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모아두려는 것은 인생의 사소한 구석까지 들여다보려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순간에 머무르려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구나. 알고 나면, 앞으로 나를 좀 더 자주 그런 순간으로 데려가고 싶어지기도 했다.
행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원하는 데 있다고 말해준 건 누구였더라. 무엇보다 이런 순간들을 수집하면서, 나는 차츰 내가 가진 것을 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내게 없는 것을 가지려 애쓰는 대신, 내가 가진 순간을 다시 한 번 더 원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거나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삶을 그저 산책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매일에 작은 기쁨들이 숨어 있다는 것. 삶에는 아직 우리가 발견할 구석이 많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꼭 한참 앓고 난 뒤처럼 좀 더 잘 살고 싶어졌다.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긴 인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단 하루」
중요한 건, 여기에서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
얼마나 잘 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즐겁게 타는가 하는 것.
어쩌면 우린 그것을 너무 자주 잊어버려서 쓸데없이 진지하고 피곤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그날, 봄 바다의 서퍼들이 내 시선을 오래 붙잡은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바다에 몸 담그는 시간보다 생활에 몸 담그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훨씬 많은 우리도 다르지 않다. 동동 떠서 즐거움을 기다리다가 그것이 밀려오면 잽싸게 올라타야 한다.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짧으니까. 고꾸라진 뒤에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기다림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의 즐거움이 밀려올 때까지.
이 계절엔 몇 개의 즐거움을 만날 수 있을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시간의 정면을 응시해야겠다. 먼 바다에서 파도를 기다리는, 서툴고 천진한 저 서퍼들처럼. ---「봄 바다를 보러 나선 길」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가는 계절이면, 내게는 꼭 한 번 그런 저녁이 찾아온다. 열어둔 창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올 때나 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고개를 돌릴 때, 이제 막 문을 연 술집 테라스에 앉아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켤 때. 문득 ‘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왔구나’ 깨닫는 그해의 첫 저녁이. 그건 마치 다시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도 같아서, 나는 매해 그 바람을 깨달을 때마다 속절없이 설레고 만다.
여름은 내가 편애해 마지않는 계절이므로, 그렇게 깨달은 저녁부터 ‘이제 추워지고 말았네’ 시무룩해지는 저녁이 오기까지 나는 아주 열심히 여름을 살아내려 한다. 나무에 매달려 맹렬히 울어대는 매미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이. 한여름 보름 정도를 살고 한살이를 마감하는 매미는 다음 여름 같은 건 생각도 않고 이번 여름을 나겠지.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여름, 매일 낭만은 아니더라도」
맥주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사실 나는 현재를 살 줄 아는 나를, 좀 더 자유롭고 유쾌해진 나를, 이제 삶에서 알 만한 건 다 알아버렸다는 태도로 문을 닫아걸지 않고 여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꿈을 꾸기도 하는 나를 좋아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나를 꺼낼 수 있어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맥주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것. 무엇이든, 자신을 평소의 자신보다 조금 더 좋아지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좋아하자. 아주 많이 좋아해버리자.
그럼 그 무언가가 모르는 사이 인생을 서서히 바꾸어놓기도 한다. 그건 아마 좋은 나를 조금씩 연습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좋은 나를 만나고 알아가고 연습한 기분은 내 속에 남아 나를 차츰 그런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 없이도 좋은 내가 되겠지. 아직은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해, 이 글은 사실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썼다. ---「한 잔의 맥주, 호시절의 기분」
실은 그런 여행이 좋다. 여행엔 별다른 이유가 필요 없기도 하지만, 필요하다 하더라도 아주 단출한 이유만 가지고서 떠나는 여행. 거기에 가 보고 싶어. 너를 만나러 갈 거야. 그 나무를 직접 봐야겠어. 그런 이유 하나만 쪽지처럼 작게 접어 여행 가방 안에 넣고서 그리로 향한다. 정작 그곳에 가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다. 거기에 왔으니, 너를 만났으니, 그 나무를 직접 보았으니,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빈 시간이 눈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떠나는 이유는 매번 달랐고, 그것은 사실 없다 해도 괜찮을 사소한 이유들이었지만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나는 좀 더 자주 웃었다. 빈 시간을 채우는 건 사소한 우연과 인연, 게으름과 낮잠과 산책 같은 것들이었다. 이번 여행 역시 어느 집의 마당에 앉아 있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이 가방을 꾸리게 했다. ---「마당 있는 집에 창을 내고 사는 일」
서울을 떠나 제주로 가는 길은 내게 늘 시간에 어떤 ‘틈’을 만드는 느낌이다. 이 시간은, 또 이곳은 익숙한 생활의 경계 안에 없는 시간이자 없는 장소. 생활과 여행에 분명한 구분을 두는 건 내가 성실하지 못한 생활자여서일까, 아직 서투른 여행자여서일까. 떠날 때마다 나는 여전히 생활에 절취선을 두는 기분이다. ‘여기서부터 또 다른 날들’ 하고. 그럼 주머니 속에 가벼운 용기를 집어넣고서 걷는 것 같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부푼 마음의 공기가 꺼지려고 할 때면 주머니 속을 매만진다. 매일 선로의 방향을 바꾸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의 행로를 바꾸지는 못했던 토키오에게 필요했던 그것. 작고 가벼운 용기. 사실 세상의 모든 여행에 필요한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제주, 대책 없는 나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