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인생이 마치 내 입술에 닿을 듯 다가온 영광의 잔 같아. 하지만 그 잔에는 분명 쓴맛도 있을 거야. 그건 모든 잔에 들어 있으니까. 언젠가 나도 맛보게 되겠지. 음, 그때의 내가 강하고 용감하면 좋겠어. 그리고 쓴맛을 경험하는 게 내 잘못 때문은 아니면 좋겠어.” --- p.21
“이런,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너무 현명해지는 중이어서 얼마나 속상한데요. 언어가 생각을 감출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우리의 흥미로운 면은 절반도 안 되게 줄고 말았어요.” --- p.31
“이 세상은 퍽 괜찮은 곳이에요, 어쨌든. 그렇죠? 마릴라 아주머니? 저번에 린드 아주머니는 세상이 별로라고 푸념하셨거든요.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거라 잔뜩 기대할 때마다 반드시 어느 정도는 실망하게 된다면서……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래서 좋은 점도 있는걸요. 나쁜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기도 하니까요.” --- p.53
“앨런 부인이 말씀하시길, 괴로운 생각이 고개 들 때마다 그에 맞설 수 있게 좋은 것을 떠올리라고 하셨어. 네가 약간 통통하긴 해도, 정말 너무나 귀여운 보조개가 있잖니. 나도 코에 주근깨가 있지만 코 모양은 괜찮은 편이고. 어때, 레몬즙이 효과가 좀 있는 것 같니?” --- p.61
“서로를 알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다. 나도 그 여자가 소문난 ‘오지랖쟁이’라는 건 잘 안다. 그 여자한테도 그렇게 얘기했고.” “이런, 아주머니께 너무나 상처가 되는 말이잖아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그게 사실이고, 난 누구한테건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고 봐.” “하지만 사실을 전부 말하진 않잖아요. 거슬리는 부분만 골라서 말씀하시죠. 제 머리칼이 빨갛다는 말은 열 번도 넘게 했으면서 제 코가 예쁘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하셨어요.” --- p.103
“그거 알아? 누가 이게 도리라면서 어떤 사실을 알려주려고 할 때는 으레 불쾌한 얘기를 듣겠구나 하고 각오해야 한다는 거? 사람들은 듣기 좋은 얘기를 전하는 게 도리라는 생각을 전혀 못 하는 거 같아. 도대체 왜 그럴까?” --- p.109
앤은 친구들의 행복이 언제나 기뻤다. 그러나 주위에 온통 자기 것이 아닌 행복뿐이면 누구나 조금은 쓸쓸해지는 법이다. 에이번리에 돌아와서도 앤은 딱 그런 심정이었다. 이번에는 다이애나가, 한 여자가 첫 아이를 곁에 누였을 때 몰려오는 경이로운 영광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앤은 갓 어머니가 된 친구의 하얀 얼굴을 경외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이애나가 이처럼 존경스러웠던 적은 이제껏 없었다. 환희에 찬 눈빛의 이 창백한 여인이 정녕, 이제는 사라져버린 학창 시절에 앤과 함께 놀았던 그 검은 곱슬머리와 장밋빛 뺨의 다이애나란 말인가? 앤은 자기가 과거에만 속해 있고 현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돼버린 듯 묘한 고독감을 느꼈다. --- p.125
불쑥 레슬리가 물었다. “그런데 외롭진 않은가요? 혼자 있을 때도…… 절대로?” “아뇨. 외롭다고 느낀 적은 평생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혼자 있을 때에도 정말 좋은 벗이 있거든요. 꿈, 상상, 역할놀이……. 때로는 혼자 있는 시간이 참 좋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음미하기 딱 좋거든요.” --- p.139
“이루지 못한 꿈이 있어, 앤?” “당연하지. 다들 그렇잖아. 꿈이 전부 다 이뤄지면 오히려 좋지 않을걸? 이루고 싶은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 p.169
다리 난간에 놓인 갸름하고 하얀 손 위로 문득 길버트의 손이 얹혔다. 그러나 앤이 얼른 손을 빼내고 황급히 돌아섰다. 그녀에게 황혼의 마력은 깨져버렸다. (……) 앤은 초록 지붕 집 앞길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두서없이 재잘거렸다. 불쌍한 길버트는 한 마디 끼어들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길버트와 헤어지자 앤은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전에는 길버트가 가는 걸 보는 게 다행스러웠던 적이 없었는데.’ 원망과 서글픔이 뒤섞인 기분으로 앤은 혼자 걸어가며 생각했다. ‘길버트가 계속 이렇게 어리석게 굴면 우리 우정은 망가지고 말 거야. 그럼 절대 안 되지―그렇게 안 되도록 지키겠어. 아, 남자들은 왜 그렇게 분별력이 없을까!’ --- p.185
바로 그때―가까이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만―제 우산으로 비를 좀 피하시겠습니까?” 앤은 고개를 들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눈에 띄는 용모―비밀스럽고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감미롭고 따스한, 듣기 좋은 목소리―그렇다, 앤이 꿈꾸던 왕자님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주문해서 만들었대도 앤의 이상형에 이보다 더 가까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