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신화의 시대인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모두 키메라 chimera로, 이론과 공정을 통해 합성된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 곧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론이며, 정치는 여기서 시작된다. 사이보그는 역사적 변환 가능성의 구조를 만드는 두 개의 구심점, 곧 상상과 물질적 실재가 응축된 이미지다. “서구”의 학문과 정치의 전통 ? 인종주의적이고 남성 지배적인 자본주의의 전통, 진보의 전통, 자연을 문화 생산의 원재료로 전유 appropriation하는 전통, 타자를 거울삼아 자아를 재생산하는 전통 ? 속에서 유기체와 기계는 줄곧 경계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의 요충지는 생산, 재생산, 상상의 영토가 되어왔다. 이 글은 경계가 뒤섞일 때의 기쁨, 그리고 경계를 구성할 때의 책임을 논한다. --- pp.19-20
서구 전통에서는 특정 이원론들이 유지되어왔다. 이 이원론 모두는 여성, 유색인, 자연, 노동자, 동물?간단히 말해 자아를 비추는 거울 노릇을 하라고 동원된 타자?로 이루어진 모든 이들을 지배하는 논리 및 실천 체계를 제공해왔다. 이 골치 아픈 이원론에서는 자아/타자, 정신/육체, 문화/자연, 남성/여성, 문명/원시, 실재/외양, 전체/부분, 행위자/자원, 제작자/생산물, 능동/수동, 옳음/그름, 진실/환상, 총체/부분, 신/인간과 같은 것이 중요하다. 지배되지 않는 주체 the One이며, 타자의 섬김에 의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자아다. 미래를 쥐고 있으며 지배의 경험을 통해 자아의 자율성이 거짓임을 알려주는 이가 타자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율성을 확보하고 막강해지며 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주체됨은 환상이며 그 때문에 타자와 함께 종말의 변증법에 들어가게 된다. --- p.77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몸과 도구를 설명해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 아니라, 불신앙을 통한 강력한 이종언어 heteroglossia 를 향한 꿈이다. 이것은 신우파의 초구세주 회로에 두려움을 심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기계, 정체성, 범주, 관계, 우주 설화를 구축하는 동시에 파괴하는 언어이다. 나선의 춤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 p.86
미즈 카옌 페퍼 Ms. Cayenne Pepper가 내 세포를 몽땅 식민화하고 있다. 이는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 Lynn Margulis가 말하는 공생발생 symbiogenesis1의 분명한 사례다. DNA 검사를 해보면 우리 둘 사이에 감염이 이루어졌다는 유력한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장담한다. 카옌의 침에는 당연히 바이러스 벡터가 있었을 것이다. 카옌이 거침없이 들이미는 혓바닥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우리가 함께 속하는 자리는 척추동물이라는 문 門, phylum에 머물 뿐 다른 속 屬, genera 및 분화된 과 科/가족 families, 심지어 아예 다른 목 目/질서 orders 속에서 살아가지만 말이다. --- p.115
반려종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반려종을 만들려면 적어도 두 개의 종이 있어야 한다. 반려종은 통사론 syntax 속에, 육신 속에 있다. 개들은 벗어날 수 없는 모순적 관계의 설화 속에 있다. 이러한 공구성적 관계를 이루는 어느 쪽도 관계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고, 이런 관계는 한 번에 맺어 완성할 수도 없다. 역사적 구체성과 우발적 변이 능력이, 자연과 문화 속으로, 또 자연문화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길을 계속 좌우한다. 기초 같은 것은 없다. 아무리 뚫고 내려가 봐도 위의 코끼리를 떠받치고 있는 코끼리들밖에 없다. --- p.129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역사적 자연문화를 통해 백인 중산층적 삶을 살아가는 피레니즈와 오시 세계의 사람들은, 바로 이 개들의 일로 유지되던 목축 경제가 파괴한 초원 생태와 삶의 방식을 다시 상상하는 데 참여할 의무가, 아직 명쾌하게 규정되지는 않았어도 확실히 있다는 점을 나의 몸으로 느낀다. 나 같은 사람들은 함께 사는 개들을 통해 토착민의 주권, 목축 경제 및 생태적 생존, 육류 산업 복합체의 급진적 개혁, 인종 정의, 전쟁과 이주의 귀결, 기술문화의 제도와 맞닿게 된다. 헬렌 베란의 표현을 빌리면 “함께 잘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 “순종”인 카옌과 “잡종”인 롤런드, 그리고 내가 우리 서로를 만질 때,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해준 개들 및 사람들과 연결된 관계를 우리의 육신 속에 체현한다. 나와 땅을 함께 쓰는 이웃인 수전 코딜의 감각적인 그레이트 피레니즈인 윌렘을 쓰다듬을 때, 나는 애견 전시회 및 다국적 목축 경제뿐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 부닥친 캐나다 회색 늑대, 경제적 가치가 높아진 슬로바키아 곰, 국제 복원 생태학을 만지게 된다. --- p.236
〈사이보그 선언〉 은 이 세상에 사는 나 자신이, 이처럼 크고 작고 거대한 사안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면서 쓴 글입니다. 바꿔 말해, 나라는 사람은, 2차 대전 이후의 미국 헤게모니와 마찬가지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거대하지만, 그 속에서 구축된 우정·정치·연애사처럼 피부에 와닿는 경험으로 실감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 체험은 특히 권력이 정보로 포화상태에 달한 문화, 정보과학으로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된 문화와 정치, 명령-통제-통신-첩보C3I 속에서의 경험입니다. --- p.253
어원학적으로, 인간 human 은 후무스 humus에서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호모 homo 를 연상시킵니다만 ?“나쁜” 방향이죠 ? 후무스로 가는 “휴먼”도 있는데, 이게 “좋은” 방향이죠. 너무 단순해지면 안 되고요. (둘 다 웃음) 흙, 지구, 후무스를 만드는 방향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호모 방향으로 가는 남근적 “(남성)인간”이 있습니다. 늘 포물선을 그리며 바로 그 “인문학”의 방향으로 팽창하고 수축하는 호모가 있지만, 후무시티에는 다른 가능성이 있지요. 그래서 제 구호는 “포스트휴머니스트 말고 퇴비를 Not Posthumanist But Compost”입니다.
--- pp.322-323