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 시민》에는 당당하게 엄마로서 소설 속 주인공 자리를 꿰찬 여성들이 있다. 이 엄마들은 이기적이고, 시니컬하고, 싸움꾼이고, 한없이 부족하고, 자신의 무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떤 엄마는 엄마들의 절절한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어떤 엄마는 현실에선 불가능한 엄마의 판타지를 실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등 시민》 속 모든 엄마는 힘 있는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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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질 언제까지 할 거예요, 엄마? 화가 휘슬러는 자기 엄마가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는데, 아마 나는 다리미판 앞에 서 있는 엄마를 그릴까 봐요.” 오늘은 에이미가 말이 많은 밤이다. 그 애는 접시에 얼굴을 박고 냉장고에서 꺼낸 음식을 먹으며 내게 시시콜콜한 일들을 이야기한다. 아이는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왜 당신은 내가 학교에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왜 걱정을 하는가? 아이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자러 2층으로 올라간다. “내일 아침에 나 깨우지 마세요.” “하지만 중간고사 중인 줄 알았는데.” “아, 그거요.” 아이가 다시 내려와 내게 뽀뽀를 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한다. “핵전쟁 때문에 몇 년 안에 우리 모두 죽을 거예요. 그러니 중간고사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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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리퍼드는 젠틀한 사람이며 상냥한 기질을 가진 짝이다. 그는 피가 흐르는 눈앞의 광경에 몸이 마비되어 버렸다. 그리고 덜덜 떨며 제대로 움직이질 못했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스틱스 강에서 온 사신이 다시 신호를 보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에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조용히 말했다. “재수 없는 멍청한 새끼. 그런 말은 여자한테 하는 게 아니라고. 세수나 해, 멍청한 자식아. 피 흘리다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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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남편 쪽에 가까웠다) 침대에 누웠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햇빛을 받으며 잔디 위에서 낮잠을 잔 후 잔디가 눌린 것처럼. 유령을 찍는 것 같았다. 그녀는 팬티를 벗고 침대 위에 앉아 산부인과 의자 위에서처럼 다리를 벌리고 카메라를 침대 위에 올려놨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카메라를 제대로 놓은 것 같았다. 아, 카메라의 셔터 소리, 그 냉담한 만족의 소리, 차가운 찰나의 찰칵 소리가 그녀의 중심부를 빨아들이고 마치 멜론의 씨처럼 축축하고 달콤한 어둠을 밝혔다. 그건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이었으므로 후대를 위해 그 주름진 특성을 밝은 빛 아래서 찍어두는 것도 좋다. 어쨌든 어떤 얼굴들은 더 천연덕스레 벌어져 있는 것이다. 그건 상당히 객관적이었고, 음란과 분노, 욕정의 기억을 초월했다. 카메라의 렌즈는 의사처럼 오직 사실만을 보았다. 그녀는 양말 사이에서 반쯤 드러나 있는, 사용하지 않은 콘돔 상자를 찾아냈다. 상자를 열고 몇 개를 꺼내 무작위로 펼쳐놓았다. 그저 쉽게 알아볼 수 있게끔 말린 가장자리만 보이게 했다. 그런 다음 마치 부모님의 옷장 서랍을 뒤지는 10대처럼 콘돔을 다시 상자 안에 잘 정리해 넣고 상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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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에게는 아이들이 있다. 아직은 어린 아기지만, 아기는 커서 사람이, 남자와 여자가 된다. 나는 내 사랑을 아이들에게로 돌릴 수 있다. 이 사람을 떠나자. 아니야, 편리한 점이 있는 한 이 사람과 살자. 그 이상은 아니다. 아다는 눈물을 그쳤다. 눈물은 부드러움과 연약함을 나타냈다. 이미 울기엔 늦었다. 이제 어머니와 아버지는 안 계신다. 남동생 보이는 몇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데다가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내 힘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아다는 집을 찾고 있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그녀는 한 번도 집을 가진 적이 없었다.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사람들 사이에서 집을 찾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온 세상이 잘못되었다거나 다른 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제 아다에게는 집에 함께 머물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다는 아이들을 낳을 수 있는 도구로서 프랜시스를 자신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아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함께 살기엔 위험한 사람이었다.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희생자를 필요로 했다. 아다는 자발적 희생자가 될 마음이 없었다.
--- p.70
내 심장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을 때 나는 내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여기에 아기를 두고 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저 계단만은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온 복도에 내팽개쳐진 식료품들, 터진 케첩, 깨진 유리컵, 계단 밑 정문까지 굴러 떨어진 오렌지들, 입주민 위원회에서 뭐라고 할까 같은 것들을 생각하니 낭패감이 들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이 모든 걸 위층으로 옮겼다. 그리고 무릎을 들어 식료품 꾸러미를 무릎 위에 잠시 올려둔 채로 문을 열었다. 아기를 눕힌 다음 나도 몸을 눕힌 채 죽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기를 내려놓고 아기가 소파 위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회한이 밀려왔다. 나는 내가 아기를 그곳에 두고 떠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내가 죽으면 아기는 즉시 소파에서 굴러 떨어질 것이고, 울음소리를 들어주는 이 없이 몇 시간이고 애처롭게 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어린애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려 애쓰던 그때 아이가 울기 시작했고, 젖을 먹여야 할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 p.83
아기가 튼튼하고 견고하게, 마치 사과처럼 포장되어 방으로 들어오자 제니가 아기를 확인한다. 아기는 온전하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제니는 새로운 단어들에 휩쓸리고, 제니의 머리카락은 점점 짙어진다. 제니는 원래의 자신이기를 그만두고, 서서히 다른 누군가로 바뀌어간다.
--- p.123
그 권위 있는 목소리, 책 속의 여자는 아기 체온을 재고 목욕 시키는 법을 알려준다. 동시에 누군가는 리듬을 타듯 속삭이고 있다. “아
빠, 아빠가 보스고, 영웅이에요.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빠예요. 그것만이 자연스러워요, 아빠가 가장 크고 아빠가 가장 강해요. 엄청 빨리 달리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아빠예요. 엄마, 엄마는 착한 요정이에요. 아기가 배고프고 목마르면 오는 사람이에요. 엄마는 누가 부르면 항상 달려오는 사람이에요.” 425쪽 내내. 끔찍한 말을 하는 목소리. 누구도 나만큼 키도를 잘 보살필 수 없어. 아이 아빠도 못 해. 아빠는 부성 본능이 없어. 부성적인 “구석”이 있을 뿐이지. 참담하다.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교활한 방법. “애가 당신 불러… 당신 안 들리는 척하고 있지… 당신 몇 년 후에는 애가 ‘엄마, 여기 있어’라고 말하는 걸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을걸.
--- p.131
여름날 저녁의 시원한 강둑 위에서 두 여자는 은빛과 푸른빛에 휩싸여 힘든 일을 치러냈다. 둘은 이 세상에서 다시 서로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그건 그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푸른 고사리에 둘러싸인 그 여름날 밤 둘은 힘을 합쳐 일을 알맞게, 잘 해냈다. 버려진 두 사람, 법 바깥에 있는 두 범법자(노예 한 명과 머리를 엉망으로 풀어헤친 맨발의 백인 여자)가 태어난 지 10분밖에 안 된 아기를 입고 있던 누더기로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을 지나가던 순찰관이 봤다면 킬킬거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순찰관도, 목사도 지나가지 않았다. 강물은 뒤에서 저 혼자 쓸려왔다 삼켜졌다. 두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둘은 알맞게, 잘 해냈다.
--- p.153
전부는 아니더라도, 내가 나의 오래된 사전에게 해주는 일 중 어떤 것은 아들에게도 해줄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천천히, 신중하게, 부드럽게 사전을 만진다. 사전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준다. 사전의 나이를 고려한다. 존중하는 태도로 사전을 대한다. 사전의 한
계를 안다. 사전에게 능력 밖의 일을 요구하지 않는다(예를 들면 나는 사전을 펼친 채로 책상 위에 올려두지 않는다). 사전을 사용하기 전에 잠시 멈추고 생각을 한다.
--- p.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