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좋은 것이지만, 때로는 상처를 줍니다. 소원이 좌절될 때 실망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소원마저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자는 잘나가는데 선한 사람은 도리어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낙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이럴 때 정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런 절망으로 몰아넣으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야이로 이야기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이로 또한 많이 간청하고 엎드렸음에도 큰 절망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1장. 두려움으로 인생이 무너져갈 때_ 19, 21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말과 생각으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삶과 행동을 보면 하나님은 그저 멀리서 지켜보다가 가끔 기적으로 간섭하시거나 멀리서 바라만 볼 뿐 간섭하지 않는 분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실제로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를 알려면 그가 하는 말이 아니라 삶과 행동을 보아야 하는 법입니다.
2장.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_ 57면
종종 그리스도인은 “우리 인생 배에 예수를 모시기만 하면 모진 풍랑을 겪지 않고 순풍에 돛 단 듯이 인생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 생각합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인생에 폭풍이 불고 풍랑이 일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고난 속에 기쁨이 있다. 고난이 많을수록 내 가슴은 뛴다”라고 이야기하는 무신론자보다 더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서 이렇게 불안해하고 두려워해서는 사람 낚는 어부는커녕, 자기가 먹고살 고기조차 잡지 못하는 어설픈 인간이 됩니다.
3장. 인생의 풍랑을 피할 수 없다면_ 79면
어려서부터 계명을 묵상하고 되새김질하고 묵묵히 지켜오면서 사회적 지위와 부를 얻은 젊은 부자 관리는 어떻게 보아도 낙타와 닮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멍에와 회개의 멍에를 지고 성실하게 살면서 얻게 된 사회적 지위와 부는 오히려 그를 영생이라는 바늘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생은 몇 가지 가시적인 계명만 지키면 사회적 지위나 부유함과 함께 덤으로 얻는 보너스 같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때론 자신의 지위와 부를 다 팔아야 얻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보화이기 때문입니다.
5장. 삭개오와 부자 관리: 구원의 역설_ 120면
복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시편 1편이든 예수님의 팔복 설교든 한 번도 “복은 무엇이다”라고 명쾌하게 정의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라든지 아니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면서 단지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행복을 정의하지 않고,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묘사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6장. 복 있는 사람, 그 형통의 비밀_ 137면
랍비 오쉬리는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들이 자기에게 던졌던 수많은 가슴 아픈 질문과 사연을 종이쪽지에 짧게 적어 깡통 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이것을 기초로 4권짜리 히브리어 책을 썼고, 1983년에 영어 축약본인 《홀로코스트, 인간에게 답하다》(Responsa from the Holocaust)를 출간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질문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힘든 지옥 같은 상황에서 이들이 짐승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수준 높은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도 하나님을 부인하길 거절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을 지키려고 목숨 바친 유대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음에도, 과연 그들은 무엇 때문에 나치 지옥의 가장 깊은 데서도 짐승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7장. 깊은 데서 부르짖나이다_ 159~160면
하나님의 의는 이런 분배적 정의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누구에게나 1데나리온을 준 것은, “분배적 정의”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포도원 주인이 모두에게 1데나리온을 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야 모든 품꾼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데나리온은 한 가족이 2일 정도 살아갈 수 있는 생계비라는 주장도 있고, 실제로 일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기에 3~4일 정도의 생계비로 보기도 합니다. 어찌 됐든 하루 1데나리온은 일용 노동자의 가족이 존엄과 가치를 훼손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적절한 임금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도 하루에 1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1데나리온은 있어야 부모도 공양하고, 자녀도 양육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어도 포도원 주인은 1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의는 세상의 분배적 정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합니다.
8장.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이 있는가_ 191면
예수께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자신을 못 박는 원수들마저 용서하는 사랑 안에서 세상의 악은 그 힘을 잃었습니다. 어쩌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우리 영혼이 악을 ‘흡수’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악을 고스란히 송두리째 받아내면서도 끝내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겨내는 데 따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는 용서의 고통이 끝내는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이 됩니다.
9장. 원수 사랑, 가능한가?_ 221면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협정이나 동맹을 맺을 때 조약의 영원성을 상징하고자 협정을 맺는 동맹국 대표가 소금을 친 고기를 함께 먹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소금은 ‘불변의 상징’으로 주로 쓰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결코 제자로서의 독특한 맛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박해를 받고 욕을 먹는다고 해도 제자들은 결코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때, 예수 때문에 욕을 먹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 제자도를 보여주어야 제자들은 비로소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것입니다.
10장. 세상의 소금, 그 가공할 소명_ 2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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