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19년 0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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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80쪽 | 526g | 150*210*30mm |
ISBN13 | 9791188810895 |
ISBN10 | 1188810898 |
출간일 | 2019년 0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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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80쪽 | 526g | 150*210*30mm |
ISBN13 | 9791188810895 |
ISBN10 | 1188810898 |
형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연민의 서사 인류 보편적 가치의 보고(寶庫) 2018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 “인류 보편적 가치의 보고(寶庫)”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 『태고의 시간들』은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출간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이자 그 문학 세계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태고의 시간들』에서 허구와 현실이 절묘하게 중첩되는 공간인 가상의 마을 ‘태고’를 배경으로, 기이하면서도 원형적인 인물들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새롭게 창조한 소우주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시간은 태고부터 영원에 이르는 우주의 시간, 우리 인류 보편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폴란드의 국민 작가이자 이제는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선 토카르추크의 이 소설은 폴란드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니케 문학상의 ‘독자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됐고, 40대 이전의 작가들에게 수여하는 유서 깊은 문학상인 코시치엘스키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폴란드 시사잡지 [폴리티카]가 선정한 ‘올해의 추천도서’에 뽑히기도 했다. |
태고의 시간들 · 5 옮긴이의 말 · 366 |
201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을 읽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폴란드가 주목받고 있기도 합니다.
태고[太古, 폴란드어로는 프라비에크(prawiek)라고 합니다.]는 폴란드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작가는 태고가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태고는 실제 폴란드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로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곳으로, 공간이지만 시간을 대변하는 장소이며, 시공을 초월하는 개념을 설명하는 상징적인 단어라고도 했습니다.
이야기는 1914년에 시작됩니다. 폴란드는 18세기 후반부터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세 나라가 잠식하기 시작하여 1795년에는 삼국이 폴란드를 분할하여 1918년 독립을 선언하기 까지 분할 통치하였습니다. 폴란드가 독립한 상황은 잠시였을 뿐 1939년 나치 독일과 러시아가 분할했다가 1945년에 다시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태고의 시간들>은 태고에 있는 다양한 존재들, 태고 자체를 비롯하여 사람, 천사, 악령, 게임, 집, 신, 버섯균, 과수원, 죽은 자들, 넷으로 이루어진 것들 등, 인간과 유무형의 존재들의 시간들이라는 작은 제목의 글, 84개 꼭지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태고는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명, 관념과 실제, 환상과 현실, 변화와 반복 등, 다양한 것들이 대립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곳입니다. 시간과 공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고에 대한 지형학적 설명이 담긴 태고의 시간 다음에는 게노베파의 시간입니다. 1914년 여름 태고를 찾아온 러시아 군인들로부터 징집명령을 받은 남편 미하우가 전장으로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태고의 시간들>은 미하우와 게노베파로부터 3대에 걸친 인물들과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1990년대까지 이어집니다. 태고가 독일 군인에게 점령되고 이어서 러시아군이 밀고 들어와 전투가 벌어지면서 태고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삶이 파괴됩니다. 독일군이 점령했을 때는 유대인들이 잡혀가고, 유대인들을 숨겨주는 태고 사람들의 이야기도 전개됩니다.
러시아군과 독일군의 전투장면을 보면서 현재 진행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을 폴란드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작가의 심오한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크워스카의 삶의 방식에 관한 부분입니다. “크워스카는 외부의 것을 내면으로 동화시키면서 세상을 배웠다. 쌓이기만 하는 지식은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거나 단지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저 겉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배우는 사람은 끝없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존재 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19쪽)”
상상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상상이란 따지고 보면 창작의 일부이며, 물질과 영혼을 연결하는 일종의 다리와 같다. 특히 빈번하게, 집중적으로 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경우, 상상은 물질의 파편으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삶의 기류에 융합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뭔가가 뒤틀리면서 변화가 찾아올 때도 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욕망은, 그것이 충분히 강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물론 기대했던 바가 전부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131쪽)”
특히 태고의 지배계급인 상속자 포피엘스키가 시작하는 게임에서는 신화와 성경의 일화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예술은 신화적 언어의 수호자이다”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읽으려 들면 다른 스케줄에 밀려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고 펼치지도 못한 채 반납만 수차례 해 왔던 올가 토카르축의 <태고의 시간들>을 이제서야 완독했다. 혹자는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길래 어려운 책인가? 했더니, 십여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기대치가 급상승, 만일 몰입할 여건이 되었다면 단숨에 읽었을 것이다. 폴란드 출신인 올가 토카르축은 심리학을 전공했고 철학에 조예가 깊으며 칼 융의 사상과 불교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태고의 시간들>은 20세기 가상의 마을 '태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80여 년의 폴란드의 역사(세계 제 1차대전과 2차 대전, 유대인 학살, 사유제산 국유화 등)를 니에비에스키 가의 삼대에 걸친 가족사를 중심으로 이끌어내고 있다.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기록되지 못했던 소수의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역사는 특정한 개인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만들어 가는 것임을 역설한다. 총 84편의 '~의 시간'이라는 소제목으로 구성된 에피소드들이 패치워크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토카르축은 인간의 시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신, 게임, 죽은 자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간을 묘사함으로써 그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엮는다. 개개의 시간을 따로 구성해 시리즈로 출간했더라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게임은 여행의 일종이다.
여행길에서 가끔 선택의 기회가 나타날 것이다.
선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게이머는 때로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도 하리라.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그를 두렵게 만들지도 모른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
그리고 무엇과 마주하게 되느냐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고'라는 가상의 마을은 이 작품의 배경이다. 또한 근현대의 폴란드를 상징하는 것이고 조금 더 확장시켜 본다면 인류 공동체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징적인 '태고'라는 마을의 의미를 작품 속에서는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게임판으로, 미시아의 눈에는 통조림 속의 세계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놀라웠다.
미시아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마치 통조림통의 뚜껑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 신이 사람들을 가두어 놓은 것만 같았다.
<태고의 시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허구와 현실을 통해 마술적 사실주의의 형식을 띄고 있는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서 '마콘도'와 <태고의 시간들>에서 '태고'가 오버랩되어 보이기도 했다. 작품 곳곳에서는 신화, 전설, 성서 등을 차용하여 신비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로, 크스워카를 대지의 신 데메테르로, 그녀의 딸 루타를 페르세포네로, 우클레야를 하데스라는 신화적 인물로 비유하고 있다. 특히 크스워카와 안젤리카라는 식물과의 교합 장면은 압도적으로 인상 깊었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 속에 시간을 묶어 놓는다.
과거 때문에 고통받고, 그 고통을 미래로 끌고 가기도 한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절망을 창조한다.
하지만 랄카는 단지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딜 뿐이다.
랄카의 시간에서는 사람과는 달리 동물은 현재만을 인식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현재에 충실한 삶은 결코 절망의 나락으로 몰고가지 않는다는 의미이리라. 더불어 이지도르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망각이라는 도구로 안도감을 느끼며 자신을 형성해 왔던 것들을 하나씩 분열시키고 결국 영원히 소멸해 버리는 모든 것. 존재와 시간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삶과 죽음 또한 결코 상이한 공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걸까? 책을 덮으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통독하고 싶어지는 욕망을 느꼈다. 물론 벌써 몇 번은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굵직한 맥락 두어 줄로 일단락 시키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말이다.
언급조차 못한 존재들의 시간들도, 사건들도, 와 닿았던 구절도 다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이런 책은 토론을 해야 하는데.... 폴란드 작가 작품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 외엔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지만 올가 토카르축을 통해 폴란드 작가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폴란드 작가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기로 했다. 책 한 권이 나의 온몸을 훑고 나갈 때마다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이런 현기증을 나는 사랑한다.
[태고의 시간들 - 올가 토가르추크] 영원의 시간이 흐르는 강과 닿지 못한 마음들이 모이는 강 기슭
그럴 때가 있다. 애써 꾹꾹 눌러 보낸 마음이 전혀 가닿지 않는 때. 말풍선 옆으로 작은 1은 사라졌지만, 내 마음은 영영 가닿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때가. 글씨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는 모양이 완전한 무위로 돌아가버리는 때가. 획이 해독되지 못한 채 공기 중을 뚜뚜- 정처 없이 가르는 때가. 종종 인간은 그런 애달픈 상황을 겪어야 하는 모양이다.
속도 모르고 강은 흐른다. 저도 저의 배 밑에 무엇을 깔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묵묵히 자갈 위를, 부드러운 흙 위를, 하염 없이 걷는다. 강 가운데 깊은 곳에서는 돌을 지붕 삼아 눈 부신 햇살을 피해 새우잠 자는 물고기들이 자란다. 강가에는 수풀이 자라 강에 흐르는 것이 강 밖을, 강 밖에 사는 것들이 강 안쪽을, 서로 해하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쓰며 세찬 물줄기를 견디어 낸다. 강은 묵묵해서 오랜 세월 바위를 부수고, 자갈을 부수어, 곱디 고운 흙을 슬며시 강가로 떠밀어준다. 그 비옥한 땅위로 인간은 씨앗을 뿌리고 묘목은 강의 젖줄기를 입에 물고 쑥쑥 자란다. 그러니 강이 우리를 낳았다. 태고에 이 땅의 주인이 자연이었고, 그리하여 모두가 자연을 어머니라고 불렀을때부터 인간은 강을 닮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시간이 지나 인간이 어머니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게 되면서 조금씩 불행이 싹을 틔웠다. 강은 말없이 우직하게 흐르고 자비롭지만, 천년을 버틴 바위에는 미끄러운 이끼가 잔뜩 끼어있고, 푸르디 푸르른 용소 한가운데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소용돌이가 친다. 누구를 닮았길래, 한 길 사람 속이 이렇게 복잡할 수 있나. 했더니만, 영락 없이 강을 닮았다. 납작한 조약돌을 들어 강 위에 뜀박질을 시켜도 강은 아무말이 없다. 어두컴컴한 속을 감춘 채 뙤약볕을 물살로 튕겨내며, 달빛만 내리는 깜깜한 밤에도, 그저 흐른다.
올가 토가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검은 강과 흰 강이 흐르고 두 강이 만나서 어우러지는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이 세상의 배꼽, 중심, 태고다. 검은 강과 흰 강이 만나 흐르는 곳에 위치하고, 아주 먼 옛날 새생명과 문명이 태동하던 시절을 가리키는 이 단어가 지명이 되면서, 흑과 백, 선과 악, 시간과 공간이, 좁은 한 사회에 '융합된 상태'로 배경으로 역할한다. 구분이 어렵고 경계가 모호한 '상태 자체'가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 배경은 첫번째로, 1990년대 폴란드를 모델로 하는 이 이야기가 다양한 비현실적인 요소를 메타포로 활용하는데에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거부감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두번째로, 인간은 끝끝내 완벽에 도달하지 못한 신이 만든 창조물이므로 신을 닮아 불완전하고, 결국 신이 태고에 겪었던 시행착오를 인간은 인간대로 겪을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함의한다. 이로써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완전히 균형잡힌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에 대한 고민을 도출하고, 불완전함의 정도에 구애 받지 않는 타인에 대한 이해라는 해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한다.
작가는 신화(특히 그리스로마신화)를 비롯한 여러가지 신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차용하여 작품을 구성했다. 작품은 신화 속의 신들과 신에 가까운 영웅들이 늘 평탄한 삶을 살아내는 것은 아니며, 찬탄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지만 끝끝내는 고독에 몸부림치는 삶의 이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조명하여, 인간의 내재적 고독이나 삶의 곡선이 출렁 대는 것이 능력 부족에서 기인하거나 뛰어난 능력으로 극복 가능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또, 신과 영웅들 또한 절대적인 악도 아니고 절대적인 선도 아닌 중간자적 존재들이며, 따라서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고, 누군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경계상의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이로써, 이 땅 위의 완벽에 가까운 어떤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설령 신이라도, 경계 위에 있지 않은 자가 없다는 소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작품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신을 비롯한 우주 만물을 통틀어서 절대적으로 '어떻다'고 정확히 정의 내려질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으며, 또한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어떻다'고 명명할 수 있는 존재 또한 세상에 없다는 점에서, '모든 타인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 존재가 설사 신적 존재더라도. 나보다 더 완벽해 보이는 존재라할지라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태고의 시간들>도 잘 맞으리라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다. 인간이 갖는 존재론적 숙명에 대하여 마르케스가 조금 솔직하고 거칠게, 그리고 부계사회에 초점을 맞춰 가부장적으로 써내려갔다면 올가는 시적으로, 맨부커 수상자답게 서정적으로, 상대적으로 유하게, 세밀하게, 그리고 모계사회에 초점을 맞춰 써내려간다. 올가의 포스트페미니즘적인 성향이 이야기의 얼개 뿐 아니라 표현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출발점을 잘 잡아서였는지, 태고에서 시작된 이야기라서, 혹은 신화를 닮은 이야기라서 그런것이었는지, 올가는 부커상에 이어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태고의 시간들>은 또다른 신화가 되었다.
같은 말을 달리 적어보고, 포기했다가 마음 바꿔 한참을 애써보기도 하다가 생각했다. 이 마음이 완전한 무위 사이에 덮여 어느 쓸쓸한 태고의 강기슭에 묻혀도 어쩌면 괜찮을 것도 같다고. 태고의 시간에 에워 싸인채로 강바닥에 가라앉아, 다른 시간들 사이로 흐르는 해독되지 못한 마음들과 묵묵히 흐르는 세월 속에서, 차츰 부수어져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종종 인간과 인간의 마음은 그런 애달픈 순간을 겪어야 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