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는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라고? 아빠에게 엄마는 ‘처리’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일까. 지금은 엄마를 위해서 가족이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지. 쓰레기통에 들어 있던 그림. 좍좍 찢겨진 그림. 아빠한테 가족은 아무래도 좋은 걸까. 자기 일로 바쁘고 피곤하니까. --- p.10
“자신의 마음속을 샅샅이 찾아도 절망밖에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는 것 말고는 출구가 없을 때도 있어. 괜찮아. 포기해도 돼. 포기할 정도로 너는 싸웠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빨라. 키리코, 주변으로 눈을 돌려 봐. 다른 누군가의 논리를 찾아 봐. 무심한 듯, 딱히 어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어째서인지 엄청나게 강한 게 옆에 있기도 하거든…….” --- p.37
밥솥 뚜껑을 열고 밥을 밥그릇에 푸며 키리코가 물었다. “키리코 선생에게 의사로서 일을 의뢰하고 싶어. 당연히 비용도 지불할 거고. 일이 없는 상태라면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목소리에 비꼬는 기색이 묻어났다. “네가 나한테?” “환자를 한 사람 봐 줬으면 해.” 아무리 키리코라도 수화기를 고쳐 쥐게 만드는 말이었다. 진구지가 가만히 키리코의 손에서 고봉밥을 푼 밥그릇을 받아서 책상에 놓았다. “잠깐, 후쿠하라. 너나 너희 병원 의사가 볼 수 없는 환자야?” “그래. 우리 병원에서는 아무도 볼 수 없어. 아마도 너 말고는 없을 거야.” “그런 환자가 있다고?” “있지. ―― 후쿠하라 킨이치로.” 그 이름을 듣고 키리코는 숨을 한 번 삼킨 것 같았다. “내 아버지, 시치주지 병원장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이쪽에서 할 테니까 사정이 되는 대로 와줘. --- p.65~66
“상태는 어때요?” “어려워.” 치매는 나도 전문 분야가 아니라 공부하는 중이지만, 하고 키리코가 운을 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뇌경색으로 인한 혈관성 치매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증상을 정확히 집어내지 못했어. 뇌내출혈도 있어 보이고. 다만 기억장애는 확실하게 일어났어. 그리고 시각장애도 있는 것 같아. 상대가 누구인지 얼굴을 보고도 바로 이해하지 못해. 안면실인증일지도 몰라.” “수발이 필요할까요? 식사나 배설은 가능한가요?” 진구지는 점차 전문적인 질문으로 옮겨갔다.” --- p.76
“날씨가 이래서 좀 아쉽네요.” 고급 요정이었다. 족자 앞에 꽃꽂이해둔 꽃을 바라보며 잠자코 있자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 중 하나가 말을 걸었다. “후쿠하라 씨는 비를 좋아해요? 아니면 싫어해요?” “싫어하는 편이에요.” 바로 대답했다. 내과의 오리베 선생님이 흰머리가 섞인 머리를 긁적이며 마치 자신의 환자를 대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하하하, 그래요? 난 실내에 있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비 오는 날은 책 읽기 좋던데.” “책은 비가 오든 날씨가 맑든 읽을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저는 선택지가 많은 맑은 날이 좋아요.” 자리를 만들어 준 오리베 선생님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지만 어째서인지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뾰족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되기 때문일까. 조금 주의해야겠다. “비 때문에 선택지가 줄어들 것 같진 않은데요.” 분명한 대답이 돌아오는 바람에 놀랐다. 옆에 있는 오리베 선생님이 아니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맞선 상대였다. --- p.92~93
“너답지 않게 상당히 될 대로 되라는 의견이구나. 환자의 가족으로서 바라는 건 없어?” “바라는 거? 그야 쉽지.” 바로 눈앞에 있는 특별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침대를 가리켰다. “아버지를 되도록 편하게, 꼴까닥 눈을 감게 해 줘.” 팔짱을 낀 채 진구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말조심하세요, 환자분이 들으세요.” “들리면 어때.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