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낸 여성의 삶
그리고 새로운 도약
주인공 로즈는 앨리스 먼로가 유년기를 보내고 떠났다가 노년에 다시 돌아와 정착한 곳인 윙엄을 모델로 한 온타리오주 핸래티의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가족으로는 가구 수선 일을 하는 아버지, 로즈가 아기일 때 아버지와 결혼해 집을 개조해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새어머니 플로, 그리고 이복동생 브라이언이 있다. 아버지는 헛간에서 일하며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사를 읊고 “세상의 어떤 책이든 집어들어 제목을 읽어보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딸 로즈에게 “너무 똑똑해지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억누르던 동경과 공상 같은 “최악”의 성향이 딸에게서도 보인다는 것, 그리고 딸은 그것을 억누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분노와 좌절, 혐오감마저 느낀다.
로즈가 학생일 때 병으로 세상을 뜬 아버지와 달리, 새어머니 플로는 로즈가 대학에 진학하고 결혼과 이혼을 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그 세월 내내 고향 핸래티의 집에 머문다. 어린 로즈가 집에 한아름 가지고 오는 책들을 경멸하고 로즈의 “시건방진 행동, 무례함, 지저분함, 자만심”을 지적하며 억누르려 하던 플로는 훗날 성인이 된 로즈에게 현재의 삶과 떠나온 삶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된다. 로즈는 새로운 친구들 앞에서 플로의 편지를 읽으며 조롱하기도 하고 자신의 새로운 삶을 보여줘 플로를 주눅들게 하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은 아직 플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스럽게 아찔해진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 로즈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 패트릭을 만나 결혼하지만 극심한 갈등과 중산층의 폐쇄적 삶에 대한 환멸 때문에 십 년 만에 이혼한다. 표제작인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 ‘거지 소녀’는 무력하고 수동적인 거지 소녀와 그녀를 사랑한 코페투아왕을 그린 동명의 그림에서 따온 것으로, 패트릭은 로즈를 거지 소녀에 비교하며 “네가 가난해서 좋다”고 말한다. 결국 패트릭은 로즈라는 사람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로즈에게 순종적인 이미지를 덧씌워 그 이미지만을 사랑한 것이다. 하지만 로즈 또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심정으로 결혼을 결심했다. 나중에, 패트릭과의 파경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로즈는 “선택권을 가진 이들은 중산층 사람들뿐”이라고, “자신에게 토론토행 기차표를 살 돈만 있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즈의 마음 한구석에는 패트릭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시험해볼 기회를 거부하고 싶지 않다는 허영이 있었기에, 두 사람의 결혼이 파국을 맞은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외롭고 보잘것없을지언정 가장 자신다울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로즈의 여정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자리를 구한 로즈는 패트릭과 이혼한 후 낯선 지역으로 이사를 가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돌며 배우이자 교사로 살아가는 로즈의 삶은 안정적이지도 윤택하지도 않다. 얼룩지고 허름한 아파트는 추운 날씨에도 라디에이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배우로 버는 수입은 터무니없이 적으며 강의를 나가는 대학에서는 학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급여를 깎인다. 그리고 그 삶에서 로즈는 끊임없이 외로워하고, 누군가에게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하고, 그러고 나서도 다시 다른 사람을 찾아 절박한 마음으로 헛된 희망을 품는다. 새로운 관계에 로즈가 품는 환상과 그 환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그녀가 들이는 노력은 애처롭고 딱한 마음이 들 정도로 절박하다. 매번 실패하고 실망하고 때로는 그 실망이 두려워 도망치면서도 로즈는 “도대체 배우는 게 없는 사람”처럼 다시 또다른 관계에 모든 희망을 건다. “지금껏 어떤 남자 때문에 떠나야 해서 혹은 떠나는 것이 두려워서 얼마나 많은 황당한 편지를 썼는지, 얼마나 많은 부풀린 핑계들을 찾았는지”를 생각하며, 그런 자신이 어리석다고, 불필요한 도피를 감행하고 돈을 써버리고 위험을 감수했다고 인정하면서도 행복에 대한 환상 때문에 아주 작은 가능성이 보여도 매달리고 만다.
앨리스 먼로는 이런 로즈의 삶을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 시대적 배경이나 로즈의 열악한 사회적 · 개인적 환경을 고려하면, 넉넉하진 않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는 로즈의 삶을 좀더 긍정적으로 그려낼 법한데도, 먼로는 시종일관 냉정하고 태연한 목소리로 로즈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허영과 나약함을 그대로 다 드러낸다. 로즈가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수치심을 느끼면 느끼는 대로 서술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로즈 스스로의 생각을 빌려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롭고 초라할지언정 그 삶은 로즈가 선택한 것이다. 어릴 적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라는 멸시어린 질문을 새어머니 플로로부터, 고등학교 시절 교사로부터 듣고 자란 로즈가 직접 부딪치고 살아본 삶, 스스로 선택하고 끝까지 들여다본 삶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로즈는 자신이 비록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질문을 들어야 하는 하찮은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당신에게는 내 삶에 대해 그렇게 말할 권리가 없다고, 그 모든 수치와 비아냥을 견뎌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 삶을 살아보겠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사람이기에, 그런 로즈의 목소리는 더욱 커다란 공감과 울림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