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과 도드의 영원한 지혜
벤저민 그레이엄과 데이비드 도드가 ≪증권분석≫을 쓰고 75년이 지났는데도, 이들에게 깊이 은혜를 입은 현대 가치 투자자들은 더 증가하고 있다. 그레이엄과 도드는 당시 전인미답의 금융 황무지에 질서를 세우려고 노력한 헌신적이고도 통찰력 넘치는 두 사상가였다. 두 사람이 붙인 불꽃이 이후 가치 투자자들에게 길을 밝게 비춰주고 있다. 오늘날에도 ≪증권분석≫은 예측할 수 없고 변덕스러우며 위험한 금융시장에서 길을 안내하는 소중한 지도로 사용되고 있다. 흔히 “가치투자의 바이블”로 불리는 ≪증권분석≫은 지극히 철저하고 자세히 쓰인 책으로서, 고금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사례들은 대부분 오래된 내용이지만, 그 교훈은 영원하다. 문체도 무미건조한 편이지만,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소중한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다. 금융시장은 1934년 이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모하였지만, 그레이엄과 도드의 투자 방식은 오늘날에도 놀라울 정도로 잘 적용된다.
오늘날에도 가치투자는 그레이엄과 도드의 시대처럼, 실제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증권을 사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1달러짜리를 50센트에 사는 식이다. 염가증권에 투자하면 “안전마진(margin of safety)”을 얻게 되며, 이는 실수, 부정확, 불운, 경제와 주식시장의 변동에 대비하는 완충재가 된다. 가치투자가 기계적으로 염가증권을 찾아내는 수단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심층적인 기본적 분석, 장기 투자, 위험 축소, 군중심리 억제를 강조하는 종합투자철학이다.
주식시장에는 단기 수익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사람들은 가치에 상관없이 가격이 오른다는 희망을 바탕으로 투자가 아니라 투기에 휩쓸리게 된다. 대개 투기자들은 주식을 종이쪼가리로 간주하여, 기업의 실체와 평가 기준을 무시한 채 수시로 사고판다. 하락 위험을 무시하는 투기 기법들은 특히 대세 상승장에서 유행한다. 황홀한 상승장에서는 절제력을 발휘하여 엄격한 평가 기준을 지키면서 위험을 회피하는 사람이 흔치 않으며, 이 사람 저 사람이 이런 기준을 내던지고도 벼락부자가 될 때에는 더욱 그렇다. 결국, 강세장에서는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하기 쉽다.
근래에는 미술품, 희귀 우표, 와인 등 가격이 상승할 만한 자산이라면 무엇이나 투자 대상에 포함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가치도 확인할 수 없고, 현금흐름을 창출하지도 않으며, 전적으로 매수자의 기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므로, 투자가 아니라 투기 대상일 뿐이다.
투기자들은 단기 수익에 몰두하지만, 가치 투자자들은 손실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위험을 회피하는 투자자들은 이익 가능성보다도 손실 위험을 더 중시한다. 자본을 어느 정도 모은 사람은 대개 이익이 증가할 때 얻는 기쁨보다 손실이 발생할 때 겪는 고통이 더 크다. 동전 던지기로 재산을 두 배로 불리거나 모두 날리는 게임이 있다면, 당신은 이 게임을 하겠는가? 사람들은 위험을 회피하므로, 거의 모두가 이런 도박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위험회피 성향은 인간 본성에 깊이 새겨진 특징이다. 그런데도 시장에 투기 열풍이 불면 저도 모르게 위험회피 성향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치 투자자들은 증권이 투기 수단이 아니라 기업의 소유권 일부라고 간주한다. 이런 태도가 가치투자의 핵심이다. 회사 일부가 헐값에 매물로 나오면, 회사 전체가 헐값에 나온 것처럼 생각하고 평가하는 편이 좋다. 이런 방식으로 분석하면 가치 투자자들은 단기 수익이 아니라 장기 실적에 계속 집중할 수 있다.
그레이엄과 도드 철학의 뿌리는, 결국 금융시장이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원칙이다.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은 정확할 때도 있고, 정확하지 않을 때도 있다. 단기적으로는 시장이 매우 비효율적이어서, 가격과 가치가 크게 벌어질 수도 있다. 뜻밖의 사건 전개, 불확실성 증가, 자본 유출입 등으로 가격이 위아래로 크게 벗어날 수 있다. 그레이엄과 도드는 말했다. “가격이 투자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인 경우도 많다. 예컨대, 한 종목이 어떤 가격에서는 투자로 분류되지만, 다른 가격에서는 투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레이엄에 의하면, 시장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저울로 보는 사람들은 감정에 따라 몰려다니는 군중에 속한다. 반면에 시장을 (인기 경연이 벌어지는) 투표소로 보는 사람들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시장심리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다.
누구나 가치 투자자가 될 수 있을 듯 보이지만, 가치 투자자의 핵심 특성인 인내, 절제력, 위험 회피는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듯하다. 가치투자 기법을 처음 배울 때, 즉시 공감하는 사람도 있고 공감하지 않는 ?람도 있다. 절제력과 인내심을 계속 유지하는 사람도 있고,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워런 버핏은 유명한 글 “그레이엄-도드 마을의 위대한 투자자들(The Superinvestors of Graham-and-Doddsville)”에서 말했다. “1달러 지폐를 40센트에 사는 아이디어를 설명해주면, 이 말을 즉시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마치 면역성과 같다. 즉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몇 년에 걸쳐 설명하고 실적을 보여주어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증권분석≫을 읽으면서 공감한다면 (투기를 억제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도 가치 투자자 기질이 있다는 뜻이다.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 책을 통해서 당신에게 적합한 투자 지평이 어디인지 이해할 수 있으며, 가치 투자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타당한 기법
아마도 ≪증권분석≫이 이룬 가장 빼어난 업적은 그 교훈이 영원하다는 사실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가치 투자자들은 그레이엄과 도드의 가르침을 매우 다양한 환경, 국가, 자산유형에 적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 사실에 두 저자는 기뻐할 것이다. “불가사의한 미래의 시험을 견뎌낼” 원칙을 제시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1992년 유명한 가치투자회사 ‘트위디, 브라운 컴퍼니’는 44개 연구결과를 묶어 “효과가 있었던 투자”라는 제목으로 자료를 발표하였다. 이 분석에 의하면, 효과가 있었던 투자는 매우 단순했다. 싼 주식(주가순자산비율PBR, 주가수익비율PER, 배당수익률 기준)이 비싼 주식보다 확실하게 앞섰고, 실적이 부진했던 종목들(3년과 5년 기준)이 이후에는 최근 실적이 좋았던 종목들을 앞섰다. 다시 말해서 가치투자가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랜 기간 가치투자철학을 고수하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가치투자의 기본원리를 받아들였다가 내던진 투자자가 거의 없었다.
오늘날 1930년대 금융시장에 대한 그레이엄과 도드의 설명을 읽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경기가 침체하고, 사람들이 위험을 극도로 회피하며, 기업도 모호하고 구식이라서, 마치 이상하고 낯선 과거 시대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겉보기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결국, 당장 내일이라도 이상하고 낯선 환경이 얼마든지 펼쳐질 수 있다. 투자자들은 시장이 내일도 오늘과 매우 비슷할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일반통념이 완전히 뒤집히고, 순환고리가 끊어지며, 주가가 평균으로 회귀하고, 투기 행태가 나타난다. 이런 때에는 오늘의 시장이 어제와 딴판이 되므로, 투자자들은 속수무책이 된다. 그레이엄과 도드는 말했다. “우리는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내내 경고했다. 이런 착각에 빠지면 금융세계로부터 응징당한다.” 가치투자철학이 특히 유리한 때가 바로 이런 혼란기다.
≪증권분석≫이 출간된 1934년, 그레이엄과 도드는 5년 동안 증권시장 최고의 시점과 최악의 시점을 모두 경험했다. 시장은 계속 상승하여 1929년에 절정에 도달한 다음 1929년 10월 붕괴했으며, 이후 혹독한 대공황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투자가치가 있는 수백 수천 가지 주식, 우선주, 채권을 분류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놀랍게도 오늘날 가치 투자자들도 이와 거의 같은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두 사람이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에 적용했던 원칙은 21세기 초 세계 자본시장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부동산과 비상장주식 같은 비유동성 자산에도 적용될 뿐 아니라, 심지어 ≪증권분석≫을 집필하던 시점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파생상품에도 적용된다.
투자분석에는 “순운전자본” 같은 고전적인 기준도 필요하지만, 가치투자는 숫자만 다루는 기법이 아니다. 회의적 관점과 판단도 항상 필요하다. 그 이유는 첫째,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모두 재무제표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고자산이 진부화할 수 있고, 부채가 누락될 수 있으며, 자산가치가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가될 수도 있다. 둘째, 평가는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다. 기업의 가치는 수많은 변수에 좌우되므로, 대개 범위로 측정된다. 셋째, 모든 투자의 성과는 미래에 결정되는데, 미래는 확실하게 예측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세심하게 분석해서 투자해도 이익을 내지 못하기도 한다. 싼 주식에는 대개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컨대 사업모델 붕괴, 숨은 부채, 장기간 이어지는 소송, 무능하거나 부패한 경영진 등이다. 투자자는 절대로 회사를 완벽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며, 끊임없이 추가 정보를 찾아야 한다. 마침내 성공하는 가치 투자자들은 절제력과 인내심으로 자세하게 기업을 조사하고 평가하며, 정교하게 민감도를 분석하고, 진리에 충실한 마음을 유지하며, 장기간 분석과 투자 경험을 쌓는 사람들이다.
흥미롭게도, 그레이엄과 도드의 가치투자 원칙은 금융시장 너머서도 적용된다. 예컨대 프로야구 선수시장에도 적용되는데, 마이클 루이스는 2003년 베스트셀러 ≪머니볼Moneyball≫에서 생생하게 설명하였다. 주식시장과 마찬가지로, 프로야구 선수시장도 똑같은 이유로 비효율적이다. 두 시장 모두 가치를 평가하는 통일된 방식이 없으며, 한 가지 척도만으로는 전체를 평가할 수 없다. 두 시장 모두 정보는 산더미처럼 많지만, 정보 평가방식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시장에서 사람들은 데이터를 잘못 해석하고, 분석 방향을 잘못 잡으며, 마침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주식시장에서처럼 야구시장에서도 홀로 무리에서 벗어났다가 비난받을까 두려워서 과도한 가격을 치르는 사람이 많다.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흔히 감정적인 이유로 결정을 내린다. 이들은 뛸 듯이 기뻐하기도 하고 공포에 휩싸이기도 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단기 지향적이다. 이들은 평균회귀를 이해하지 못한다. 금융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야구시장에서도 가치투자자들은 장기에 걸쳐 탁월한 실적을 거두었다. 그레이엄과 도드의 가치투자 원칙이 야구에도 적용되는 모습을 보면, 이 원칙이 보편적이고 영원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오늘날의 가치투자
대공황이 한창 진행되던 기간에는 주식시장과 국가 경제가 지극히 위험했다. 주가가 폭락했고 기업활동도 갑자기 위축되었으며, 이렇게 심각한 상태가 장기간 이어질 수 있었다. 낙관론자들은 계속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손실만 보지 않아도 성공이었다. 투자자들은 내재가치보다 대폭 할인된 가격에 주식을 사들여 안전마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잘못될 온갖 가능성에 대비해서 이런 안전마진이 필요했다. 시장이 최악이었을 때에도 그레이엄과 도드는 원칙을 충실하게 지켰다. 경제와 시장이 때로는 고통스러운 하강기를 경험하지만, 이런 하강기를 견뎌내야 한다는 신념도 그 원칙의 하나였다. 두 사람은 그 암흑기에 경제와 주식시장이 결국은 반등한다는 확신을 글로 표현했다. “우리는 이 책을 쓰면서, 금융시장 폭락 상태가 영원히 이어진다는 대중의 확신에 맞서야 했다.”
기업 실적이 악화하고 싼 주식이 더 싸지는 경기 하강기를 투자자들이 견뎌야 하는 것처럼, 투자자들은 싼 주식이 드물고 투자자본이 넘치는 경기 상승기에도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역사적 기준으로 볼 때 근래에 금융시장은 놀라운 실적을 보였으며, 막대한 신규자본이 시장에 유입되었다. 지금은 막대한 자본(세계 전체로 보면 수조 달러)이 가치투자 방식을 따르고 있다. 수많은 가치투자 자산운용사와 펀드회사, 약 9,000개에 이르는 헤지펀드, 매우 성공적으로 운용되는 대규모 대학기금과 개인자산관리회사가 있다.
가치 투자자라고 해서 모두 같지는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언급했던 “그레이엄-도드 마을의 위대한 투자자들”에서, 버핏은 성공한 가치 투자자들은 수없이 많지만, 포트폴리오는 거의 겹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름없는 “장외주식”을 보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형주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세계시장에 투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동산이나 에너지 산업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사람도 있다. 컴퓨터 통계분석으로 값싼 종목을 찾아내는 사람도 있고, “사적시장가치(private market value)”(기업을 통째로 살 때 치르는 가격)를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기업을 변화시키려고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행동주의자도 있고, 촉매(분사, 자산 매각, 대규모 자사주 매입, 신규 경영진 영입)가 있는 저평가 종목을 찾는 사람도 있다. 물론 가치 투자자 중에도 재능이 더 우수한 사람이 있다.
이제 가치 투자자 집단은 수십 년 전처럼 소수집단이 아니다. 따라서 가치 투자자들 사이의 경쟁이 시장의 비효율성과 가격 오류를 바로잡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지금처럼 풍부한 자본과 기술을 갖춘 투자자들이 많은 상황에서, 가치 투자자들의 앞날은 어떠할까?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밝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가치 투자자들도 증가하고 있지만, 가치투자에 무관심한 투자자들은 더 증가하고 있다. 성장 투자자, 모멘텀 투자자, 시장지수 투자자를 포함해서 대부분 펀드매니저는 가치투자에 관심이 거의 없다. 이들은 오로지 기업의 이익 증가율, 주가 모멘텀, 시장지수 편출입에만 몰두한다.
둘째, 일부 불운한 가치 투자자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펀드매니저가 때로는 분기나 매월처럼 터무니없이 짧은 주기로 실적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가치투자가 성과를 보려면 대개 오랜 기간이 걸리므로, 성급한 투자자에게는 가치투자 전략이 아무 소용도 없다.
셋째, 인간의 본성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자본시장은 주기적으로 대규모 광기에 휩싸인다. 1980년대 말 일본주식, 1999~2000년 인터넷과 기술주, 2006~2007년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최근의 대체투자가 그런 예다. 역발상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매우 유능한 투자자도 실적이 계속 부진하면 움츠러든다. 이들이 시장에서 받는 압력은 엄청나다. 펀드매니저들은 무리에서 너무 이탈하면 자리를 빼앗길지 모르므로 신중을 기한다. 다양한 제약에 얽매여 가치투자를 추구하지 못하는 펀드매니저들도 있다. 예컨대 저가주, 소형주, 배당을 하지 않거나 손실이 발생한 회사의 주식, 투자등급 미만의 채권에 투자하지 못한다. 또한, 분기 말에 손실 종목은 저평가 상태더라도 팔고 이익 종목은 고평가 상태더라도 더 사들여 포트폴리오를 치장하는 펀드매니저들도 많다. 이런 제약 요소 때문에 잠재 경쟁자들이 중도탈락하는 현상은 장기적 관점으로 가치투자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치열해지는 경쟁이 가치 투자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투자 지평이 더 넓고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그레이엄은 미국의 상장 주식과 채권에만 투자했다. 지금은 미국에 상장된 주식만 수천 종목이며, 세계시장에는 수만 종목이 있고, 회사채와 자산유동화증권도 수천 종목이나 된다. 은행 대출 같은 과거의 비유동자산도 지금은 정식으로 거래된다. 필요에 따라 설계되는 맞춤형 계약을 포함해서, 무수한 파생상품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25년 동안 역사상 보기 드문 강세장이 펼쳐진 탓에, 이제 시장에는 염가주식이 드물다. 고평가와 극심한 경쟁 때문에 가치 투자자들은 저수익의 망령에 쫓기고 있다. 또한, 일부 가치투자회사는 규모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실적에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의사결정과정이 관료화되어 느려진 데다가, 소규모 수익기회는 활용해도 실적에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교한 정보기술의 지원을 받으면서 활약하는 유능한 분석가들이 운용사와 증권사 양쪽에서 증가하면서, 극도로 저평가된 상태로 묻혀 있는 종목이 훨씬 줄어들었다. 지금은 ‘밸류라인 가이드’나 주식시세표를 뒤지는 방식만으로는 기회를 찾기가 어렵다. 지금도 염가주식이 등잔 밑에 숨어 있을 때가 있지만, 대개는 사람들이 우연히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피하는 곳에 숨어 있다. 따라서 이제는 어느 분야를 집중적으로 분석할 것인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에는 사람들이 한국기업들의 자본배분 과정에 매우 환멸을 느낀 나머지, 이들을 매력적인 기회로 인식한 투자자가 거의 없었다. 그 결과 수많은 한국기업이 국제평가 기준보다 대폭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었다. 그래서 현금흐름의 2~3배, 기업가치의 절반 미만, 또는 부채를 제외한 보유현금보다도 낮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결국, 포스코와 SK텔레콤 같은 염가주식에 가치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워런 버핏도 여러 한국기업에 투자해서 근사한 이익을 올렸다고 보도되었다.
오늘날 가치 투자자들은 장기 소송, 스캔들, 분식회계, 재정난 등으로 월스트리트에서 낙인 찍힌 기업의 주식과 채권에서 기회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런 증권들은 가끔 염가 수준에서 거래되므로, 악재에도 꿋꿋이 버틸 수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투자기회가 된다. 예를 들어 엔론은 분식회계로 2001년 파산한 아마도 세계 최악의 오명 기업인데, 엔론의 채권은 1달러당 10센트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최종회수금액은 1달러당 60센트로 예상된다. 마찬가지로, 담배나 석면 기업들은 소송에 따른 재정난 우려로 근래에 주기적으로 심각한 매물 압박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실적이 예상보다 저조해서 실망을 안겨주는 기업, 경영진이 갑자기 바뀐 기업, 회계에 문제가 있는 기업, 신용등급이 하락한 기업 등이 안정적인 우량주보다 더 좋은 투자기회가 된다.
염가주식이 보이지 않을 때, 가치 투자자들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투자 기준을 낮추는 행위는 파멸로 가는 길이다. 언제 어디가 될지 몰라도 새로운 투자기회는 나타나는 법이다. 확실한 기회가 없을 때에는 포트폴리오 일부를 현금성 자산(단기 국채 등)으로 보유하면서 장래에 대비하는 편이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최근 워런 버핏은 좋은 투자기회보다 현금이 더 많다고 말했다. 모든 가치 투자자가 때때로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듯이, 버핏도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가치 투자자들은 기본적 분석으로 한 번에 한 종목씩 평가하는 상향식 투자자들이다. 이들은 시장 전체가 염가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위험분산에 충분한 20~25개 종목 정도만 보유하면 된다. 시장지수가 높더라도 가치 투자자들은 증권을 분석하고 기업을 평가하면서 장래에 유용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 따라서 가치 투자자들은 단기적인 시장 등락을 예측하거나 시점 선택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대신 최근 시장의 방향이나 지수 수준에 상관없이, 염가종목을 발굴하여 사들이는 상향식 투자기법을 유지해야 한다. 염가종목을 찾을 수 없을 때에만 현금을 보유해야 한다.
---pp. 21~31(세스 클라먼의 6판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