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 책에 “바울을 깊이 고찰하다”(Thinking through Paul)라는 원제를 붙였을까? 이유는 그 제목이 이 책을 구성하는 모든 장의 특징을 규정하는 두 시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첫째, “바울을 깊이 고찰하다”라는 말은 “바울에 관하여 생각한다”는 의미요, 그의 서신을 샅샅이 살펴보면서 그가 각 서신 속에서 하고 있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바울은 연구 대상이자 깊이 고찰할 대상이며 탐구 대상이다. 그러나 때로는 또 다른 의미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이 경우에 “바울을 깊이 고찰하다”라는 말은 “바울이 생각했던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요, 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의 사유 패턴을 따라 생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바울은 연구 대상이라기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일에 관하여 우리 자신이 가진 생각을 뒤흔드는 촉매제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을 깊이 고찰한다”는 말이 지닌 이 두 의미는 서로를 보완하며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첫 번째 의미에서) 바울을 깊이 고찰하면 할수록, (두 번째 의미에서) 바울을 더욱더 깊이 고찰할 수 있다.
_들어가며 중에서
물론 우리는 바울이 그의 다메섹 체험을 구약에 나오는 소명 내러티브와 비슷하게 인식하고 그곳에 나오는 말과 비슷한 용어로 이야기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아울러 다메섹 체험 전과 후에 바울이 전개하는 사상과 실제 활동에 상당한 연속성이 있다는 점에도 완전히 동의한다. 하지만 바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를 묘사하는 말로서 ‘회심’이라는 단어가 적절치 않다고 하는 것은 쓸데없이 이 용어의 활용 폭을 좁히는 듯하다. 무엇보다 그는 이전에 그가 파괴하려 했던 믿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시간이 흐르자 그는 ‘이전에’ 유대교 안에서 보냈던 삶을 이야기하고, 그 삶을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자신의 절박한 열망과 비교하여 하찮게 여긴다고 이야기하게 된다. 더욱이, 바울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 성격을 가졌다는 점은, 바울의 다메섹 체험과 이후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보낸 삶을 서술할 때 변화를 나타내는 언어(‘회심’)와 부르심을 나타내는 언어(‘소명’)를 결합하는 것이 올바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_01. 바울의 삶과 사역 중에서
이제 감사를 살펴보자.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오는 두 감사 중 첫 번째 감사문을 보자마자 바울서신의 기둥과 같은 말인 믿음, 사랑, 소망을 만난다. 바울은 1:2-3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으로 만들어 낸 일, 사랑이 원동력이 된 [그들의] 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품은 소망이 불러일으킨 [그들의] 인내”를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린다. 이 3개1조(triad, 믿음, 사랑, 소망)를 이 같은 순서로 제시한 데는 신학 논리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이어지고, 소망 안에서 완성된다.
_02. 데살로니가전·후서 중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지닌 의미가 깊디깊은 우주 안으로 스며든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 주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정체성을 삼켜 버리는 ‘종말의’(apocalyptic) 차원을 가진다. 바울은 이를 갈라디아서 6:14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로 이런 이해와 능력이 어우러진 종말의 틀 속에서 그들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리라고 본다. 때문에 그는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에토스와 실천이 ‘새 창조’를 포괄한다. 바울은 예수 따름이들의 공동체가 성령에 감동된 공동체라는 근본 성격을 잃어버리면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보았다.
_03. 갈라디아서 중에서
일부 그리스도인이 바울의 복음을 “난 아무것이나 해도 될 권리가 있다”는 슬로건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바울은 이 슬로건에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다”와 “그러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지는 않는다”라는 단서를 단다. 단서들이 등장하는 맥락을 살펴보면, 그것들은 고린도 교인들의 뒤섞인 생각에 한 몸인 공동체를 생각하는 정신을 불어넣는다. 바울이 모든 것이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지는 않는다고 강조한 까닭은 곧 예수 따름이 공동체의 안녕을 염두에 두라는 의미다. 바울은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려는 행동은, 다른 이들을 대할 때 십자가를 중심으로 삼는 자세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 때문에 그는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쓴다. 오로지 영예를 얻는 일을 추구하는 것에 푹 빠져 버린 세계에서는 이런 가르침이 어리석은 말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를 공동체 차원에서 적용하는 모습이다.
_04. 고린도전서 중에서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후서가 서로 별개인 두 개의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견해를 가지고 논의를 펼쳐 보도록 하겠다. 본문과 본문을 이어 주는 경첩을 통해 느슨히 결합해 있는 고린도후서 1-9장과 10-13장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관계가 두 단계였으며 각 단계가 서로 다른 양상을 띠었음을 알려 주는 증언이자, 양자의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바울이 순간순간 달리 채용했던 목회 전략들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더구나 고린도후서 10-13장이 사실은 ‘눈물 어린 서신’의 주요 부분일 가능성이 높다(지금은 그 서신의 간결한 첫머리가 존재하지 않지만, 어쩌면 마무리 부분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10-13장이 1-9장보다 먼저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순서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10-13장을 쓸 당시 고린도 교인들과 지극히 까다롭고 위험한 관계에 있었다가 그들과 깨지기 쉬우면서도 화해할 가망이 보이는 관계를 누리기 시작하는 단계로 옮겨 갔음을 시사한다.
_05. 고린도후서 중에서
바울은 예수를 속죄소로 묘사함으로써 놀라울 정도로 대담한 움직임을 보인다(이와 같은 묘사는 어쩌면 초기 예수 운동의 신학 주장을 되풀이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에서 제시하는 맥락을 보면, 예수가 처리하신 죄는 ‘죄라는 힘’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는 모든 사람?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죄였다.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대속죄일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새로운 대속죄일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민족 그룹과 관련이 있으며, 하나님의 선한 피조 세계 안에서 경건하지 않은 목적을 이루려고 활동하는 죄라는 힘(그리고 우주의 다른 세력들)과 관련이 있다. 이제는 이런 파멸의 모체에서 구속 또는 “속량”(해방)을 받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고,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권 행사를 통해 (어쩌면 NIV가 3:22 각주에서 밝힌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구속과 해방을 누릴 수 있다.
_06. 로마서 중에서
3장 첫 부분에서 다음 본문으로 넘어가는 모양새가 분명 어색하기는 하지만, 빌립보서가 여러 서신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시나리오를 만족스럽지 않게 여기는 이가 늘고 있다. 아울러 빌립보서의 통일성을 지지하는 이들은 서신 끝에 나온 감사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듯 문제가 되지는 않으며, 특히 바울이 이 서신 서두에서 표명하는 감사를 생각하면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폴리카르포스가 한 말처럼,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당연히 여러 서신을 썼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정경의 빌립보서를 반드시 콜라주 작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우리를 포함하여 더욱더 많은 해석자가 빌립보서를 단일 서신으로 보려고 한다. 빌립보서 안에 그리 매끄럽지 않은 전환 부분이 몇 곳 있음은 인정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보는 정경의 빌립보서는 아무 생각 없이 이것저것 뒤섞어 놓은 잡탕이 아니다. 실제로, 빌립보서가 되풀이하는 여러 주제와 단어는 이 서신이 단일 작품임을 시사한다.
_07. 빌립보서 중에서
바울은 빌레몬을 ‘형제’라 부르면서, 빌레몬이 자신에게 “주 안에서…기쁨[유익]”을 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표명한다. ‘유익’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로 onaim?n(‘이익을 주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oninamai에서 나온)이다. 이것을 말해 두는 이유는 바울이 또 다른 언어유희를 구사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도 오네시모의 이름을 사용하여 언어유희를 펼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사도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자신에게 다시 보내 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요구하는 셈이다(그리 은근한 요구도 아니다). 이렇게 읽으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마음(splanchna)에 생기를 넣어 주십시오”라고 요구한 20절의 마지막 문언과도 일치할 것이다. 바울은 이제 빌레몬이 다른 신자들을 위해 했던 일?곧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했던 일?을 바울 자신을 위해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빌레몬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이 바울 자신의 마음인 한 사람, 곧 오네시모를 자신에게 되돌려 보내면 자신의 마음이 새로워질 것이라고 제시하는 듯하다.
_08. 빌레몬서·골로새서 중에서
에베소서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쓴 서신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쓴 것일까? 어쩌면 처음에는 라오디게아의 교인들에게 썼을지도 모른다. 마침 골로새서 4:16은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게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고 독려한다. 게다가, 2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의 가장 큰 대적이었던 마르키온은 ‘에베소
서’를 ‘라오디게아서’라고 불렀다. 혹은 어쩌면 에베소서는 소아시아 서부 지역 신자들이 돌려 읽을 회람서신(circular letter)으로 썼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지역의 중심을 이루는 대도시이자 서신을 회람하고 보존했던 곳 가운데 하나인 에베소와 묶이게 되었을 수도 있다(그랬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_09. 에베소서 중에서
디모데전서 2:8-15이 여자에게 주는 가르침은 확실히 특정한 정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가 여자의 머리 스타일, 보석, 옷차림에 관해 제시하는 관념을 이전에 통용되었던 규범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대다수 지역에 있는 대다수 회중은 이 특별한 관심사를 자신들과는 무관하다 여기고 그렇게 다룰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에 ‘거짓 교사’가 존재하면서 이들이 교회에 미친 영향이 디모데전서가 제시하는 인식과 여자에게 주는 가르침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령, “속이는 자”가 이 서신이 언급하는 여자들을 속이고 있었다면, 그들이 공동체가 모인 자리에서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설교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목회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게다가 디모데전서 4:3이 귀띔하듯이 거짓 교사가 혼인을 금지하고 있었다면, 2:15이 (비록 완전하지는 않아도) 더 수긍이 간다. 혹자는 저자가 이 구절에서 여자와 관련해 이야기하는 구원이, 거짓 교사가 (혼인과) 출산을 통해 오고 계속해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 적절히 거함으로써 온다고 가르친 구원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_10. 목회서신: 디도서?디모데전·후서 중에서
많은 바울 해석자들은, 바울서신에 들어 있는 특정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을 언급한다고 본다면 그 본문들이 더욱 풍성한 신학 차원을 제공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로마서 3:21-26 같은 본문은 하나님의 신실한 의가 단순히 “모든 믿는 자에게” 뚫고 들어온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뚫고 들어온다고 말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예수를 단지 “믿음으로 받을” 대속제물로 내놓으셨다고 말하지 않고(물론 이것도 옳은 말이다) “[그의] 신실함을 통해” 내놓으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바울의 신학 작업은 믿음/신실하심의 삼각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_11. 바울이 펼치는 신학 담론의 묵시 내러티브 중에서
하지만 바울을 ‘대체 신학’을 밑받침하는 근거로 끌어들일 때 발생하는 큰 문제는, 바울이 대체 신학이라는 이슈를 중요하게 다루는 곳으로 보이는 유일한 본문에서 하는 말과 그 신학이 어긋난다는 것이다. 로마서 11장을 보면, 바울은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인 예수 따름이와 달리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의 목적에서 배제하셨으며 자신의 언약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이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활용해 하나님 자신의 구원 목적을 이루기로 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의 뜻이 특히 (비록 아이러니하지만) 자신의 언약 백성을 통해 온 세상 속에서 역사하게 하셨음을 증명한다.
_12. 바울의 신학 내러티브와 그 시대의 거시 내러티브 중에서
바울은 예수 따름이가 십자가를 따라가는 도덕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야 비로소 성경을 올바로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추측하건대, 바울은 바로 이런 특징이 자신의 성경 해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자기를 내어 주신 그리스도가 바울 안에 들어와 사시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바울 자신의 성경 해석도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의 성경 해석은 예수 그룹이 그리스도를 닮아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반면, 다른 성경 해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1-2장에서 우선 그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뒤이어 3-4장에서 성경 해석을 전개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울의 성경 해석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를 그 자신의 삶 속에서 체현한 결과물이다.
_13. 바울의 신학 내러티브와 예수 그룹의 미시 내러티브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