07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10.0 리뷰 1건 | 판매지수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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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12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72g | 128*188*20mm
ISBN13 9788936424275
ISBN10 8936424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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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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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를 낳고 젖을 주고 흙을 다지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따닥따닥 붙은 콜센터에서 상냥하게 친절하게
보이지 않아도 웃고 보이지 않아도 참아서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
내가 여자를 입었는지 여자가 나를 입고 있는지
나를 찾아 출구를 더듬거리며 오늘을 걷는다만
여자의 시간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나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내 죄는 무엇일까」중에서

가난은 태생이 계급적이어서
자발적 가난이란 없다
가난은 민주주의의 발바닥
(…)
밥은 빼앗는 것이 아니다
밥은 나누는 것이다
---「밥」중에서

구로공단역을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바꾸더니
가리봉역을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꿨다
구로, 공단, 가리봉 이 거리에
이십여년 내 삶의 흔적이 지워졌다
성장통이 담긴 내 청춘의 시들이
정처가 없어 헤맨다

(…)
불편한 역사를 콘크리트로 발라 덮는다고
뒷골목 노동이 사라질까
---「탈 탈」중에서

인간의 피는 색이 없었을 것이다
지구가 태어나면서 돌고 돌아
서로의 고통 속으로 스며들어 빚어낸 오색 빛깔
다채롭고 찬란한 색들로 채워진 선물 같은 세상
오리라는 상상 너머의 상상을 한다
---「아득한 내일에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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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밖을 나가본다.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다. 다시 나가본다. 그러나 그곳은 안이다. 다시 나가보지만 관 속이다. 밀폐된 세상은 밖이 안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어떠한 장소도 차지할 수 없다. 상처는 삶을 삼켜버렸고, 푸른 초원조차 피비린내로 덮여버렸다. 어떡할 것인가? 시인은 그곳에서도 가족을 돌보고 출근을 하고 시를 쓴다. 불안과 아귀다툼과 농약병도 그에게는 통속적이다. 이 정도는 아직 절망이 아니다. 시인의 절망은 저항 불가능성에 있다. 자본뿐 아니라 “노동에게 희롱당하”는 현실, 인체 그 자체에 대한 착취를 당하고 불안만이 무사한 삶이건만 “생식기도 심장도 사라”져버려 저항조차 불가능하다.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개인이 떠안을 일이 아니건만, 시인은 저항의 힘에도 희망을 걸 수 없는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러나 깊고 긴 늪을 건너온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민감하고 쉽게 무너지고 상처 입고 길을 잃는다. 이것이 시인에게는 최후의 저항이다. 절망은 그를 단련시켰고, 정치적 연대가 아닌 내면의 연대를 꿈꾸게 했다. 저 촛불광장에서 시인은 정치적 힘이 아니라 “자연의 빛”을 발견했듯이, 그의 시는 이제 절망의 바닥에서 일어난 내면의 빛을 품고 아비규환의 세상으로 나아가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 백무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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