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욥기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욥기를 직접 읽거나 설교를 통해 접해 본 이들은 아마도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 혹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를 그 핵심 메시지로 기억할 것이다. 사실 이 구절들은 욥기의 핵심을 오랫동안 왜곡시켜 왔다. 아무리 성경을 사랑하고 많이 읽어 온 사람이라도 총 42장에 걸친 인간의 고통에 관한 욥기의 기나긴 논쟁에 귀 기울이기란 쉽지 않다. 욥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질문과 주제의식은 설교와 회중의 관심에서 외면당해 왔다.
욥기는 ‘산문체 이야기’(prose-tale)라는 문학 양식 위에 욥과 욥의 친구들, 그리고 여호와와 욥의 긴 ‘다이얼로그’(dialogue)를 통해 악과 고통에 대한 처절한 고뇌를 구현한다. 욥기의 다이얼로그는 길이와 깊이 면에서 주요 고대 근동 문헌들보다 훨씬 강렬하게 고통의 문제를 담고 있으며, 신약성경부터 제2성전기와 초기 랍비 문헌을 거쳐 기독교 문학의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후대의 성경 해석과 철학, 문학, 예술 작품, 음악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한 예로 17세기 영국의 비국교도 성직자이자 설교가 조지프 카릴(Joseph Caryl, 1602-1673)은 24년간 욥기를 두 달에 세 번 꼴로 424회나 설교했으며, 그의 설교는 청교도들의 저작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힌다. 19세기 프랑스 문학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욥기를 일컬어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걸작”이라 했고, 동시대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욥기에서 표현된 만큼의 강렬한 고통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20세기 독일 구약학자 게오르그 포러(Georg Fohrer, 1915-2002)는 “욥기는 단테의 작품과 괴테의 『파우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세계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욥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최근에는 해석의 다양성을 골자로 다른 성경 텍스트와의 관계에 대한 욥기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지혜문학에서 ‘지혜’의 정의와 관련해 욥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고대 근동 문학 작품과의 유사성에 근거를 둔 문학 장르와 역사 배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욥기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연구 방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창조신학(creation theology): 레오 퍼듀(Leo Perdue)는 지혜문학 전체에 드러나는 ‘창조’라는 주제를 발견해 창조신학의 기반 위에서 욥기를 해석한다. 이는 지금까지 상당수의 복음주의 구약신학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 패러디(parody): 캐서린 델(Katharine Dell)은 최근 영미권 연구에서 두드러진 관점인, 시편 찬송시에 나타난 패러디 연구를 한다. 델은 욥기가 전통 찬송시들을 의도적으로 오용함으로써 찬송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비난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그린스타인(Edward L. Greenstein)은 욥기가 예레미야와 신명기 텍스트를 패러디 한다고 말한다.
·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 마르쿠스 비테(Markus Witte)는 욥기의 저작 방식을 편집비평적 관점(여러 편집자들의 작업의 결과로서)으로 분석한다. 비테는 욥기의 각 부분이 여러 저자의 각기 다른 신학 관점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 해체(deconstructing job): 데이비드 클라인스(David Clines)는 『WBC 욥기 주석서』와 그의 논문들에서 욥기가 오래된 도덕 질서와 가치관을 해체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 다성의 특질(polyphonic text): 캐럴 뉴섬(Carol Newsom)은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과 여러 언어학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욥기의 여러 텍스트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다성의 특성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 고대 근동 문학(ancient near eastern literature): 존 그레이(John Gray)가 바벨론 문학 장르들과 욥기의 공통점에 대해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 이후, 욥기를 고대 근동 문학의 배경 아래 해석하려는 다양한 연구가 있었다. 최근 레이철 막달린(F. Rachel Magdalene)은 욥기가 신바벨론 법정의 법률 형태와 표현을 차용한다고 주장했다.
· 제사장 문헌(priestly document): 새뮤얼 밸런틴(Samuel Balentine)은 욥기를 제사장 문헌의 배경에서 읽어야 하며 제사장 그룹의 쇠퇴에 대한 논의라고 말한다.
· 본문상호관계성(intertextuality): 하나의 성경 텍스트는 그와 관련된 사회·문화적 텍스트 배경과 연결해 생각해야 한다는 상호관계성[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입각한 연구가 욥기에 활발히 적용되어 왔다. 권지성은 토라, 토빗, 이사야, 그리고 70인역(LXX)과 욥기의 관련성을 연구했으며, 윌 카인스(Will Kynes)는 시편과 욥기 사이의 접촉점을 분석했다.
-국내 욥기 연구서
그렇다면 이 책은 국내의 기존 욥기 해석 및 접근 방식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국내에서 출간된 욥기 연구서 중 하경택과 안근조의 학문 작업과, 지혜문학의 하나로 다룬 배정훈의 욥기 연구는 대중적인 욥기 설교와는 확실한 차별점을 가진다. 특히 하경택과 안근조의 연구는 설교자가 놓치기 쉬운 텍스트에 대한 문법적·문학적·역사적 주해와 상당 기간에 걸친 이 분야의 연구가 집약되었다는 점에서 여타 대중서들과 구별된다. 그럼에도 세 가지 면에서 본 연구와 두 연구는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
첫째, 두 연구자는 42:1-6의 욥의 최종 고백을 바람직한 신앙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42:6을 하경택은 욥의 ‘회개와 깨달음’으로, 안근조는 ‘회개’가 아닌 ‘깨달음’으로 풀이한다. 여기서 두 연구자 모두 ‘들음’의 신앙에서 ‘봄’의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여호와의 연설을 통해 욥이 무엇인가 학습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해석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호와의 연설에 대한 욥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반응에서 그가 어떤 회개와 깨달음을 얻었는지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간과한 듯하다. 왜냐하면 천상 회의에서 여호와의 칭찬(1:8; 2:3)과 욥의 의로움에 대한 여호와의 선언(42:7-9)은 여전히 그가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임을 독자들에게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물론 욥은 여호와의 연설에서 하나님을 정죄했다는 지적을 받지만(40:8), 이는 욥의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욥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여호와의 연설이 무고하게 고통 받은 사람의 마음에 필히 커다란 각성을 일으킨다고 보는 것은 본문에 대한 오해다.
둘째, 두 연구자는 욥기의 에필로그를 행복한 결말과 회복이라는 기본틀에서 서술한다. 안근조의 경우는 이를 명확히 밝히진 않는데, 인과응보의 원리가 에필로그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며 이 교리의 목적은 신적 통치의 인정이라고 모호하게 마무리한다. 그리고 욥이 받은 최후의 축복이 ‘인과응보론’(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정의 곧 신정론)의 ‘강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정 인과응보론이 욥기 최후의 메시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사실 욥의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었던 몸의 질병에 대한 언급이 에필로그에 생략되었다는 점도 이런 의심을 강화한다. 욥의 결말에 대한 이러한 두 저자의 이해는 욥기 2:3과 욥 개인의 고통의 문제 및 사회의 정의 실현 문제에 대한 외침 소리를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욥기 3-27장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정의’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과 논쟁은 반드시 프롤로그에서의 경건과 축복의 인과 고리의 파기와 에필로그에서의 내러티브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셋째, 공교롭게도 두 책은 동일하게 욥기를 ‘창조신학’과 연결시킨다. 특히 안근조는 지혜의 의미와 창조 그리고 욥기를 하나로 통합해 욥기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하경택은 부록에서 창조 모티브가 드러난 욥기의 텍스트를 언급하며 마치 욥기의 저자가 이를 차용한 것처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가능하다. 하지만 지혜문학이 창조신학과 동일한 것으로 욥기가 제사장 문헌(priestly text)의 하나인 창조 모티브를 적극 수용한다는 것은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사실 욥기 전체는 질서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를 거꾸로 뒤집는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세상을 혼돈의 도가니로 만드는 리워야단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더구나 ‘지혜’는 욥기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욥기의 저자는 지혜의 특성을 규정하고 이를 강조하는 일에 거의 무관심하다. 그러므로 잠언의 지혜와 욥기의 지혜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욥기를 읽어야 할 이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스라엘의 역사는 물론 미래의 이야기도 다루지 않은 욥기를 읽어야 하는가?
첫째, 욥기는 하나님 중심의 우주적 세계관을 진술한다. 인간의 고통, 인과응보의 법칙과 회의에 찬 질문들, 그리고 여호와의 연설을 통해 욥기는 신적 정의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알려 주고 인간의 무지 속에서 펼쳐지는 우주적 비전을 보여 준다. 이 비전 속에서 여호와의 주권과 통제도 아울러 목격한다. 이는 무질서하고 정형화할 수 없는 자유로운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는 『신학 실종』(No Placefor Truth, 부흥과개혁사)에서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포스트모던 문화에 종속된 현대 복음주의 교회를 진단했다. 물론 어느 시대건 교회는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지나치게 민감하게 인간 중심의 문화(마케팅, 심리학, 경영학 등)에 반응한다. 이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이 중심인 성경의 신관이 무너져 가고 있음을 쉽게 발견한다. 그러나 욥기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우주적 세계관을 보여 주며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님에 대한 거짓 이미지를 거부한다. 욥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세계에서 정의와 심판에 대해 자율권을 가지시며, 그 어떤 인간의 법칙에도 얽매이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소비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심을 입증한다. 문화와 인간 지성의 판단 기준에 따라 그 위엄과 영광이 훼손되지 않는 분이시라는 신관은 오늘날 교회가 최우선으로 회복해야 할 가치가 아닐까?
둘째, 욥기는 세상의 정의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을 깨우친다. 무죄한 자의 고통이라는 이야기의 토대 위에서 고통과 정의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다. 욥기는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시편과 함께 인간의 절망과 고통의 상황을 가장 절절하게 그려 냈다. 책 속의 상황들은 실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욥은 자신이 생각하고 믿었던 세계의 질서와 정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무너졌기에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의심을 품고 질문한다. 물론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고백 위에서 있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경건한 욥처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 속에서 악과 고통의 모순을 발견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불의한 일들에 대해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가 주장해 왔던 인과응보의 원칙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긍휼이 상실된 의문과 의심 없이 세워진 그 철학자들의 자기기만을 향해 진노의 철퇴를 내리셨다.
욥기는 연속 드라마와 같다. 이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욥기는 고통과 정의, 신적 아름다움이 마치 무대 위 배우들이 연기하듯 끝없는 독백과 대사의 공방으로 이어진다. 욥기의 모든 장(chapter)을 지면에 다루려 했고 실제 상당 분량의 원고를 작성하였으나 독자들의 접근성을 고려해 다이얼로그의 일부분을 취사선택해야 했다. 따라서 이 책은 욥기 전체 42장 중 일부 장을 선별해 구성했으며, 세 친구와 욥의 다이얼로그 일부(9-10, 12-17, 19-22, 25-27장)는 생략했다. 무엇보다 성경 본문의 단어와 문장의 본래 의미 및 문맥상 의미를 모두 고려했다. 그리고 각 장 마지막 부분에 요약과 적용점을 함께 서술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