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이후 매스미디어의 발달도 왕실의 새로운 이미지 구축을 도왔다. 황색언론이 등장하여 왕실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보이게 했으며, 철도의 확장과 자동차의 증가는 왕실의 교통수단인 마차에 ‘낭만적인 황홀함’을 부여했다. 1876년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제가 된 후 영국 왕실의 의식은 제국의 의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영국은 전 세계로부터 도전받기 시작했고 국제적 경쟁이 첨예해진 시기였기 때문에, 그러한 우려를 숨기기 위해서 오히려 왕실의식의 강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촉진된 국제경쟁은 수도를 대규모로 재건하는 일에서도 나타났다. ---p.94
디즈레일리가 “왕관에 박힌 보석jewel in the imperial crown”이라고 부른 인도는 영제국의 꽃이었다.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인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제국이었고, 영국인들도 인도를 다른 식민지와는 다르게 생각했다. 인도는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인 1600년 특허장을 받은 동인도회사가 시작한 사기업의 상업적 동기에서 생겨난 산물이었다. 동인도회사가 인도에 침투하기 시작한 17세기는 무굴제국의 전성기였지만, 아우랑제브의 사망(1707) 이후 와해되기 시작했다. 동인도회사는 무굴제국과 관계를 맺고 교역권을 얻었는데, 제국의 지배권이 인도 전역에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곳의 지방통치자들과 교섭하는 한편 네덜란드, 포르투갈 및 프랑스와의 경쟁을 통해서 결국 18세기 중엽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p.134
한 역사가는 헨리를 “멋지고, 당당하고, 낭비가 심하고, 호색적이고, 게으르고, 시기심이 많고, 교활하고, 탐욕스럽고, 어리석을 정도로 허영심에 가득 찬” 사람이라고 묘사했는데, 이것은 정곡을 찌른 표현이다. 그는 세 가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군사적인 것으로서 그는 최신 발명품인 대포나 포탄 등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헨리의 두 번째 관심은 신학이었는데, 개신교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의 세 번째 열정의 대상은 여성이었다. 그는 그칠 줄 모르는 욕정으로 여자들을 추구했는데, 그의 욕망에 비하면 6명의 왕비는 수가 너무 적은 편이었다.---p.395
엘리자베스는 처녀왕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음악가들과 시인들이 앞다투어 그녀를 ‘처녀왕’, ‘요정의 여왕Fairy Queen’으로 칭송했다. 그녀는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 스웨덴 왕, 프랑스 왕자들로부터 청혼을 받았지만, 그것들을 외교적으로 이용하면서도 심각하게 결혼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왕위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을 수없이 보고 들어온 의회는 후계를 염려해서 여왕에게 결혼하도록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느 외국대사는 엘리자베스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결혼할 만큼 한 남자를 사랑할 것 같지는 않다”고 진단했다.---p.409
산업화 초기에 기계화를 촉진한 부문은 면직물, 석탄 및 철강산업이었는데, 1820년대 철도산업이 첨가되었다. 최초로 증기기관이 철로 위의 마차를 끄는 데 사용되었을 때(1825), 이 값싸고 빠른 운송수단이 가져다줄 이익은 기업가들 눈에 명백했고, 철도건설이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1마일당 300톤의 강철과 엄청난 양의 석탄, 수천 명의 노동력이 필요한 철도는 제2단계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기차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대중의 삶을 바꿔놓았다. 1850년에는 런던에서 맨체스터까지 5시간 반, 에든버러까지 11시간이 걸리는 등 국내의 모든 곳이 하루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제 중간계급에게 여행은 현실이 되었고, 그들의 세상은 대단히 넓어졌다.---p.503
1979년부터 11년 반 동안 영국을 통치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는 역대 수상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가장 강한 영향력을 남긴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대처는 영국 역사상 자기 이름에 ‘주의-ism’를 남긴 유일한 정치인이다. 대처는 합의의 시대의 모토였던 완전고용, 혼합경제, 복지국가, 그리고 노조와의 타협을 내던져버리고 자유시장경제, 통화주의 정책, 공공지출의 축소, 권위주의적 정부로 대체했다. 지지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케인스 시대를 종결시킨 점을 그녀의 가장 큰 업적으로 드는 반면, 반대자들은 그녀의 이념적 시계가 1937년경에 멈추어버렸다고 비난했다. 어쨌든 대처의 수상 임기가 시작된 1979년이 영국 근대사를 바꾼 전환점이 된 것은 확실하다.
---p.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