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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시인선-122이동
리뷰 총점9.0 리뷰 5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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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6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70g | 130*224*20mm
ISBN13 9788954656436
ISBN10 8954656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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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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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표지의 배면만 뒤집어보리라

순환하지 않는 피처럼
피에 감염된 병자처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하리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전생이여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보리라

--- 「훗날의 시집」 중에서


나의 미소가
한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걸 알고 난 후
나의 여생이 바뀌었다
백날을 함께 살고
백날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공기마저 온기를 잃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내 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세상을 펼쳐보기도 전에
아뿔싸,
나는 벌써 죄인이었구나
한 사람에게 남겨줄 건 상처뿐인데
어쩌랴
한사코 막무가내인 저 사람을……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여분의 사랑」 중에서


엄마 무덤 곁에 첫 시집을 묻었다

시집 속 활자들, 꿈틀거리며 꼬물거리며
흙과 바람과 햇빛과 꽃과 엄마와
잘 사귀었을까
무덤가 작약의 내력까지 읽어내렸을까
시집 속 활자들을 받아먹고 작약은 붉은 꽃이라도 피웠을까

햇빛 짱짱한 묘지에서
뭇별이 총총, 웃음의 왕국, 흔적과 한순간
시집 속 단어들을 떠올리다가
땅속 뭇별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다가
세월에 마모된 대리석 책을 보았다

살아온 연도가 새겨진 활자들이
날개 하나뿐인 천사상과 무성한 향나무 그림자와
어울렁더울렁 서로 젖어드는 모습을 보니
저 책만한 무덤이 없겠다 싶었다
활짝 핀 작약꽃만한 무덤이 없을 것 같았다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녘 하늘에 작약꽃이 붉게 피어올랐다

--- 「작약꽃」 중에서


나는 가장 아픈 귀였다
피부보다 민감한 통점이었으며
소음의 배후였다
고집이 세었지만
언제나처럼 뿌리는 없었다
나는 부적절한 귀가 지은 죄였다
부글거리는 문장을 오래 품고
발설하지 않는 인내는
절대 미덕이 아니었다
나의 내부가 늘 고요했다면
공사장 소음을 뚫고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따금 귓바퀴가 아파오고
구름도 작약꽃도
단풍나무 숲도
가장 아픈 문장을 엿듣고 말았다
처음과 끝처럼
후회는 결코 혼자 오지 않았다
세상의 한 귀가 부서지고
기우뚱 균형을 맞추려던 그때
나는 이 세상도 오래 앓았던 귀라고 믿었다

--- 「귀」 중에서


내 생애는
두레밥상 위에 숟가락을 놓으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숟가락들
어제 옆집 아버지 친구는
서낭당 언덕에서 돌멩이에 걸려 돌아가시고
건넛집 아이 엄마는 오늘 딸 쌍둥이를 낳았다

나도 이제 상 위의 숟가락에 숨은 배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수저통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숟가락을
상 위로 옮기는 가벼운 노동을
아직 생각이 어린 아이들에게 시킨다
몸과 생각에 물기가 많은 아이들은
죽음과 생의 신비가 숟가락에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 「밥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부분


날이 저물고 있다.

내가 앉은 의자의 중심이 점점 꺼지고 있다.

해는 곧 수평선 아래로 꺼질 것이다.

죽음은 결코 서두르거나 지체하지 않아도 저절로 올 것이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의자에 앉아 있다.

들판으로부터, 햇빛으로부터, 바람으로부터, 바다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한정된 생애가 풍경으로부터 벗어나려 할수록

의자의 중심은 나를 외면하고 있다.

--- 「누군가가 나를 외면하고 있다」 중에서


원시 생물이 첫 눈을 뜰 때
딱딱한 캄브리아기의 시간을 뚫고
이제 막 새것인 시신경이 머리 주위로 모여드는,
몸 일부를 건네주고 눈 하나를 받을 때
껍질은 갈라터지고 환부를 찢어발기며
처음 통증을 마지막 통증으로 다독이는,
통증의 말단으로 온몸이 집중하는 순간
검은 눈망울이 빛과 어둠을 가르고
바깥세상과 만날 때
마침내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의 물거품이 떠오르고
첫 눈빛 세례를 받은 바닷속
풍경 하나가 반짝, 반응할 때
세상이 드디어 어린 영혼의
외로움까지 감싸안으며 더욱 짙어지는,
한 생명이 자기 안의 어둠과 대면하는 바로 그 순간


---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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