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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무민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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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32쪽 | 312g | 128*188*20mm
ISBN13 9791160266559
ISBN10 116026655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가을이 조용히 겨울을 향해 가는 시간은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시간이자, 필요한 무엇이든 창고에 그득하게 채워 넣는 시간이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모아 가까이에 두면 마음이 놓였는데, 온기와 생각 그리고 중요하고 가치 있고 심지어 친숙하기까지 한 나만의 것을 깊은 구덩이 안에 묻어 놓고 내 손으로 지킬 수 있었다.
이제 추위와 폭풍우와 어둠이 몰려들어도 문제없었다.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닫혔고 빈틈없는 이가 온기와 고독 속에서 만족스러워하고 있었으니 추위와 폭풍우와 어둠이 벽을 더듬으며 입구를 찾아 헤매더라도 찾을 수가 없을 터였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머무르는 이와 떠나는 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어떻게 할지는 누구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포기할 방법은 없었다. --- p.12

하루가 다 가도록 헤물렌과 토프트는 떠나고 없는 무민 가족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헤물렌은 정원으로 나가 낙엽을 쓸며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마구 지껄였고, 토프트는 헤물렌을 따라다니며 낙엽을 모아 바구니에 담으면서 아주 가끔 입을 열었다.
잠깐 헤물렌이 멈추어 서더니 무민파파의 푸른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정원 장식품이 됐군. 내가 어렸을 때는 은쟁반 위에 두었지.”
그러더니 계속 낙엽을 쓸었다.
토프트는 수정 구슬을 보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유심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수정 구슬은 무민 골짜기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고, 골짜기에 사는 이들이 늘 비쳐 보였다. 혹시라도 무민 가족 가운데 누구라도 남아 있다면 틀림없이 푸른 수정 구슬 저 깊숙이에서 모습이 보일 터였다. --- p.49~50

토프트는 바닥에 둘둘 말아 놓은 고기잡이용 그물 옆으로 기어 돌아간 다음, 앉기 편하게 다시 매만지고 계속 책을 읽어 나갔다. 아주 크고 두꺼운 책이었는데, 시작도 끝도 없었고, 책장은 누렇게 빛이 바랬으며, 모서리에는 쥐가 파먹은 자국이 나 있었다. 토프트는 글을 읽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책을 읽는 동안 토프트는 무민 가족이 왜 떠났는지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이 책이 알려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책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동물과 어두운 풍경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이름만 나왔다. --- p.64

그러나 필리용크는 대청소라는 말이 떠오르자마자 현기증이 나고 구역질이 파도처럼 몰려들어 순간 자신이 아찔하게 높은 낭떠러지에 매달린 느낌이 들었다. 필리용크는 깨달았다.
“나는 두 번 다시 청소를 할 수 없겠지. 청소도 못 하고 요리도 못 하면 어떻게 살지?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 또 어디 있어.”
필리용크는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갔다. 모두 베란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필리용크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럼블 할아버지의 찌그러진 모자와 훔퍼의 덥수룩한 머리, 아침 찬바람에 조금 붉어진 헤물렌의 뻣뻣한 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이 모두 모여 앉아 있었고 밈블의 머리는, 아, 정말 아름다웠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자 필리용크는 자리에 주저앉아 생각했다.
‘하지만 다들 날 전혀 좋아하지 않아.’ --- p.60~61

‘이제 저들한테 나가 봐야겠군.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왜 돌아왔지? 저들이랑 뭘 하면 좋지? 저들은 노래라곤 눈곱만큼도 모르는데.’
스너프킨은 몸을 웅크렸다가 다시 엎드려 침낭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 보아도 그들은 천막 안으로 들어왔고, 내내 곁에 있는 듯했다. 헤물렌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침대에 누워 울고 있는 필리용크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땅바닥만 바라보는 토프트와 정신없는 그럼블할아버지까지……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스너프킨의 머릿속 한가운데를 차지했으며 심지어 천막에서는 헤물렌의 냄새까지 났다.
스너프킨은 생각했다.
‘밖으로 나가야겠군. 생각만 하느니 그들이랑 같이 있는 편이 차라리 낫겠어. 무민 가족이랑은 딴판이야…….’
스너프킨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불현듯 무민 가족이 그리워졌다. --- p.105~106

필리용크는 그럼블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자녀는 없으세요?”
그럼블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물론 없네. 나는 친척들이 싫다네! 증손자도 몇 명 있을 텐데, 이젠 다 잊어버렸어.”
필리용크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왜 멀쩡한 이들이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네요. 이 집에 있으면 돌아 버리겠어요. 이제 저녁을 준비할 테니까 다들 그만 나가 주세요.”
필리용크는 문을 걸어 잠근 다음 농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무민마마의 부엌을 한번 훑어본 뒤로는 생선을 훌륭하게 요리할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 p.123

스너프킨은 생각했다.
‘집이란 뭘까.’
스너프킨은 바닷속으로 이어지는 좁고 가파른 계단에 앉았다. 바다는 고요했고 잿빛이었으며 섬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무민 가족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오게 만들기란 어렵지 않은 일인지도 몰라. 섬은 지도에 다 나와 있으니까. 거룻배는 물이 새지 않게 구멍을 막으면 되고. 하지만 왜? 그냥 내버려두자. 무민 가족들도 외따로 떨어져 있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스너프킨은 노랫가락도 나오고 싶을 때 나올 수 있도록 더는 찾지 않기로 했다. 스너프킨에게는 다른 노래가 있었다. 스너프킨은 생각했다.
‘오늘 저녁에는 연주를 좀 하는 편이 좋겠군.’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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