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정치는 어떠한 사유와 성찰을 요구하는가.
현대 정치철학의 사유를 통해 모색해 보는 대안적, 대항적,
해방적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
2016년의 촛불은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적 실천들과 그에 관한 담론들이 터져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어느새 촛불은 추억이 되었고, 대중적 에너지는 제도권 정치의 블랙홀 속에서 소진되고, 그 자리엔 정치권의 공방과 이합집산, 그리고 이를 좇는 미디어와 그들이 매일 같이 만들어 내는 정치 흥행물에 눈을 고정시킨 무기력한 대중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30년 가까이 지난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라면 지나친 판단일까. 대중의 정치적 무기력이 민주주의의 한계를 만드는지,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가 정치의 공백을 낳게 하는 것인지를 따질 겨를도 없이, 조금도 과장 없이 말하자면 오늘날 대중은 자기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불안과 공허 속을 그저 부유하고 있다. 그러한 대중은 때로는 정치적 불의의 임계점 앞에서 봉기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불안 속에서 엉뚱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월가 시위’ 이후 미국의 정치가 트럼프 집권으로 귀결된 것 역시 다르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오바마까지 이어지는 민주당의 월가(자본) 친화적인 자유주의적 통치에 대한 대중적 염증이 불러낸 자기 파괴적인 반란이었다. 노동하는 삶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데 대한 대중적 실망이 자본가 계급을 대표하는 정치의 선동에 현혹되는 아니러니. 우리는 그것을,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했던 노무현 정부 이후 이명박의 당선에서 이미 목도하지 않았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온 지도 이제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꼬리를 물고 서로 번갈아 가며 이어지는 한국의 정치가 흡사 미국의 그것을 이미 닮아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우선 갖는다. 다르게 말하면, 오바마와 트럼프 사이의, 노무현과 이명박 사이의 진자추 운동과도 같은 반복이 앞으로도 되풀이되리라는 우려가 단지 가상이 아니라 현실로 굳어질 것 같은 어떤 기시감과 불안 때문이다. 이제 집권 2년을 넘어서는 문재인 정부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염원에는 그러한 희비극이 의미 없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적폐청산과 남북한 평화체제 이행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삶의 곤궁이 나아질 기미가 없을 때 그 지점을 파고드는 것은 다름 아닌 경제 우선주의를 내세운 우익 포퓰리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다급한 물음은 물론 한국에서 먼저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가 확고해진 이래 민주주의는 인간적 삶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의 형식이 아니라 체제의 불의와 불평등을 숨기는 알리바이가 되었다는 비판이 저 민주주의의 선진 국가들에서 먼저 제기된 지도 오래다. 대의제 민주주의 안에 깃든 독재의 가능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히틀러 독재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주장했던 칼 슈미트, 그보다 앞서 프랑스혁명과 반동의 역사를 지켜본 칼 맑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간파했던 대의제 민주주의의 ‘구멍’. 이 구멍을 직시하지 않고서 민주주의 자체를 물신화해 버릴 때,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라는 말은 명목일 뿐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토론을 종국에는 쓸모없는 탁상공론으로 만들어 버리는 공허한 희비극의 반복은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그것은 촛불을 이룬 대중의 역능이 일상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행위 능력으로 유지되고 강화되는 길을 여는 것이며, 그것은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자신의 사유의 토대를 전면적으로 성찰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도,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오늘의 정치를 세계사적 좌표 위에서 조망하고 20세기와 21세기의 오늘로 이어지는 정치에 대해 깊이 사유해 온 철학적 사유의 성과를 통해 인식의 기반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과제는 우선 이 땅에서 정치철학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철학적 사유의 담지자는 삶의 위기와 고단함 속에서도 미래의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대중(민중)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기획되고 씌어진 책이다. 책은 근대 이후 오늘날의 정치와 민주주의적 상황을 포착해 온 정치철학의 흐름을 네 가지 주제로 나누고, 이 주제 영역을 개척하거나 새롭게 발명한 주요 사상가들의 사유의 핵심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민주주의 속의 독재의 가능성을 포착했던(그를 통해 나치체제를 옹호하는 이론가가 되었던) 칼 슈미트로부터 시작하여, 세속화된 근대사회에서 물신이 되어버린 민주주의를 타개하려는 오늘의 급진적 정치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특히는 지금까지의 체제 변혁적인 사유가 안고 있던 근본적인 한계를 날카롭고 찢으며 차이와 평등의 정치를 결합하려는 페미니즘 정치철학까지, 지금까지 분리된 채 논의되어 온 주제들을 오늘날의 정치와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우리 자신의 정치적 사유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문제의식 아래 재구성해 낸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은 독자들이 쉽게 접근함으로써 자신의 사유와 성찰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분명한 목적으로 작성된 본격적인 대중적 정치철학서이다. 한마디로 이 책의 가장 큰 의미는 촛불의 대중에서 무기력한 정치적 객체로 머무는 대중에게 정치적 사유와 언어를 건네주려는 시도라는 데 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 공통의 관심사를 실현할 행동 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 이 역능을 가진 대중만이 오늘의 민주주의를 그 한계 너머로 더 멀리 나아가게 할 수 있고, 반복되어 온 희비극을 중단시키고 인간의 시간을 거기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과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부는 ‘전체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다. 여기서는 나치 세력의 집권 전후로 현대 전체주의와 파시즘에 관해서 성찰했던 철학자들이 다뤄진다. 이 책의 첫 장에 등장하는 칼 슈미트는 한때 나치의 협력자였고, 총통의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이론은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 내에서 독재의 출현 가능성, 그리고 전체주의적 지배의 위험을 사고하고자 할 때 반드시 다뤄져야 할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이 슈미트와 논쟁을 벌인 발터 벤야민의 개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한데 벤야민의 정치·역사철학적 고찰들을 다룬 다음 장은 그의 고유한 맑스주의적 관심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된다. 이어지는 아도르노, 아렌트 또한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철학적 사변의 주된 관심으로 삼은 철학자들이다. 전통 철학의 개념적 동일성에 대한 강박적 사고에 주목하면서, 철학적 동일성 원칙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여 이를 맑스주의, 정신분석학, 합리화 이론 등과 접목시켜 전체주의적 지배의 원리를 밝히는 전략을 택한 아도르노와, 정치의 근본 개념들을 규정하면서,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개념적 구분 속에서 전체주의적 지배로 전락한 현대 정치의 한계를 비판한 아렌트를 대비해 보는 기회도 된다. 이러한 20세기 현대철학의 전체주의 비판들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반지성주의의 흐름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 정치와 (이주민, 난민, 무슬림, 성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 선동의 빠른 확산 속에서 어떠한 대항적 의제를 만들어 갈 것인가를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부는 ‘1968 전후의 프랑스 정치철학’이다. 20세기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였던 68혁명은 사회적 실재를 분석하는 새로운 분석틀을 요구했고, 이 혁명을 전후로 터져 나온 프랑스의 급진적 정치철학들은 흔히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라는 타이틀 속에서 논의된다. 첫 글에서 소개되는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은 바로 이러한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의 교차점을 형성하면서, 전통 맑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 도식을 넘어서 사회적 구성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였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자신의 권력이론을 전개한 푸코는 고고학과 계보학의 방법을 통해 권력의 작동 방식을 분석하며, 이를 생명권력과 통치성에 관한 고찰들로 이어 나갔다. 이어서 다뤄지는 들뢰즈의 차이의 존재론은 차이와 강도(强度), 생성의 역량을 강조하면서, 68혁명과 같은 (체계성에 고정되지 않는) 혁명적 투쟁의 분출과 같은 사건을 개념화하고자 했다. 한편 이러한 투쟁의 분출 과정을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라는 기표가 갖는 의미 속에서 고찰하면서, 정치와 치안의 이중 운동이 내는 불화 속에서 해방적 정치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렇듯 68혁명을 전후로 프랑스 지성사에서 전개된 철학적 사유의 계보들이 보여 주는 지평들은 오늘날 촛불 ‘이후’의 정치를 고민해야 하는 우리에게 분명 큰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3부는 ‘페미니즘과 차이의 정치’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킨 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즘은 오늘날 시대적 정의를 상징하는 흐름이 되었다. 한쪽 성이 배제된 채 논의되는 민주주의와 정의, 진보는 반쪽짜리일 뿐만 아니라, 한쪽 성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반(反)민주적이며 불공정하고, 사회의 퇴보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얻기 시작한 반면, 페미니즘의 물결에 대한 기존 남성 중심 사회의 백래시 현상도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다른 사회적 운동들, 예컨대 계급적 불평등에 대항하는 운동이나 생태주의 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또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을 어떻게 규정하며, 다른 성소수자들(LGBT)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책의 논의들은 이러한 논쟁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선 첫 번째로 다뤄지는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정의의 여러 차원들을 경제적 재분배/문화적 인정/정치적 대의 사이의 관계로 규정하면서, 페미니즘과 지구적 정의의 문제에 관한 정교한 틀을 제시하고 있다. 성적 대상화, 혐오 등 페미니즘 이론의 기본을 이루는 개념들을 규정한 마사 누스바움은 각 개인의 역량이 종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정의로운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배제를 넘어서는 역량의 증대로서의 정의에 대한 고민은 아이리스 매리언 영에게서도 이어진다. 영은 현대 정의론의 고전인 존 롤즈의 정의의 원칙이 갖는 한계를 비판하면서, 재분배의 문제 설정을 넘어서 특정한 사회집단의 지위와 관련된 영역에서 차이의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디스 버틀러에게서 차이의 문제는 고정된 젠더 역할의 수행을 거부하는 횡단적 해체의 움직임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버틀러는 페미니즘에 퀴어와 해체라는 키워드를 도입하여, 실체화된 여성성과 젠더 이분법을 넘어 모든 억압적 젠더 역할로부터 해방되는 주체의 자기 긍정적 관계를 선언한다. 이러한 다양한 각도의 페미니즘 철학의 논의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리부트’ 속에서 제기되는 여러 화두들에 의미 있는 준거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4부는 ‘민주주의와 세속화된 근대’에서는 근대 민주주의 담론 전반에 대한 양극적인 논의들이 다뤄진다. 따라서 이 4부는 일관적이지 않은 구성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먼저 위르겐 하버마스와 찰스 테일러는 세속화된 질서로서 근대 입헌 민주주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그 내부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안착하기 위한 규범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면, 아감벤과 지젝은 근대 민주주의론 자체의 근본적 한계를 제시하면서 세속화된 현대사회 질서 내에서 또 다른 우상과 물신이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서구 기독교 전통이 현대 정치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대성을 사유하며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를테면 하버마스에게 생활세계에서의 의사소통 합리성에서 비롯하는 토의 민주주의가 체계적 합리성의 자립화와 생활세계 식민화를 견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면, 테일러는 근대 이후 자유주의의 확산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세속화된 근대성이 불안정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조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주의적, 정치적 자유의 관점을 제시한다. 반면 아감벤은 세속화된 근대사회가 또 다른 의미에서 세속화된 기독교 신학의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보면서, 근대 주권론이 갖는 생명정치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근본적 차이란 없으며, 근대 주권의 구조가 벌거벗은 생명을 초래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귀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은 위기의 징후를 드러내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세속화된 근대의 역설인 이데올로기적 유령과 물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라진 공산주의의 전통이 부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는 이러한 사유를 전통 맑스주의로부터 직접 도출하기보다는, 프로이트와 라캉, 헤겔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경유해 이끌어 낸다.
이상 논의된 네 가지 주제들과 이 한 권의 책만으로 현대 정치철학적 사유들을 모두 망라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이 책이 놓친 주제들―예컨대 영미 정치철학에서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 주로 프랑스에서 전개된 현상학적 공동체론, 이탈리아 자율주의 이론,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최근 논의 등―은 추후에 후속 기획을 통해 다룰 수 있으리라는 기획자(필자)들의 바람이 부디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한국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역동적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진 사회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발간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일어난 3·1운동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민중 봉기에서 출발하여, 4·19, 5·18 항쟁과 1987년의 6월 항쟁을 거치며 얻어 낸 민주화, 그리고 2016-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현대 역사는 지치지 않고 민주주의와 인민주권에 대한 열망을 표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온전히 민주화되지 않았다. 엘리트 중심의 정치 질서와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 속에 퍼지는 정치 혐오는 오늘날 사회의 탈정치화로 귀결되고 있다. 이 책에서 제시된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주제들이 촛불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사유와 논의의 진전과 확산에 기여하기를 바라며, 나아가 현재의 조건에서 대안적, 대항적, 해방적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논쟁의 지평들이 열리기를 기원한다.”
―‘책을 펴내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