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답하는 과제를 뒤로 하고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가 바로 코앞에 온 것처럼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며 그들을 통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그의 사후에 다시 출현하여 1917년 이후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았다. 이제 세계 역사에서 그 슬프고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에피소드는 끝났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복수였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정녕코 자신이 바라던 보답을 받게 될까? 정말로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주의는 존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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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헤겔에 경도되었던 그의 청년기의 늦은 산물이었다. 애덤 스미스의 생계양식 이론처럼 역사적 유물론도 서유럽이 어떻게 18세기에 자본주의의 문턱에 도달했는지 설명하는 유용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은 보편적인 논리 구도가 아니며, 또한 그런 구도로 만들어져서도 안 된다. 역사적 유물론은 개괄적인 일반 명제들로 가득 차 있고, 천년 단위의 시대 구분 구도로 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특정한 역사적 에피소드들 프랑스의 1848년, 1851년, 1871년 사태들 에 대한 논의에 이를 때는 훨씬 더 섬세한 정치경제학의 틀을 사용했다. 양대 계급 구도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다수의 계급 및 분파가 들어섰다. 계기와 우연의 역동성이 특별히 부각되었다. 불가피성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와 교환한 서신에서 볼 수 있듯이(앞의 5장과 6장을 보라), 마르크스는 자기 이론의 제한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이지 자신의 청년기 사변을 일반적 보편 이론으로 격상시키는 짓 같은 일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마르크스주의를 종교로 격상시킨 것은 스탈린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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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조롱하거나 심지어는 숭배하는 그 모든 사람 가운데 마르크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마르크스가 산업의 국유화나 또는 중앙 계획에 의한 시장의 대체를 주창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놀랄 것이다. 마르크스는 국가가, 심지어는 '사회주의' 국가가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할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자유무역의 옹호자였고, 관세 장벽에 대해 조금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일당 지배를 주창하지도 않았으며, 결코 공산당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당 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끌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정당을 창건하지도 않았고, 동료 사회주의자와의 관계에서 종종 거슬린 태도를 보이고 비민주적으로 행동한 적도 있지만, 평생 파리 한 마리 해친 적이 없었다. 권력 획득을 위한 테러나 파벌적 당의 배타적인 지배는 그에게 저주였다. 블랑키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를 한번 보라.
마르크스는 결코 자본주의의 벗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본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는 예순다섯 생애의 절반 이상을 자본주의의 동력을 연구하는 데 바쳤지만, 그 목적은 최종적으로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공산주의로 대체할 세력을 발견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회주의를 가져다줄 정부에 의해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가 대체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사회주의가 국가에 의해 도입될 것이라는 생각은 그가 옹호한 어떤 것과도 닮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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