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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사람과 눈사람

눈과 사람과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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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6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276g | 133*200*20mm
ISBN13 9788954656429
ISBN10 8954656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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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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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못이 아니야.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나는 눈을 껌뻑거렸다. 물컹한 생선처럼 ‘잘못’이라는 말의 의미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도와주겠다고 했고, 맹세한다고 했고, 영후도 맹세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계속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내 몸을 놓아주고 열려 있는 창문을 닫을 때에야 미끄러졌던 의미들이 바닥에서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 「줄 게 있어」중에서

내가 열쇠를 갖고 있을 때에는 집에 먼저 도착한 지은이 방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려야 했다. 지은이 열쇠를 갖고 있을 때에는 먼저 도착한 지은이 문을 열고 들어가 방문을 잠가버렸다. 지은이 방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마다 열쇠를 복사해야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열쇠를 복사하면 싸워도 서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각자 들어오고 싶은 시간에 방에 들어올 수 있었고 나가고 싶은 시간에 방에서 나갈 수 있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열쇠를 복사하지 않았다.
--- 「다시 하자고」중에서

B강사와의 일 이후로 정원은 ‘시적 허용’이라는 말을 곱씹는 습관이 생겼다. 전날까지만 해도 정원이 좋아한 말이었다. 가슴이 무너진 모든 기억을 시는 허용해줬으니까. 그러나 이제 ‘시적 허용’이라는 말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말이 어떤 부당함을 시적 특권으로 포장하는 듯했다. 그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그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표현하고는 했지만, 그들의 디오니소스적인 면모는 타자, 그중에서도 유독 약자 앞에서만 강하게 분출되는 특징이 있었다.
--- 「추앙」중에서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거부하지 않은 건 언니밖에 없었어. 언니가 정상이라는 착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필요할 거라는 걸 알아. 나의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면들이 정상적이고 싶어하는 언니의 욕망을 채워준다는 것도 알아. 언니의 다정함이 선의라는 건 물론 잘 알아. 하지만 고맙지는 않아. 너무나 오래 위장해왔기 때문에 무엇을 위장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을 정상이라고 말하면서, 다 함께 공평하게 곪아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언니에게 이 말을 왜 하는 걸까. 이 말을 하는 것이 나의 선의라는 걸 언니는 이해해줄까.
---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중에서

사용할 수 없는 신체에는 얼마의 가격을 책정해야 할까. 한 마디가 절단된 둘째 발가락의 가격과 멀쩡하게 붙어 있는 발가락의 가격을 예측해보았다. 유리병 안에 언니의 발가락이 있었더라면 언니는 되찾으러 갔을까. 아마 버리고 갔을 것이다. 유리병 안에 은하의 심장이 있었더라면 언니는 되찾으러 갔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유리병 안에 언니의 심장이 있었더라면 은하는 되찾으러 갔을까. 사백만원은 은하가 하루 여덟 시간 삼 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은하가 한 번도 손에 쥐어본 적 없는 액수였다. 그래도 은하는 언니의 심장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리병 안에 언니의 발가락이 있었더라면 은하는 어떻게 했을까. 금세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심장과 발가락은 어떻게 다른 걸까.
--- 「신체 적출물」중에서

거짓말로 빼곡하게 적어나갔던 자기소개서들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으로 간주되어버린다는 점이 그 시절 나의 고난이었으나, 어떤 자기소개서에도 그런 고난을 적을 수는 없었다. 거짓 고난과 거짓 깨달음과 거짓 열정을 지어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 거짓 아픔을 좋아해줬다. 몇몇 사람에게 그러나 내 거짓말은 간파당했다. 그들과 다시 만나야 할 때마다 나는 눈치를 살폈다. 내가 입을 열 때마다 그들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나를 가짜라고 말하고 있었다. 실은 그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는 것을 누구도 반가워해주지 않았다. 나는 거짓으로 아팠지만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 「선샤인 샬레」중에서

우리가 가장 적나라하게 이 이야기를 써서 세상에 내놓았을 때 가장 기뻐할 사람은 아마도 가해자들일 것이다. 가해자들은 우리의 글을 자신들을 고발한 피해자들의 용기를 짓밟는 일에 사용할 것이다. 피해자도 때론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다는 점을 용인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를 해명하려 들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할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우리는 아무 해명도 하지 않기로 했다. 침묵하고 있다는 비난을 덤으로 받았다.
--- 「눈과 사람과 눈사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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