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병원의 일인용 병실에 누워 있었다. 경찰이 그녀의 변호사가 동석한 가운데 심문을 했다. 앨리샤는 심문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백한 입술에는 핏기가 보이지 않았다. 가끔 입을 씰룩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브리엘을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았을 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체포당하는 순간에도 입을 다문 채 죄가 없다고 부인하지도, 그렇다고 자백하지도 않았다. 앨리샤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 p.20
앨리샤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수수께끼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흘렀다. 상담 치료라기보다는 인내심 테스트처럼 느껴졌다. 어느 방향으로도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크리스티안이 쥐들은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는 법이라며 지적했던 말이 옳았다. 물에 가라앉고 있는 난파선에 기어올라 돛대에 몸을 묶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대답은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디오메디스가 말한 대로 앨리샤는 침묵하는 세이렌이었고, 나를 파멸로 유혹하고 있었다. 갑자기 절망감이 느껴졌다. 앨리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뭔가 말해봐. 뭐라도. 입이라도 열어. --- p.126
갑자기 아이 모습의 내가 떠올랐다. 불안감에, 온갖 공포와 온갖 고통을 끌어안은 채 터지기 직전인 아이. 끝도 없이 서성거리고 가만히 있지 못하면서 두려워하는 모습. 혼자서 미치광이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견뎌내는 아이. 얘기할 사람은 없었다.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앨리샤는 나와 비슷하게 절망적인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바비에게 털어놓았을 리 없다. 몸이 떨렸다. 머리 뒤에서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홱 돌아섰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텅 빈 도로는 어둡고 조용했다. --- p.253
그 순간 뭔가를 알아차린 나는 숨이 훅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앨리샤의 뒤쪽 어둠 속,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을 열중해서 들여다보면 어둠 속에서도 가장 어두운 부분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어둠 속에서 뭔가 모양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2차원인 그림이 특정한 방향에서 보면 3차원 홀로그램으로 보이는 것처럼 어떤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 사내가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지켜보고 있었다. 앨리샤를 감시하고 있었다. --- p.316
이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 우리는 상담가와 환자 사이에 존재하는 마지막 남은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머지않아 우리는 누가 누군지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 p.342
그자였다. 그리고 내 몸속의 뭔가가, 일종의 들짐승과도 같은 본능이 날 압도했다. 그를 죽이고 싶었다. 죽이지 못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에게 뛰어올라 목을 조르고 눈알을 파내고, 머리를 박살내 바닥에 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를 죽이는 데 실패했고, 병원 사람들이 바닥에 날 넘어뜨리고 진정제를 주사하고 가두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이후에는 기가 죽고 말았다. 나는 다시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실수를 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상상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자가 아닐지도 몰랐다. --- p.386
이제 알 수 있었다. 나는 절대로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내 모든 희망은 꺾이고 모든 꿈은 부서져 아무것도 전혀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