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까. 모르겠다. 좋은 글을 써보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믿음이 있다면, 글쓰기의 실천적 힘은 독립적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 논의의 맥락 위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논의가 질적으로 풍부해지고 치열해질수록, 세계에 대한 유의미한 쟁점들이 가시화되며 합의를 위한 공통의 토대가 조금씩 만들어진다.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공론장 안에서 충분히 성숙해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획기적인 발상 역시 등장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천재적이진 않지만 성실한 글쓰기와 논의를 멈추지 않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곳의 일원이고 싶다. --- p.9
나는 이것들을 괄호 안의 불의라 말하고 싶다. 만약 그동안 인터넷을 중심으로 화력을 쌓은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어떤 반동으로서의 안티 페미니즘과 여성혐오가 있었다면, 그것은 없던 여혐이 생겨난 게 아니라 괄호 안의 불의가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할 것은 ‘이 괄호 안의 불의가 드러난 것이 실제로 이 세상 불의의 총량을 늘렸느냐는 점’이다. 물론 그렇게 보기 어렵다. 바로 그 괄호 안에 이미 불의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 p.26
무언가에 대해 혐오 표현 혹은 비하 표현이라는 것을 지적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지적하는 것이 일종의 문화적 매카시즘이 될 수 있다는 우려는 꾸준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소환되는 비유가 문화혁명, 마녀사냥 그리고 공안정국의 검열 등등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녀사냥과 문화혁명, 검열이 증명하는 것이 있다면, 정말로 그런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떤 발언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민감함이 아니라 그 불편함을 근거로 누군가를 문자 그대로 침묵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권력이란 점이다. --- p.50
사실 나는 남성들이 젠더 이슈에 둔감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정말로 둔하다면 오히려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서도 콧방귀를 뀌며 자신들의 천년 왕국을 그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젠더 이슈가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체화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권력에 대한 도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국 남성들이 여성혐오를 유희로 즐길 자유, 불법 촬영물을 즐길 자유, 일상적 성희롱을 할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백래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도덕적 당위가 아닌 젠더 권력 때문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 남성들에 대한 도덕적 설득 혹은 설복도 중요하지만, 우선 본인에게만 좋던 과거는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체념시키는 것이 먼저다. 그들이 버티는 건, 단순히 본인들의 주장이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본인들이 주장하는 게 옳은 것이 될 수 있던 시대를 살아와서다. --- p.78
하여 저 슈뢰딩거의 상자를 열어보지 않더라도 탁현민이 반성했으리라 추론할 이유는 딱히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탁현민이 여전히 청와대 주변에 있다는 건, 사실 그가 제대로 된 반성 없이 의뭉스러운 형태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슈뢰딩거의 상자가 사실 청와대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 p.137
결국 조덕제는 3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디스패치》는 1년이 지난 2018년 11월 16일, 해당 기사들을 삭제하고 장문의 사과
문을 올렸다. 하지만 그 1년 동안 수많은 남성들과 조덕제 측은 《디스패치》의 기사를 근거 삼아 피해자를 공격했고, 무책임한 언론들 역시 “《디스패치》에 따르면”이라는 말과 함께 그들의 주장을 실어 날랐다. 과연 그들 중 사과하거나 반성한 이들이 있을까. 그럴 양심이 없다면, 《디스패치》의 사과문을 보고 입이라도 다물었으면 좋겠다. --- p.155
2018년 하반기부터 ‘가짜 뉴스’라는 개념이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명백한 팩트 오류인 ‘가짜 뉴스’보다 의견이란 말로 별의별 주장이 다 의미 있는 것처럼 통용되는 ‘가짜 논의’가 더 큰 문제처럼 느껴진다. 오류를 잡아내기 더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 p.194
한국 사회에서 기괴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 미덕은 솔직함과 진정성인 것 같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자기 나름대로 좋은 의도를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결과적인 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는 상대방과의 상호 주관적인 소통의 영역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자기만족적인 좋은 의도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고려해보는 역지사지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고도화된 지성과 도덕성의 근간이다. 역지사지를 결여한 채 솔직하게 말하겠다는 건 그냥 최소한의 필터링 장치를 떼고 아무렇게나 말하겠다는 뜻일 뿐이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마주칠까봐 겁나는데, 왜 그걸 TV에서까지 봐야 하는 걸까. --- p.207
하지만 이와 같은 송은이의 활약에 감탄만을 더하는 건 반쪽짜리 분석일 것이다. 정말 중요한 건, 왜 이토록 뛰어난 능력을 지닌 방송인이 수많은 우회로를 거쳐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에 반해 수많은 남성 예능인들이 물의를 일으키거나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서도 쉽게 지상파 예능에 들어오는 것을 떠올린다면, 그동안 송은이가 겪어야 했던 우회의 시간은 한 개인의 성공 모델로서 상찬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방송계가 반성해야 할 사례로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 p.232
실패한 애도로서의 〈언더 더 씨〉가 조금도 흥미롭거나 풍성한 텍스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분위기를 드러내는 건 이 지점이다. 조금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여기엔 침묵에 대한 선호, 결코 공격적인 요구로 구체화되지 않는 조용함에 대한 선호가 있다. 침묵하는 대상에 대해선 미안함을 안고 살 수 있지만,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 대해선 순수성을 의심한다. 〈언더 더 씨〉와 강동수 작가가 각각의 대화 상대를 대하는 방식을 비교해보자. 자신의 목소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의존적인 약자만이 우호적인 소통의 대상이 된다. 작가가 작품에서 또 작품 바깥에서 한 시대의 어른으로서 말하는 세월호와 어린 희생자에 대한 부채의식은 그래서 기만적이다. 왜 우리는 살아있었다면 20대 초반의 동시대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냈을 세월호 희생자와 살아서 목소리를 내는 동시대 여성을 연결하지 못하는가. 그 둘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문학적 상상력 아닌가. 기껏해야 자두와 젖가슴이나 연결하면서 생기발랄한 학생의 육체적 젊음만을 아쉬워하는 것 어디에 전복적 상상력이 있고 윤리가 있는가. --- p.280
과도한 PC함은 위험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무엇이든 과도하면 위험하다. 물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마시면 건강에 좋지 않다. 이것은 원론적으론 ‘옳은’ 이야기다. 중요한 건 ‘원론적으로 옳은’ 이야기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안에서 화용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칼로리 섭취가 과도하면 위험하다. 이 말을 기아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게 의미가 있는가.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면 위험하다. 이 말을 독재 국가에 사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게 도움이 될까. 의미론적으로 옳은 말이라 해도 각각의 화용론적인 맥락 안에선 쓸모없거나 더 나아가 자칫 잘못된 구조를 용인해주는 말이 될 수 있다.
---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